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모든 금씨(金氏=김씨)는 김일제로 부터 시작한다.
1. 투후 금(김)일제의 본명과 투후의 위치.
지구 상 모든 김(금)씨(金氏: 신라~고려때 까지 "금씨"라 불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후 풍수지리나 음양오행을 국가 정치에 많이 이용했다. 한양천도나 이씨 왕가의 무덤을 선택 하는일 등.. 그중에 하나가 이씨의 왕가가 영원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오행설(화,수,목,금,토)에 따라 나무 목변이 들어가는 이씨(李氏)는 쇠금자(金字)가 들어가는 성씨(性氏)를 두려워 했다. 당시에는 '김씨'라고 읽지 않았고 '금씨'라고 읽었다.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했으나 당시 '성(性)'을 가진자들 중에 전국에 '금씨'가 가장 많이 호적부에 올라있어 1,000년 넘게 사용한 성씨를 다른 성으로 이성(移性)하면 반발이 심할까봐 '금씨'의 발음을 '금'에서 '김'으로 부르기 했다. 그래서 "금씨"가 "김씨"로 바뀐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금씨"라고 함. 그들 발음으로는 "진"이라고 함.)의 조상은 투후(秺侯- 현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에 투후성을 금성-金城이라고 한다. 그럼 신라위 국도인 경주의 궁성은 그렇다 금성(金城)이다. 우연에 일치인가? )는 금(김)일제(金日磾)로 부터 시작 된다.
*. "쇠 금자가 김으로 읽혀진 이유".. 내용을 더 자세히 보시려면..->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657
표시 한곳이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이다.
산동성 하택시(파란색) 성무현(빨간색)
김일제는 한나라 무제(漢 武帝)로 부터 김씨(金氏 - '금'이라 하여야 하지만, '김'으로 표기 하겠음. ) 성(姓)을 하사(下賜) 받기 전(前)에 그의 성씨(姓氏)는 연제씨(攣鞮氏: 한서(漢書) 흉노전에 흉노의 (제)왕을 선우(單于 = 왕)라 불렀고, 선우 좌우를 보필하는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다.
좌현왕은 지금의 중국 감숙성 무위시(武威市) 지역을 다스렸고, 우현왕은 감숙성 주천시(酒泉市) 지역을 다스렸다. 그 중 김일제의 아버지인 흉노의 좌현왕이었다.)였다.
**. 성(姓)은 모계의 출생지이고, 씨(氏)는 부계의 출생지를 나타낸다. 우리는 지금 성씨(姓氏)를 묻고 답할 때 부계족만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경주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 안동 권씨 등등 그럼 이력서의 성명(姓名)을 적을때는 원칙적으로는 어머니의 성씨(姓氏)을 적고 본인의 이름을 적는 것이 맞다.
성(姓)은 계집여(女)와 "나을생(生)..어디에서 나다(낳다), ..에서 자라다는 뜻 생(生)이 합친 글자"이다.즉, 여자가 태어난 곳이 바로 "성(姓)" 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호적(戶籍: 부계쪽)에 올라간 것을 자신의 성명(姓名)이라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사용한다. 그럼 성명(姓名)이 아니고 씨명(氏名)이라는게 정답인 것이다. **
즉, 김일제(金日磾)의 오리지널 성씨(姓氏)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연제"라는 성(攣鞮姓)이고, 아버지는 "선우"라는 씨(單于氏: 흉노부족의 우두머리를 '선우'라고 칭하였다.)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씨성을 따라 부르면 선우옹숙이 되겠고, 어머니 성씨를 따르면 연제옹숙이 되는 것이다.
그럼 한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투후(秺侯)란 어떤 의미인가? 투후(秺侯)의 뜻은 투(秺)지역의 봉토(封土)를 받고 다스리는 후작(侯爵: 작위(爵位) 서열 5개 등급 중 2번째)이라는 의미이다.
투(秺)는 현재 "중국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일대이다. 김일제는 한무제 때에 이곳 지역을 봉토(奉土)를 받아 이 일대를 관장하는 '제후(諸侯)'였다는 것이다.
<< *. 작위(爵位): 봉건시대 때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던 명예를 상징하는 칭호이다. 공의 경중(輕重)을 가려 작위(爵位) 대상자에게 작훈(爵勳)을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순으로 5 등급 한다.
