부여국은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였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사방이 2000리이고, 본디 예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의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아들인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掩淲水)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부여국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이다. 사방이 2000리이며, 호구 수는 8만이다.
한나라는 부여를 두려워했는데 왕망이 말하길 부여인들이 또다시 일어설까 두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나라 초기 부여는 장성의 북쪽 즉 상간하 바로 북쪽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나라였다. 대소가 고구려 정벌에 동원한 군대가 5만이니 정규군이 10만은 되었다.한나라가 흉노와 싸울때 고작 10만내외를 동원한 것을 감안하면 부여는 상당히 인구도 많고 군사강국이었다.
선비족이 위나라 말기부터 내려오기 시작하여 진나라때는 대놓고 사군지역을 장악해 갔다. 그러니 부여밑에 원래 고구려가 있었는데 고구려마져 선비족에게땅을뺏긴 것이다.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이르기를, “고구려가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000여 리였다
《당서(唐書)》
송나라때 화이도라는 지도이다. 위의 지도를 보면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알수 있다. 거란지리도상의 만리장성은 상간하에서 끝나는데 화이도에는 그장성이 계속 연장되어 있다. 또한 난하를 기점으로 두장성이 끊기는데 아마도 고구려의 초기 천리장성은 난하인근에서 시작했을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은 산해관바로 다음부터 부여성까지인데 이는 고려와 조선이 수축한 것으로 고구려의 것보다는 짧아 보인다. 왜냐면 요나라의 동경이 있는 난하바로 동쪽을 고구려는 차지했는데 고려와 조선은 그곳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에 이르기를, “부여는 처음에 녹산(鹿山)에 살다가 서쪽으로 연(燕) 지역 가까이로 옮겨 왔다
진나라 영화(永和) 2년이다. 당초에 부여가 녹산(鹿山)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녹산은 바로 그곳에 있다.- 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어 부여를 습격하게 하여 부여 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부여가 원래 만리장성바로 위까지였는데 고구려에 밀려 약화된후 백제의 침공을 받아 태원인근까지 간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연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후위서(後魏書)》를 보면, 세조(世祖) 때 고구려의 지역이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옛 부여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고구려가 북위때 발해만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당서》에는 이르기를, “고구려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이웃하고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말갈의 서쪽은 돌궐(突厥)에 속하고 남쪽은 고구려와 닿아 있다
돌궐의 경계는 흑룡강의 원류까지이다.
개원(開元) 11년(723)에 달말루(達末婁) 수령(首領)이라는 자가 와서 조공하였는데, 달말루가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인데,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자 남은 사람들이 나하(那河)를 건너가 그곳에서 살았다.” 하였다. 나하는 혹 타루하(他漏河)라고도 하는데, 동북쪽으로 흘러서 흑수(黑水)로 들어간다.
돌궐의 경계부터 고구려 발해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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