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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100년전에 미국인들이 한국에 눈물과 피로 뿌린 복음의 씨앗...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참빛7 2011. 3. 26. 02:32

 

[스크랩] 100년전에 미국인들이 한국에 눈물과 피로 뿌린 복음의 씨앗...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H. B.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

 W. 헤론(John W. Heron) 
-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광혜원원장, 고종임금 시의(侍醫). 한국체류 5 33세 별세 
-
묘비문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제임스 홀, 로제타 홀부부, 셔우드홀
-
제임스 홀 : 평양개척 의료선교사. 광성학교 설립.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
로제타 홀 : 평양 기홀병원설립. 맹인 점자교육 창시자
-
셔우드 홀 :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 펼침

마펫선교사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한국에 기꺼이 왔고, 다시 명령하매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

W.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1874-1903)
-
한달간의 선교준비기간중 천연두로 생명을 잃음
-
묘비문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K.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
-1
년동안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교사로 재직함. 급성맹장염으로 죽음.
-
묘비문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
캔드릭의 유언 :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 20,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J.A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1897-1956)
-
한국 전쟁에서 고난을 극복한 A.k.젠센.
-
묘비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J.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1853-1920)
-
감리회 첫 여선교사 배화(培花)의 초석 캠벨
-'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D. A. 
벙커(Bunker, Dalziel A)
-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
묘비문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사무엘 F. 무어(1860~1906) 
-
양반과 천민 신분 제도를 철폐하며, 한국서민을 사랑하여 백정선교에 헌신
-'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출처 

 한국선교역사: 한국기독교역사 (초기 한국선교사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죠수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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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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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성장한 이유가 증조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너무 자주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오만하고 주제넘습니까. 하나님이 한국에서 일하셨고 주님은 나의 증조부모가 그 사역의 일부가 되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국에 왔던 외국 선교사들을 신화화 하는 것은 말씀의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호러스 언더우드의 4대 손녀인 엘리자베스 언더우드(49·사진) 미국 이스턴켄터키대(사회학) 교수가 초기 선교사 개인에 대한 지나친 부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직언했다. 

이 말은 최근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의 질적 개선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반면,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기념비 세우기’에는 힘을 쓰는 상황에서 나온 뼈아픈 충고다. 더욱이 발언 당사자가 한국교회 역사에 획을 그었던 선교사의 직계손이란 점에서 반향은 크다. 

언더우드 교수는 23일 서울 광장동 장로회신학대(총장 장영일)에서 열린 에든버러세계선교사대회 100주년 기념 ‘2010 한국대회’ 주제 강연에서 증조모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에게서 얻은 교훈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증조모는 자신이 다른 기독교인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왔다. 그러나 고향에서와 같이 자신이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특히 천국엔 백인들만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들이 한국인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백인들의 천국’ 환상은 깨졌다. 

언더우드 교수는 “증조모 릴리어스의 연약함과 19세기 문화가 내포한 죄악을 담은 릴리어스의 고백을 읽으며 선조의 실패와 죄에 대해 깨달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바라볼 대상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했다.

한국인들이 가졌던 신앙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의 특징을 보며 감탄했는데 미국 기독교와는 달리 실천에 강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새벽기도와 산(山)기도를 비롯해 개인전도, 재정적 지원, 십일조 형태의 ‘날 연보’, 성경 공부 열심 등에서 미국인보다 뛰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같은 감탄은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신앙을 배우는 계기도 됐다. 그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국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느꼈다”며 “상당수 선교사들이 한국인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북부의 경이적 현상에서 나타나듯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응답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언더우드 교수는 릴리어스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가족 안에 전해 내려오는 ‘복음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릴리어스는 1886년 한국에 도착해 한국의 왕비를 돌보던 의사였다. 몇 년 후 자신보다 8세 연하인 호러스 언더우드와 결혼했다. 얼마 후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해 온 나라를 휩쓸었는데 릴리어스는 서울의 진흙탕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그녀 마음은 슬픔과 절망으로 찢어졌다.

특히 그녀가 돌봤던 한 거지가 품 안에서 죽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릴리어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죽은 거지의 머리를 안고 울면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한 사람이 외국 여자가 진흙탕 길에서 부랑자를 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 

알고 보니 외국 여자는 해외에서 온 새로운 종교의 선생과 결혼을 했고, 왕비의 주치의였다. 높은 직함 때문에 충격을 입은 그는 감동해 즉시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였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행주로 많은 술집과 성매매 업소가 있는 거친 마을이었다. 이 회심자는 성경도 찬송가도 없이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열정을 가지고 홀로 성령의 능력으로 마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기적은 거기서 일어났다. 복음으로 굴복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빼앗은 가축을 돌려주었고 거래할 때 속이는 것을 그만두었고 심지어 납치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며 용서를 구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언더우드에게 전해져 그가 행주에 가서야 이 같은 기적이 아내가 보여준 긍휼과 사랑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언더우드가(家)는 4대째 행주에서 성장하는 교회와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한 여인의 울음 때문에 그 교회는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있다. 릴리어스는 자신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진정한 복음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엘리자베스 언더우드 교수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79년 도미했다. 그랜드밸리주립대를 거쳐 일리노이즈대(M.A.,Ph.D.)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선교사 정체성과 동일시: 한국의 북미 선교사들’ 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세기 전환기의 한국 선교사 과제’, ‘도전 받는 선교사의 정체성’ 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언더우드 교수는 3세 원득한(Richard Fredrik Underwood)씨의 딸로, 원씨는 지난 2004년 양화진에 묻힌 원일한 박사의 넷째 동생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http://cafe.daum.net/khc23467

 

출처 : 예수님이 주인된 교회를 꿈꾸며
글쓴이 : 조슈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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