여기서 작(爵)이란 철로 만든 제사 때 사용하든 술잔을 이야기 한다. 작훈(爵勳)은 주(周)나라 봉건시대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고대로 가면 갈수록 농업 활동은 어느 왕조든지 백성을 위해서라도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였다. 먹고 사는게 안정적 밑바탕이 깔려야만 다른 정책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든가, 가을 추수를 해서 제일 처음으로 하는게 바로 제단(祭壇)을 세워 사직신(社稷神: 社-토양신, 稷-오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거나, 큰일을 도모할 때 단(壇)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희생물(흰소나, 흰말, 흰양,
흰염소 등등)의 선지(피)를 철기로 만든 잔에 받아 제사를 지낸다. 집안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도 자기 순번이 있는 것 처럼,
국가적 행사일 때는 더 했을 것이다.
여러종류의 작(爵)
제일 처음으로는 왕(王)이 제주(祭主)가 되어 먼저 신(神)들에게 예(禮)를 고하고, 그 다음에는 작훈(爵勳: 공이 있는 사람) 순서대로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 순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후로는 제후들이 천자 앞에 모였을 때 술잔을 돌리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칭이 생겼고, 사작(賜爵)의 습관에서 작위(爵位)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봉건제는 작(爵)과 녹(祿) 두 종류의 계급을 골격으로 삼고 있었다.
작(爵): 각지방의 자치적 소국가(小國家)의 군주(君主)들 사이의 위계(位階)였다.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의 등급은 천자와의 관계가 친소(親疎: 가깝고 먼 정도), 봉토(封土: 하사 받은 땅)의 크기, 백성(百性)들의 수가 많고 적음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녹(祿): 한편 천자에게 작위와 봉토를 받은 각국의 군주(君主)는 자기 영내(領內)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친척이나 유능한 신하 발탁 및 조(유)력자들을 "경(卿)·대부(大夫)·사(士)" 등을 등급을 주어 관료진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일한 대가로 자신의 봉토와 백성을 일부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혹은 곡물을 급료로서 지급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녹(祿)이다.
즉, 제후의 위(位)는 작(爵)이고, 경경(卿)·대부(大夫)·사(士)의 위(位)는 녹(祿)이다.>>
이제 다시 김일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는 전한(前漢)때 흉노(匈奴) 사람으로 이름은 "옹숙(翁叔)"이다.
즉,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가 한(漢)나라 7대 황제 무제(武帝: 유철)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 받기 전에 이름은 "연제옹숙(攣鞮翁叔)"이었다. '선우(單于)'는 흉노의 왕을 부르는 고유명사이기도하다. 즉, "폐하(제왕), 전하(왕)" 라고부르는 것 처럼 그들은 그들의 제왕을 '선우(單于)'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2. 김일제가 살든 땅 '휴도(休屠)'는 중국 감숙성 무위시(中國 甘肅省 武威市)였다.
중국 감숙성 무위시(中國 甘肅省 武威市)에서는 역대 무위시에서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어떤 사람이 있는지 그들을 소개하는 <武威歷史人物:무위역대인물>이란 책을 판매를 한다.
하서4군: 1. 무위시, 2.장예시, 3.주천시, 4,돈황시
<무위역대인물>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이다. 그는 신라 30대 문무왕 비문(碑文)에서 그리고 그의 동생(김인문)의 비(碑)와 김해 김씨 시조 수로왕 왕릉 비문(碑文)에도 나온다. 자신들의 조상(祖上)은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라고..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을 인용한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숙성 무위시 광장에 있는 투후 김일제의 상과 마답비연의 천마상
"옹숙(翁叔 = 일제)이 살았든 현 중국의 감숙성 무위시(中國 甘肅省 武威市)는 한(漢)나라 때에는 흉노(匈奴)제국의 땅이 이었으며, 당시 무위시(武威市)의 지명은 휴도(休屠)였다. "옹숙(翁叔=일제)의 아버지는 이 휴도(休屠) 일대를 지배한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었다.
당시 고대 중국의 북방민족과 중국 현지인들과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전쟁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3.북방민족<견융(犬戎),귀방(鬼方), 험윤(獫狁), 흉노(匈奴)> VS 중원(주나라~한나라)의 전쟁.
