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의
추억” 다시보기
게이샤는
한자로 藝者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예능을 기본으로 하여 오직 그것만을 팔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게이샤는 예능인이다.
우리나라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기생(妓生)이 있는데, 기생이란 말 역시 기예(技藝)에 살고 죽는 사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들
게이샤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의 주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게이샤는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절제된 춤동작과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그들만의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는듯한 음악과 소리 등은 게이샤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일본문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런 게이샤 문화를 먼 나라의 미국인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게이샤의 추억”이다.
세계
흥행 영화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을 제작하는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많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 감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개봉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명성에 걸맞듯이 이 영화는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촬영기법과
주연배우들의 화려한 경력, 절묘한 색감의 대비 등으로 우리에게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감독, 주연배우들의 명성 등에서 볼 때 “게이샤의 추억”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본 느낌은 아주 씁쓸하다. 씁쓸하다 못해 아주 모욕적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만을 내세우면서 관객을 무시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롱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2F31_3_31_15_08RVN_IMAGE_0_41.jpg%3Fthumb&filename=41.jpg)
이
점은 영화 전편을 통해 감독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것인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21세기의 제국주의적 성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영화를 그렇게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 대립구도의 성격이 본질을 벗어나 있다는 점, 둘째, 예능인의 시각에서
게이샤를 조명하지 않은 점, 셋째,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점, 넷째,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제국주의적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지금부터 이런 점을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
이 영화의 구성은 철저하게 대립적이다. 그렇다고 대립구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립은 갈등을 낳는 요인이 되는 것으로 긴장과
해소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 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립구도의 성격이다. 이 영화의 대립구도는 게이샤와 게이샤의 대립이 중심을 이루는데, 이 대립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예능을 위한 대립이 아니라 그들의 주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가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해코지하고자 하는 대립과 유치한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대립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유리(장쯔이)와
하츠모모(공리)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그 둘의 대립은 기예를 통한 대립이 아니라 자본가와 세력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대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구도를 과연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론 게이샤도 사람인 이상 그들의 생활 속에서
이러한 대립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샤의 삶은 예능이 핵심을 이루는 만큼 게이샤의 대립을 그리기 위해서는 예능적 대립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은 부수적으로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게이샤의 유치한 대립만을 강조함으로써 게이샤의 생활이 마치 그런 유치함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이샤는
예능을 통해서 말하고 예능을 통해서 대립한다는 원칙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짜증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짜증 섞인 긴장을 통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닌 다음에야 이것을 정상적으로 보아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게이샤의 추억”은 대립구도를 통해 게이샤가 지닌 문화적 특성을 영화라는 장르를 통하여 예술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게이샤라는
존재가 지닌 인간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강조함으로써 이 작품에서 게이샤로 대표되는 일본문화에 대한 감독의 부정적인 주관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예능인의 입장에서 게이샤의 삶을 조명하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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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앞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게이샤는 예능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에 대한 좋고 싫음은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야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렇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게이샤를 진정으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닌 예술세계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작품의 시작에서 끝가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점은 눈에 띠지 않는다. 죽음을 앞 둔 부모가 두 딸을 팔아넘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료 게이샤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가진 예술세계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제작자가 이런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여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만약 제작자가 게이샤의 예술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순수하게 접근했더라면 과연 그런 주변적인 것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게이샤의 삶을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보자. 앞에서 말한 인신매매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는 사유리가 게이샤로의 삶을 살아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어린 나이에 팔려가서 게이샤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인 갈등들이 게이샤가 지닌 예능인으로서의 삶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이
있는지를 제작자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또한
게이샤가 된 후 그려지는 사유리의 삶도 예능인으로서의 게이샤를 충실히 그려내고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게이샤가 된 주인공이 보여주는 예능은
