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은 이야기로 유명한 산돌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정주채 회장)가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은, 손 목사가 순교한 9월 28일 여수 씨티교회(오성국 목사)에서 진행됐다.
▲ 9월 28일 손양원 목사가 순교한 날을 기념해 열린 '산돌 손양원 목사와 순교' 학술 심포지엄. 여수 씨티교회는 애양원교회가 여수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교회다. 이곳에서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원과 시민, 여수 지역 목회자 등 약 80명이 모여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서울에서 온 기념사업회 회원·시민·유학생과 여수 지역 교회 목회자 등 80여 명이 씨티교회를 찾았다. 씨티교회와 이웃 교회인 방주교회(이규원 목사)에서는 주일학교 청년 교사들이 중고등부 학생 20여 명과 함께 심포지엄을 찾았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 학술 심포지엄은 다소 딱딱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손양원 목사를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은 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낯선 시간이었다. 심포지엄은 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역사적 사건과 배경,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 형제를 순교자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한 논란 등을 주로 다뤘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초를 겪었던 임원석 목사의 아들, 임화식 목사(순천중앙교회)가 심포지엄 참석자들을 위한 환영사를 했다. 임 목사는 손 목사를 "지역·이념·계층 갈등을 몸소 풀어낸 훌륭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경남 태생으로 여수 애양원에서 봉사했고,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당원을 양아들로 삼았으며, 모두가 외면한 한센 환자들을 돌보다 순교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 여수 둔덕동에는(예전 미평 과수원 자리) 손양원 목사의 순교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현장에는 손 목사를 기념하는 비석, 기념탑 등이 마련돼 있다. 사진은 그의 초상을 새긴 조각이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신사참배 거부, '예수 천당' 신앙관 때문이었나
손양원 목사는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다. '예방구금'(재범을 우려해 무기한 구금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에 따라 복역 기간을 훨씬 지나, 1945년 8월 17일 해방 이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구금 중 일본 검찰이 수차례 '전향'할 것을 강요했으나, 손 목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예수 천당' 신앙관 때문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1920년대 이래, 한국교회에는 종말론·재림주 신앙과 더불어 내세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전했다. 현세가 아닌 내세 중심 신앙관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박해는 순교의 기회였다는 뜻이다.
▲ 이날 기조 강연에 나선 이만열 교수는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예수 천당' 신앙관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예수 천당' 사상이 우상숭배를 거부할 수 있게 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이만열 교수는 내세 중심 신앙관은 현실 혁명을 바란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한 요소 중 하나였다고 했다. 이 교수 자신도 내세 중심 신앙관을 비판한 과거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수 천당' 신앙이 "신사참배 운동을 이길 수 있게 힘을 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독교 역사학자 박정신 교수(숭실대학교)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종교 운동인가? 민족운동인가?>라는 논문에서 신사참배 거부를 단순히 내세 중심 신앙관에 따른 종교 운동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논평한 바 있다. 박 교수는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식민 상황을 종교이자,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만열 교수 또한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또 다른 원인으로 '경천애인' 사상을 꼽았다. 이 교수는 손 목사가 조선 민족의 근본정신을 경천애인으로 보고 국혼 회복을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손 목사에게 신사참배란 '민족의 근본정신'을 말살하고, '우상 국가'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해석했다.
무교회주의 사상에서 원동력을 찾는 주장도 있었다. 심포지엄 발제자로 나선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손양원 목사가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공부했다는 검찰 조서 기록 일부를 공개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와 노회를 거슬러, 십계명 1조, 2조(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를 철저하게 따른 손 교수의 성서제일주의 태도를 무교회주의의 영향이라고 봤다.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 '이념의 희생자'인가 '순교자'인가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 형제는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 때, 좌익 학생들로부터 총에 맞아 순천 경찰서 뒷마당에서 사망했다. 그때 나이가 손동인 씨는 23세, 손동신 씨는 18세였다.
▲ 손양원목사기념관에서 팔복공원을 끼고 돌아 들어가면, '삼부자의 묘'가 나온다. 손양원 목사와 아내 정양순 씨, 두 아들인 손동인, 손동신 씨가 묻혀 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안용준 씨가 지은 <사랑의 원자탄>(도서출판 성광문화사)에서 손동인·손동신 형제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너희도 그러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우리 동족끼리 상쟁하지 말자, 참다운 예수 정신으로 살아야 우리 민족이 복을 받는다." 전도를 하다가 총을 맞고 숨졌다. (<사랑의 원자탄> 167쪽)
여수 애양원교회 교인들이 세운 손동인·손동신 형제의 묘비에도 그들이 스데반처럼 전도를 하다 순교했다고 기술돼 있다.