1) 중원의 마지막 보루.. 만리장성
중국 북쪽의 유목제국인 흉노(匈奴: 그 이전에 서융, 귀방, 혐윤 등)는 조그만한 부족(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통일 진(秦)나라, 한(漢)나라도 어찌 할수 없었다. 얼마나 그들이 두려웠으면 진시황제 이전 춘추시대 때 부터 약간씩 성을 축조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부터 본격적으로 북쪽으로 땅을 조금이라도 가진 나라는 여지없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즉,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는 진시황 이전 부터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게된다. 왜? 그들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춘추시대 부터 명나라 때까지, 축중 년도만 약1,800년, 희생자는 약 100만명, 여기에 들어간 물자와 인원을 지금에 화폐로 환산 한다는 게 불가능 하다. 당시 중국 본토민들이 북방유목민족을 얼마나 무서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만리장성이 답을 말해준다. 지금은 아예 고구려의 국조인 해추모(주몽)이 처음 세운 도성이였든 곳 졸본성(卒本城: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의 오녀산성까지 장성을 축조하여 고구려도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2). 견융 VS 주나라의 전쟁
주(周)나라는 약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나라의 처음 국도(國都)는 호경(鎬京: 현재 서안 서쪽인근)이었다. 기원전 771년, 12대 왕인 유왕(幽王 ) 때 북방민족인 견융(犬戎: 옛날 중국 산시성에 살던 부족)의 침입으로 살해당하고, 낙양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300년의 호경시대를 서주시대(西周時代), 천도 후 500년의 낙양시대를 동주시대(東周時代)라 하고, 동주시대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한다.
국도(國都)를 천도한 후 주나라는 제후국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은 떨어져 명목상에 왕(천자)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고, 제후국 중 힘(국력) 있는 제후국 중 하나의 나라가 주나라 대신 각국에 군주들을 모아 회합을 하였고, 중원에 여러 제후국을 이끌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전까지 5명의 제후가 패자국이 되었다. 이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였다.
★.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0981398
★ 견융의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1
3). 흉노 VS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전쟁..
“만일 흉노가 침입하거든 빨리 진영으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지킬 것이며, 적을 잡으려고 달려 나가는 자는 참형斬刑으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한 지 두어 해가 되자 조나라의 병사들은 한 사람도 살상을 당하지 않았지만은 흉노들은 모두들 조나라 수비군이 겁쟁이라고 놀렸다. 그뿐 아니라 조나라의 병사들도 '이목'이 겁쟁이라고 불만을 터뜨려 조왕이 그 소식을 듣고 이목을 불러 나무라기까지 하였으나 이목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조왕은 마침내 다른 장수를 보내어 이목이 인솔하고 있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흉노를 막도록 하였다.
이렇게 교체된 장수는 한 해 동안에 여러 번 출전하여 싸워 보았으나 번번이 전쟁에 실패하고, 많은 병사를 잃었을 뿐 아니라 변경의 백성들이 농사나 가축을 편안히 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조왕은 다시 이목을 불러 복직시키려고 하였다. 이목은 병이 났다는 핑계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나오지 않았다. 왕이 강제로 나가도록 하려고 하자 이목이 이렇게 말하였다.
“꼭 신을 그 자리에 쓰려고 하시면 전과 같이 하도록 맡겨두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왕의 허락을 얻은 이목은 다시 국경 지방에 나아가 전과 같이 적군과 상대를 하지 않고 날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상품만 주니 병사들이 모두들 꼭 한번 나가 싸워보았으면 한다고 하였다.
이목은 그동안 준비한 전차(戰車) 1,300승(乘)과 말 3천 필 그리고 백금(百金)의 상을 받은 병사 5만 인과 활 쏘는 사람 10만 인을 확보한 뒤에 들판 가득히 내보내어 가축을 방목하게 되니 소수의 흉노들이 공격해 와서 여러 마리의 가축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사실을 안 흉노의 왕 선우(單于)는 많은 수의 흉노부족을 이끌고 가축들을 노략질하러 들어왔다. 그때 이목은 훈련된 병사들을 풀어 흉노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여 흉노부족 10여 만 명을 죽였다.
당시 흉노부족이었던 의첨남(衣詹襤) ․ 동호(東胡) ․ 임호(林胡) 등이 그 뒤 10여 년 동안 조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기원전 244년이었다.
하투(河套: 현 내몽골자치주에 오르도스(Ordos = 어얼둬쓰시)시)
** 동호(오환)부족과 월지부족..
* 동호(오환)족
오환족은 선비족과 함께 동호족(東胡族)으로 이들을 몽골족으로 여겨왔다. 선비부족은 동호(東胡)족의 북쪽 일파이며, 동호족의 남쪽 일파는 우환부족이다.
동호부족과 그 주변
큰 의미로 다우얼족과 몽골족을 말한다. 이들은 유목과 수렵생활을 기반으로 살았다. ‘동호’의 어원이 ‘퉁구스’라는 설이 있으며, 선비족 및 거란족이 동호의 후예이다. 흉노부족의 동쪽에 살고 있던 모든 이민족을 총괄해서 부른 이름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서라벌에 오기 전까지 서라벌 지금 경상도와 강원도를 잇는 동해안 루트가 신라의 원뿌리(박씨를 비롯한 서라벌의 6촌장들)는 동호족(東胡族)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문자는 없었다.