작품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전체의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무대 밖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게이샤는 원래 예술세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보다는 부와 권력 등에 집착하는 존재로 오해를 할 여지가 다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이샤는
창녀가 아니다. 창녀와는 반드시 구분되어야하는 존재로서 그들은 일본이 자랑하는 예능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게이샤와 창녀를
전혀 구별하지 않았거나 거의 그 조건을 무시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제작자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무지함, 혹은 그 문화에 대한 멸시가 나타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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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게이샤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제작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게이샤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자는 일본 문화에 대한 좋고 싫음을 떠나서 그것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전혀 달랐다. 과연 제작자가 일본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즉, 일본문화의 특징이 바로 게이샤라는 프리즘을 통해 관객에게 잘 느껴지고 보여 질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게이샤라는 문화적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게이샤의 삶을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게이샤가 지닌 일본에서의 문화적 가치는 제대로 조명하지 않고 제작자가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에 맞는 것만 부각시켜 그려낼 때 과연
우리는 그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그리려고 했던 것은 게이샤의 문화적 가치나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게이샤의 추억”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인간적 사랑의 승리라는 허울 좋은 휴머니즘을 내세워 그는 과연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선민의식과 우월의식, 그리고 영웅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라도 미국에 대해서는 감히 어떤 시도라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식민주의 내지 제국주의적 우월주의는 영화의 등장인물의 성격이 지닌 제국주의적 성향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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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모두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제국주의적 성격은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위압적이고 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제국주의적 성격과 함께 스스로를 낮추어 강력한 힘에 굴종하는 존재로써의 제국주의적 성격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이제
주요 인물의 성격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사유리, 마메하, 하츠모모의 성격을 보자. 이 세 사람은 게이샤인데, 모두 사업가와 장군과
미군을 중간에 놓고 대결을 벌이는 존재이다.
특히
사유리는 스스로는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사업가나 장군, 그리고 미군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존재이다. 더구나 마지막에
사유리가 얻는 사랑 역시 미군의 도움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유리의 존재는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게이샤로서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성격은 마메하와 하츠모모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두 사람 역시 군대와 기업이라는 제국주의적 지배구도를 이용하여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에 불과하다.
다음으로는
회장과 남작과 노부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성격 역시 게이샤의 그것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군대와 손을 잡고 전쟁물자를 대면서 사업가로
활약하던 세 사람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자 졸지에 빈 털털이가 되었다가 미군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한심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여섯 사람이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인데, 이들은 모두 한 한 곳을 향해 파편화된 무력한 존재이다. 즉, 전쟁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힘을 향해 파편화되어 있는데, 이런 점이 바로 이 영화를 제국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가지는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미국이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성격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일정한 인물의 영웅화를 통해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파편화되어 무기력한 상대를 중점적으로 그린 다음 그것을 해결해주는 존재로 등장하는 미국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앞의
것에 해당되는 영화는 “로마의 휴일”, “람보”, “라이언 일병 구하기”, “킹콩” 같은 작품들을 들 수 있고, 뒤의 것에 해당되는 영화는
“인디펜던스 데이”, “맨 인 블랙”, “미션”, “게이샤의 추억”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게이샤의 추억”은 사랑의 쟁취라는 매우 휴머니티한 주제와 게이샤의 삶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하여 위에서 말한 여러 제국주의적 요소들을 그
속에 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문화적 식민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독이
지닌 이러한 성향은 주인공으로 분장한 배우들에 의해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게이샤 역을 맡은 세 명의 배우가 모두 중국인이라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배우들인데, 모두 과거 홍콩이나 중국에서 국민배우로 칭송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나란히 가장
중요한 배역에 등장시킨 것이 과연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게이샤라는
작품 속의 캐릭터와 중국 배우라는 실제 캐릭터가 맞물렸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일본과 중국이
동양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강하게 나타낸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나친 피해의식으로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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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는 제작자나 감독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문화의 어두운 면과 그 문화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중국 배우의 이상한 연기력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아주 이상한 작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당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이 무당 흉내를 내면서 굿을 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만든 영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홍보 포스터에서 말하듯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단 하나의 사랑만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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