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부여는 강대국이었다.

참빛7 2013. 5. 21. 17:45

○ 부여(夫餘)에서는 적옥(赤玉)이 산출된다. 《후한서》

 

《삼국지》를 보면, “부여국은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에서의 거리가 1000리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도리(道里)로 계산해 보면, 부여에서 한(漢)나라 요동군(遼東郡)까지의 거리가 1천 4, 5백 리이며, 지금의 개원에서 요양성(遼陽城)까지의 거리는 겨우 300리밖에 안 된다. 그리고 적옥(赤玉)과 미주(美珠)가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경내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그런즉 부여부(夫餘府)는 마땅히 변새(邊塞) 밖의 영고탑(寧古塔)이나 흑룡강 등의 지역에 있어야 한다.

해동역사

 

조선시대 후기에도 부여의 땅을 지금의 흑룡강일대는 거의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읍루(挹婁)는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다.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고, 그 북쪽은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高句麗)와는 다르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가죽[挹婁之貂]’이 그것이다.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夫餘)에 신하로 복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지나치게 물리자, 황초(黃初) 연간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가 여러 차례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숫자는 적지만 험한 산속에 살고 있는 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는 탓에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삼국지》 ○ 《후한서》의 읍루열전(挹婁列傳)도 내용이 같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쯤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그 땅의 경계는 너비와 폭이 수천 리이다.

《진서(晉書)》

읍루와 숙신은 동일한 부족이며 부여의 통치를 받는다. 숙신씨의 땅은 약수 즉 지금의 흑룡강일대이며 너비와 폭이 수천리로 굉장히 크다.

 

웃기지도 않는다. 자세히 보라 읍루는 왜  부여땅에 속한다고 안 쓰는가 이지도를 보면 누구라도 부여는 겨우 남한정도 크기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짱개들의 역사지도를 보라 부여와 읍루를 동일선상에 표기하였다. 게다가 그 크기도 엄청나다.

 

대한민국 국사학계는 부여를 남한의 2/3정도로 표기하는데 짱개들은 부여를 동북3성의 대부분과 연해주로 표기해준다. 허벌나게 웃기는 상황이다. 이러고도 우리 나라 국사학자들이 과연 양심이 있는 사람(?)인가?

 

부여의 실제 강역 진과 한시대의 장성유적은 짱개학자들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장성은 명나라시대 장성과 고려가 쌓은 장성을 합친 것이다.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오고 부여에서 여진의 조상 숙신이 등장하고 북부여에서 몽골의 조상 실위가 등장한다. 우리 역사는 고조선에서 부여로 이어지고 부여의 계승자가 진정한 고조선의 계승자이며 천자였던 것이다. 백제가 남부여라고 이름을 바꾼 이유가 바로 천자국의 지위를 고구려에 뺏기기 싫어서 아예 이름조차 부여라고 해버린 것이다. 고구려도 계속 부여에서 나왔다라고 말하며 정통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신라조차도 부여에서 왕모가 나왔다고 하며 한나라 건국시 부여의 기병이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부여의 위상은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출처 : 이민준비중
글쓴이 : 잠수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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