동호(중국어 간체 : 东胡, 정체 : 东胡, 병음 : DōngHú (웨)Tunghu)는 춘추 시대부터 내몽골의 동부지역에 거주했던 흉노부족의 일파이다. '동호'란 이름을 옛날에는 '도하(屠何)' '토방(土方)' '도하(徒何)'라고도 하였다. 역사서에서는 항상 '호(胡)'와 '맥(貉)'을 함께 칭하였다.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 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
한나라 때는 한무제가 설치한 요동의 한사군은 또다른 중국의 위협인 동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동호족과 사이가 나쁜 흉노족등을 후방에 배치시킨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 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투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다.
*월지국(대월지국)..그리고 쿠샨제국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는 고대 중앙 아시아의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 1세기 경, 북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과 그 국가를 이른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월지국의 역사도(귀상제국 = 쿠샨제국)
월지는 원래 중국의 감숙 성의 서부 지역에 거주(타림분지 인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흉노의 모돈 선우(묵특선우) 시기에 서방으로 쫓겨 가고 명칭을 대월지로 변경한다. 이후 박트리아(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귀상국(貴霜國:쿠샨제국: 귀상국을 영어로 표현한게 쿠샨이다.)을 건설한다.
귀상국(貴霜國) : 쿠샨제국
5). 흉노 VS 한나라
한(漢)나라의 건국주인 유방(劉邦)과 흉노와의 전쟁 일화는 유명하다.
한나라 고조(유방)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제국과 전쟁을 벌리지만, 현재 산시성 대동시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에서 전투에서 40만 흉노기마군에게 포위를 당해, 전쟁은 한나라군의 대패로 끝나고 한고조 유방은 백등산에 꼼짝 없이 7일째 포위된 상태에서 흉노와 굴욕적인 몆가지 협상을 한다.(백등산전투- 白登山戰鬪)
매년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시집 보낸다는 것, 관시(關市-한나라~흉노의 국경지역에 여는 시장)를 흉노와 한나라 국경에 열고, 형제의 예로써 서로를 대한다는 것이다.
백등산(白登山)의위치
4. 북방 대제국 흉노
흉노는 당시 많은 기마족을 아우르는 제국(帝國)이었다. 위대한 흉노제국(匈奴帝國)을 다스리는 제왕(帝王)을 선우(單于:높고, 크다는 뜻)라고 하였다.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의 약칭인데, '탱리(撑犁)'는 하늘, '고도(孤塗)'는 아들, '선우(單于)'는 대군장의 뜻이다.
흉노제국(匈奴帝國) 내에서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休屠王)의 위상(位相)은 어느 정도일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흉노제국은 제왕 선우(單于) 아래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혼야왕(渾耶王)·휴도왕(休屠王) 등 24王將(왕장)이 있었다. 이들은 선우의 가문인 연재씨(攣鞮氏) 중에서 보임되었다.
24왕장(王將)은 흉노의 좌․우익 영토에 각각 분지(分地)라고 일컫는 봉건적 군영유목구(軍管遊牧區)를 장악하고, 1만 기 내외의 병(兵)을 지휘하여, 모두 만기(萬騎)라고 하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24왕장(王將) 밑에는 제각기 천장(千長)· 백장(百長)·십방(什長) 등 단위(單位)부대 대장(隊長)이 있고, 기타의 장관(將官)·官屬(관속)도 배치되어 있다.
좌익의 12왕장(王將)은 그들의 군영목유구(軍管遊牧區)를 선우 직할지의 동방에 두고 있다. 즉, 상곡군(上谷郡:지금의 하북성 회래현-河北省 懷來縣) 동쪽의 몽골고원으로부터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에 걸친 영토를 분점(分占)했다.
또 우익의 12왕장(王將)은 선우직할지의 서방, 즉 상도(上郡:섬서성 수덕현-綏德縣)북방의 몽골고원으로부터 동투르키스탄 동부에 이르는 영토를 관할했다.
