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경래 장로가 새마을운동의 창시자는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1912~1988)라고 밝혔다.
김 장로는 지난해 출판한 ‘기자 30년, 장로 30년 김경래 회고록’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홍성사, 2013, 김경래 구술, 백시열 장로)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 장로는 이 책에서 “5.16 이듬해인 1962년 2월 초순,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출입기자들이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중 농 촌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며 “그 때 나는 서울 부근 광주에 광주농군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김용기라는 사람이 ‘자립, 자조, 절약’의 정신으로 농촌개혁운동을 하고 있으니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가 볼 것을 박 의장에게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나는 김용기 장로가 세운 농군학교 바로 옆에서 교육활동을 하고 있던 이종사촌 형 김기열 장로를 통해 김용기 장로를 다소나마 알고 있었다.”며 “박 의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내일 가보겠다고 하면서 기자들도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그때 동행한 기자가 나와 이만섭, 이자헌, 이종식, 곽지용 기자 등이다.”고 밝혔다.
김 장로는 “부랴부랴 농군학교 위치를 찾고 연락하여 다음 날 광주농군학교(후에 가나안농군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찾았다.”며 “군복을 입고 학교를 찾은 박 의장 일행을 맞은 김용기 장로는 흙바닥 교실에 나무의자 몇 개를 놓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한 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전했다. 그날 김 장로는 우리 민족이 살 길은 농촌 사람들의 생각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밝혔다.
김용기 장로는 특히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야 새사람이 되고, 새사람이 모이면 새마을이 되며, 새마을이 뭉치면 새나라가 된다고 역설했다.”며 “산림녹화, 고리채 탕감, 농지개혁 및 영농 기계화 등에 대해서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밝혔다.
김 장로는 박 의장에게 “기왕 혁명을 했으면 정치인들이 못한 것, 농촌 개혁 같은 일을 해야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훈시하듯 말했다.”며 “박 의장 역시 자리에 앉아 메모를 해가며 경청했다. 그날 박 의장 일행은 천막 식당에서 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로 차린 점심을 먹었다. 박 의장은 김용기 장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김경래 장로는 “이후 박정희 의장은 김용기 장로에게 들은 농촌 개혁에 대해 깊이 생각햇으며, 결국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면서 “가나안농군학교는 공무원들의 정신교육 기관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새마을운동 정신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용기 장로야말로 새마을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겠다.”고 밝혔다.
김 장로는 “그럼에도 새마을운동의 개척자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김용기 장로의 공로를 폄하하려는 모습이 있어 왔는데,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체제는 김용기 장로에게 잉태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밝혔다.
김 장로는 “김용기 장로는 후일 가나안농군학교를 회고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가난이 이어지는 듯한 ‘가나안’이라고 이름을 지어 맥 빠지게 하느냐는 원망을 농민들로부토 들었다고 한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김경래(金景來) 장로는 1928년 4월 3일 경상남도 통영 출생. 독실한 신앙을 지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와 연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1957년 《사회악과 사교운동》 출간으로 한국 사회에 신흥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1960년 「경향신문」에 입사하며 언론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20세기 한국 언론이 보도한 10대 특종’으로 꼽히는 월남 파병 기사, 한국 경제를 뒤흔든 삼분三粉 폭리 사건과 사카린 밀수 사건 기사가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1971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한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당하기까지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위해 숱한 유혹과 격랑의 시대에 맞섰다.
김 장로는 이후 1982년 한경직 목사의 부름을 받고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국장에 취임하여, 당시 분열되고 느슨해 있던 교계 일들에 광폭적 시야와 속도를 더한다.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를 맞아 4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한국기독실업인회 활동, 기드온협회 운동,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25기도모임 등을 총괄 기획하고 조정자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건립 및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성지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한국 교회 연합의 기틀을 세우고 발전의 역량을 마련했다. 지은 책으로 《사회악과 사교운동》, 《사회부 기자 미국 루포》, 《애국가와 안익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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