두 형제의 죽음은 현재까지 한국 교계나 교인들 사이에서는 순교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논란거리다.
이만열 교수는 앞으로의 한국교회 과제를 이야기하면서, 한국교회가 순교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순교를 제대로 평가하기보다, '순교자 만들기'로 치닫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심스럽게 "당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 이곳(여수)에서도 심했다면 두 형제가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과는 전혀 무관했는가가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이 같은 주장에 오해가 없기를 바랐다. "한국 개신교의 순교 문제가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이자, 여순사건 권위자로 알려진 김득중 교수는 <여순사건 56주년 추모 여순사건 공동 수업 자료집>에서 손동인·손동신 사망 사건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한 바 있다.
"두 형제가 죽임을 당했던 이유는 이들이 단지 종교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손동인이 재학했던 순천사범학교에서는 모스크바 삼상 교류안을 둘러싸고 찬·반탁 논쟁이 심했는데, 두 형제는 우익의 반탁운동에 몸담고 있었다. 또 그들은 이철승이 대표로 있는 전국학생총연맹(학련)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두 형제는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강한 반공주의 의식을 가진 우익 청년단원들이었다. 이들이 순천 지역의 학련 학생들, 대동청년단원들과 함께 봉기군에 맞서 싸우자, 봉기 세력은 그들을 체포한 다음 총살해 버렸다. 동인·동신 형제의 죽음은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좌우익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게 되면서, 두 형제의 죽음에서 정치적 의미는 탈색되는 한편 기독교적 '순교'로 채색되었다."(<여순사건 56주년 추모 여순사건 공동 수업 자료집> 35쪽)
심포지엄에 참석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김동엽 총회장) 여수노회(최석곤 노회장) 소속 정병진 목사(솔샘교회) 역시 손동인·손동신 두 형제를 이념의 희생자인지, 순교자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또 두 형제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안재선 씨에 관한 진실 여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안 씨가 좌익계 학생으로 두 형제를 총살한 현장에 있었지만, 직접 총을 쏴 죽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전했다. 여순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기 전, 유일한 살 길이 죄를 인정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손동인·손동신 두 형제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념의 희생자로 볼 것인지, 순교자로 볼 것인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두 형제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당한 역사적 조명 없이 일부 교단의 '순교자 만들기'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장 분위기였다.
▲ 손동인, 손동신 씨의 비석 뒷면이다. 당시 애양원교회 교인들이 이 비석을 세우면서 두 형제의 죽음을 스데반의 순교와 같았다고 기술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순교로 볼 것인지 이념 싸움의 희생으로 볼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심포지엄이 마무리될 무렵,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의 순교자 기념사업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가 순교자를 특정 교단의 전유물로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모 교단이 주기철·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을 교단의 순교자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분들은 장로교가 분열되기 전에 순교하셨다"면서, "모 교단, 모 노회가 순교자들을 소유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만열 교수는 1950년 발간된 <사랑의 원자탄>를 넘어서는 손양원 목사에 대한 역사 기록물이 없다며 후학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손 목사의 편지·설교·일기·역사 자료 등을 모아 전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또 손 목사를 한 교단의 순교자가 아닌 '한국교회의 순교자'로 세우자고 말했다.
▲ 심포지엄이 끝날 무렵, 이만열 교수가 참석자들의 질문지를 읽고 답을 해 주었다. 이 교수는 질문지를 한참 보더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이 교수는 지금의 한국교회가 '순교자 만들기'에 급급하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손양원 목사를 특정 교단의 순교자가 아닌, 한국교회의 순교자로 위상을 높이자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산돌손양원목사와 순교' 학술 심포지엄을 참가한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여수 지역 목회자, 방주교회 청년 및 중고등부 학생들의 모습이다. 이날 행사에는 8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지만, 긴 강의와 딱딱한 내용 때문인지 끝날 무렵에는 4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심포지엄이 끝날 무렵의 청중석. 이날 심포지엄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자 온 사람들에게는 낯선 시간이었다. 결국, 3시간이 지나서는 40여 명만 남았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씨티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를 기리는 학술 심포지엄이 있다고 하니, 이웃 교회인 방주교회 청년들과 중고등부 학생 20여 명이 참석했다. 여수에서는 어린 학생부터 나이 드신 할머니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손양원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수 시민들은 손 목사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심포지엄을 찾은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손양원 목사가 누군지 꼭 알려 주고 싶어 같이 왔다고 했다. 또 서울에서 유명한 교수가 와서 강의한다고 해 교육에 도움이 될까 왔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