이들 왕장들은 선우의 근친자(近親者)로서 봉건제후와 비슷한 존재이지만, 그 공죄(功罪) 및 선우 교체에 따라 자주 전임되었다. 또 새 선우는 자신의 자제(子弟)들을 중요 지역 왕장에 배치하기 때문에 전대(前代) 선우의 자제(子弟)로서 왕장에 보임되었던 자(者)일지라도 직임(職任)영지를 그대로 보유한다든지, 혹은 자신의 자손(子孫)에게 상속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흉노의 왕장은 각각 선우에 직속(直屬)한 군구(軍區)사령관을 겸한 총독과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선우 직할지, 즉 중앙에는 골도후(骨都侯)란 대신(大臣)이 있다. 좌우(左·右) 골도후에는 선우의 인족(姻族)인 이성(異姓) 씨족의 장(長)이 보임된다. 그 직무는 선우를 보좌해서 행정을 담당한다. 그들의 임무는 재판·감찰·경찰·외교 등이며, 선우 계승문제에도 관여했다.
골도후는 선우에 직속하는 비서장관이었다. 그의 중요한 임무는 흉노 좌우(左·右)익지(翼地)에 배치된 여러 왕장의 동정을 선우를 위해 감찰하는 것이고, 그 충성심이 의심될 때 선우는 골도후를 파견하여 그 왕장의 부대를 감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중직(重職)에 선우의 인족(姻族)인 이성(異姓)의 씨족장을 임명하고, 병권(兵權)을 가진 지방의 왕장(王將)에는 오로지 선우의 근친(近親)인 연제씨(攣鞮氏)만을 배치했다. 따라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의 성(姓)도 선우와 같은 연제씨(攣鞮氏)였다.
흉노제국에는 혼야왕(渾耶王: 현재 중국 주천시(酒泉市))·휴도왕(休屠王: 무위시)·稽且王(계차왕)·丁零王(정령왕)·烏桓王(오환왕)·호게왕(呼揭王) 등이 있는데, 그들은 동성(同名)의 부족 내지 종족이 연제씨(攣鞮氏)에 의해 정복된다든지, 혹은 흉노에 귀부(歸附)한다든지 했던 집단의 수장(首長)이다. 예컨대 휴도왕, 혼야왕은 흉노족인 휴도(休屠)·혼야(渾耶) 땅에 부족에 파견된 수장이고, 오환왕, 정령왕은 각각 비(非)흉노족인 오환족·정령족에 파견된 수장이다. 왕(王)으로서의 칭호 및 권능은 물론 선우에 의해 부여되었다.
이와 같은 모돈 선우 이후 흉노국가의 통치체제는 기마민족 제족(諸族)의 씨족적 내지는 종족적 사회구조, 생산관계 등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 채 선우를 정점(頂点)으로 하는 지배관계로 조직된 것이다.
흉노제국의 경제는 다음과 같다. 그 민족적 생산양식은 물론 유목이지만, 실제로는 약탈·납공(納貢)·징세(徵稅)·교역(交易)에 의한 수익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 많고 적음이 국가의 존립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흉노는 매년 한(漢)나라에 침입하여 마음껏 약탈하고, 또 한(漢)과의 화평 조건으로 다량의 비단· 곡물 등을 받아냈다. 또한 관시(關市)라고 하는 흉노·한(漢)의 교역시장을 통해 중국산 물자를 입수하고, 오환·선비·정령 등 복속 종족으로부터 모피 등을 징세하고, 東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로부터 노예·모직물·말·낙타 등을 징발했다.
흉노는 이처럼 수탈한 인축(人畜)과 물자를 여러 곳에 전매(轉賣)함으로써 더욱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흉노의 경제사정은 그 국가 자체의 통제력 및 군사력과 표리의 관계에 있었다. 흉노국가가 번성한 시기에는 그 수익이 막대했지만, 세력이 실추하면 제로(0)의 상태로까지 감소 흉노 국가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흉노의 전성시대는 모돈선우(冒頓單于)와 노상선우(老上單于)의 양대(兩代)였다. 두 선우의 황금시대에는 한(漢)나라를 압박하여 국위를 내외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이후에는 차츰 양국 간의 형세가 역전되어 갔다.
5. 한무제의 흉노정벌과 "연제옹숙(김일제)"과의 만남.
장건의 서역원정로(훗날 비단길의 원조)
한무제가 즉위 후 부국강병을 몇해 동안 가져와 드디어 곽거병에게 흉노정벌의 출병을 명하였다. 장군 위청과 곽거병은 흉노정벌을 위해 6차에 걸친 원정을 감행했다.
BC 121년 곽거병은 1차 정벌원정은 흉노의 절란왕(折蘭王)·노후왕(盧侯王)을 죽이고, 혼야왕의 아들을 사로잡고, 그때 적의 수급과 포로가 8,100명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의 3차 정벌원정 때는 혼야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서(河西)로 진출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패전에 흉노의 이치사(伊雉斜)선우가 격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이들 두 왕은 문책이 두려웠다. 이에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한나라에 투항(항복)하자고 제의를 하였으나 휴도왕은 그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했다. 혼야왕은 휴도왕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다.
혼야왕은 한무제에게 항복을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흉노 내부의 사정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한무제는 곽거병에게 군을 이끌고 가서 혼야왕을 맞으러 갈 것을 명했다.
곽거병이 황하를 건너 혼야왕의 부대에 접근하자 그를 따르는 부장의 다수가 동요하여 도망칠 낌새를 보였다. 이에 곽거병은 혼야왕의 진영에 급히 달려가 혼야왕이 진심으로 항복을 하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혼야왕의 부장들과 일부 장군과 군인들은 이에 반발을 하여 진영에서 도망하려고 하자 곽거병의 군대는 도망치는 흉노병 8000여 명을 참살했다, 이때 항복한 흉노는 수만 명에 달했는데, 공식적으로는 10만 명이라고 칭했다.
장안에 도착한 흉노 일행에게 무제는 거액의 은상을 내리고, 혼야왕에 대해선 1만호의 영지를 주고 누음후(漊陰侯)로 봉했다. 그의 부장 4명도 각각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휴도와 혼야 땅에는 무위(武威)와 주천(酒泉) 2군을 설치하였는데, 무위는 뒤에 장액(張掖)으로, 주천은 돈황(敦煌)으로 쪼개어, 이른바 '하서 4군'이 되었으며, 서역과의 교통로가 되었다.
이때 살해당한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는 모친 알씨(閼氏), 동생 륜(胤)과 함께 곽거병의 한나라에 포로가 되었다. 한나라 장안에 끌려온 일제 일제는 양마노(養馬奴:양과 말을 키우는 곳)로서 황문(黃門)에 배치되었다.
시간에 지나 그러던 어느 날, 한무제는 연회를 베풀고, 궁정(宮庭)에서 사육하는 말들을 사열했다. 일제 등 수십 인이 제각기 자신이 사육한 말을 끌고 전각(殿閣) 아래로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궁녀(宮女)들을 흘끔흘끔 훔쳐보았지만, 일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이때 일제(日磾)의 키는 8척(尺)2寸(촌)(한대-漢代의 1尺은 22.3cm이므로 183cm이다.)이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품체를 한무제는 일제가 키운 말을 보며 흡족했다. 일제의 인품과 재능을 간파한 무제는 즉각 그를 마감(馬監)으로 발탁했다.
6. 천마(天馬 = 한혈마)와 한무제 그리고 김일제
BC 139년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무제의 명으로 서역으로 파견되었다가 흉노에 포로로 잡혀 탈출한 장건(張騫: 실크로드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의 보고에 의해, 대완국(大婉國: 페르가나)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한혈마-汗血馬: 하루에 천리(약 400km)를 달린다고 전해지는 한나라 시대 서역 대완국에서 산출되던 명마의 한 종류이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말」이라는 의미로 「한혈마」라고 불린다. 이 천리마는 한혈보마, 대완마 등으로 불렸고, 이 말을 처음 본 한무제는 천마(天馬)라고 불렀다.
한혈마에 대한 <사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에는 하늘에 닿는 높은 산이 있어 그 위에 천마가 내려와 노니는데, 이를 잡을 수가 없어 산 아래 오색 암말을 방목, 암내를 피우면 이 천마가 내려와 교배를 하여 낳는데 이것이 한혈마(汗血馬)요, 천마자(天馬子)라고도 부른다 했다. 한혈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아랍말의 일종으로 앞발의 무릎 피부에 모세혈관이 드러나 얼핏 보기에 피가 스며나오는 것 같아 피땀이 흐른다고 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최상급의 한혈마는 한나라 사절의 눈에 들키지 않게끔 이사성(貳師城: 대완국의 도읍지로 알려진 페르가나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에 숨겨 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정보가 한무제의 귀에 들어가자 당장에 황금으로 등신대의 금마를 만들어 대완에 보내어 이사성(貳師城)의 한혈마 보내줄 것을 청했다.
대완국의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자존심을 상한 한나라 사절은 그 금마(金馬)를 망치로 두드려 깨버리고 돌아왔다. 보다 더 성낸 것은 무제였다. 이광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완국 정벌을 시켰으나 실패하고 만다.
한나라의 천적인 흉노와 싸우는데 가장 약점이 말(馬)인데, 따라서 한혈마에 대한 유혹은 한무제로 하여금 2차 대완 원정군을 발진케 했다. 병력 6만명에 말 3만필의 대원정이었다. 그 전쟁에 살아 돌아온 병력은 겨우 1만명에 불과했으나, 이사성(貳師城)에 쳐들어가 한혈마 순종을 탈환해 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한무제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한혈마를 보며 감탄하여 「서극천마(西極天馬)의 노래」를 만들게 하였고, 「천마」라고 한혈마를 칭찬하였다. (감숙성 무위시의 뇌조묘 뇌대한묘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말의 동상·「마답비연(馬踏飛燕: 날으는 제비를 딛고 말이 달린다.) 이 말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무위시(武威市)의 뇌조묘(雷祖廟) 뇌대한묘(雷台漢墓)에서 발견된 마답비연(馬踏飛燕)을
뇌조묘(雷祖廟) 입구 광장에 동상으로 만들었다.
3세기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포의 죽음으로 관우의 애마가 되는 명마 적토마도 이 한혈마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한혈마를 얻기 위해 나선 길이 바로 실크로드에 원조 길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교역은 실크(비단 등)가 주(主) 겠지만, 처음에 그길은 분명 마로(馬路: Horse Road)이고 Horse War(말로 인한 전쟁)이었다.
7. 일제가 자란 땅 휴도
일제가 자란 휴도땅, 특히 기련산(祁连山)은 유목을 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한무제는 대완국을 침략하여 얻은 한혈마를 휴도(무위)와 장안(현 서안)에서 각각 키우게 하였다. 장안 궁에서 일제는 말들을 잘 살피는 일을 맡았다. 한혈마를 비롯 여타 말들을 잘 키운 일제는 마왕신(馬王神)이라고 물렸다
기련산(祁连山)과 하서4군..
이후 일제는 시중(侍中), 부마도위(駙馬都尉: 임금의 사위를 駙馬(부마) 혹은 駙馬都尉(부마도위)라고 한다. 이 부마도위란 이름은 漢武帝(한무제) 때 처음 생긴 벼슬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말을 관리하는 업무였다.)로 진급하였고 ,한무제는 匈奴(흉노)의 김일제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빠르게 승진시켰다.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일정한 정원(정해진 공직)이 없이 천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이 벼슬을 주곤 했었다. 그것이 魏晉(위진) 이후로 公主(공주)의 남편 되는 사람에 한해서 이 벼슬을 주게 됨으로써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駙馬 (부마)는 원래 천자가 타는 副車(부거)에 딸린 말로 그것을 맡은 벼슬이 부마도위다. 부마도위의 계급과 봉록은 比 二千石(비 이천석)으로 대신과 같은 급이었다.>
일제는 겸손·근신(勤愼:힘써 삼감)하여 무제의 신임을 받아 무제가 순시할 때마다 황제의 마차에 배승(陪乘)했고, 궁(宮)으로 돌아오면 황제를 좌우에서 시위(侍衛)했다. 이에 황제는 그에게 수천 금이 하사되었다. 이에 많은 귀척(貴戚)들이 그를 질시하여,“폐하는 오랑캐의 자식 하나를 어찌 이다지도 중용하십니까!”라고 말했지만, 무제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일제를 더욱 아꼈다.
일제의 모친(알씨)은 자식 교육에 열심이어서 무제는 이를 미덕(美德)으로 보고 자주 상찬(賞讚)했다. 그의 모친이 죽자 무제는 감천궁(甘泉宮)에 그녀의 화공에게 화상(畵像)을 그려 걸어두게 하고‘휴도왕 알씨(閼氏)’라고 제(題)했다. 일제는 매일 모친의 화상(畵像)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절했다.
8. 망라하의 한무제 암살 사건과 김일제의 발고와 금씨(金氏)씨 성을 하사(下賜) 받음.
시중복야(侍中僕射: 내조-內朝의 부재상급 고관)인 망라하(莽何羅)가 한무제를 살해하려는 모반을 하려고 했다. 한 날 무제가 임광궁(林光宮)에 행차했을 때 일제도 수행했다. 이때 일제는 몸이 아파 행궁(行宮) 위사실(衛士室)에 누워 있었다.
망라하(莽何羅) 삼형제는 이날을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그날 밤에 거병(擧兵)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무제가 아직 침상에서 잠자고 있을 때 망하라는 무제의 거처에 잠입했다. 마침 변소에 있던 일제는 품 속에 칼을 품고 침입하는 망하라를 발견했다. 급히 달려가 망하라를 덮친 후 “망하라가 모반을 했다!”라고 크게 외쳤다. 깊은 잠을 들은 한무제는 일제의 큰소리에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고, 좌우의 시위들이 빠르게 황제를 모시고 망하라와 그 일당을 제압·포박했다. 이에 일제는 더욱 더 황제에 신임을 얻었다.
일제는 망하라(莽何羅) 등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고, 금(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금(金) 즉, 황금(黃金)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주(天主: 하늘의 신)에 제사 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여 성을 금(金)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김(=금)일제(金日磾)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금(=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9. 김일제의 가계와 한무제의 죽음
김일제에게는 세명에 아들이 있었다. 세명의 아들(큰아들 아름은 불명, 김상, 김건)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성장하여, 공주를 유혹하였다고 하였다.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순하다고 생각하여 그 자식(큰 아들로 추정)을 죽이고, 한무제에게 충성심을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한무제는 상심하였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을 더욱 믿게되었다.
일제는 30여년간 궁(宮)에서 재직했다. 그에게도 궁녀(宮女)가 하사되었지만, 그는 그녀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무제가 중병에 걸린 후 요절한 곽거병의 동생 곽광(霍光)에게 어린 후계 황제의 후견역(後見役)을 부여하려 했지만, 곽광은“신(臣)은 일제보다 못합니다”라고 양보했다. 이에 일제는 “본래 외국인인 제가 그런 고위직을 맡는다면 흉노가 한조(漢朝)를 가볍게 볼 것입니다”라고 또한 사양했다.
한무제는 BC 87년 장안 서쪽 80km에 있는 오작궁(五柞宮)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71세, 재위기간 54년이었다.
한무제의 능
한무제의 능, 곽거병, 김일제의 묘
곽거병, 김일제의 묘
10. 한무제(漢武帝)의 가계..
무제(武帝)는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 유계(景帝 劉啓)와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 사이의 첫째 아들(전체로는 10 번째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황위에 올라 54년간 황제 재위하여, 중국 역사상 청(靑)나라 강희제(康熙帝 61년), 건륭제(乾隆帝; 61년)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한 황제이다.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아버지인 공후 왕중(共侯 王仲)은 장아(藏兒)란 여인과 결혼한 후,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 자매를 낳고 사망하였다. 왕씨(王氏) 어머니 장아(藏兒)는 왕씨(王氏)를 금왕손(金王孫)이란 자와 결혼시키고, 전씨(田氏)와 재혼하였다. 이 때는 아직 유교가 발달하지 못하여 여자의 재혼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다.
왕씨(王氏)와 금왕손(金王孫)이 딸을 낳고 오붓하게 잘 살고 있는 어느 날, 한 도사가 나타나 왕씨(王氏)의 관상을 보고, 장아(藏兒)에게 큰 딸 왕씨(王氏)는 후에 귀하게 될 몸이니 이혼시키라고 하였다. 장아(藏兒)는 고민하다가 사위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사위가 동의하지 않자, 강제로 딸을 데려와서 궁으로 보냈고, 왕씨(王氏)는 황태자(皇太子)의 시녀가 되었다.
왕씨(王氏)는 얼마 후 황태자의 후궁이 되었고 아들 철(徹)을 낳았다. 이 황태자가 바로 경제(景帝)이고, 철(徹)은 그의 열 번째 아들이다. 경제(景帝)의 첫째 아들 영(榮)은 왕씨(王氏)보다 상위 후궁인 율희(栗姬)가 낳았는데, 그녀는 자존심이 세고 질투심이 많은 여인으로 첫째 아들을 보았고, 황후는 아이를 못 낳고 있으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한편, 경제(景帝) 주위에 또 다른 권력 지향적인 여인이 한 명 있었으니, 그 여자 바로 친누나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이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많은 여인을 경제의 후궁으로 보내어 경제(景帝)의 환심을 샀고, 자연 후궁 율희(栗姬)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별로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 상황에서 율희(栗姬)의 큰 아들 영(榮)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가 율희(栗姬)에게 자신의 딸 아교(阿嬌)과 황태자와 혼인을 제안한다. 율희(栗姬)는 황태자의 어머니요, 이미 차기 황후(皇后)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단판에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의 제안을 거절해 버린다.
이 소문을 들은 왕씨(王氏)가 자존심 상한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아들 철(徹)과 아교(阿嬌)의 혼인을 제안을 하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왕씨(王氏)의 아들 철(徹)이 열 번째 황자이니 황제 순위가 너무 뒤라 왕씨(王氏)의 제안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회에서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열살 남짓한 철(徹)에게 장난 삼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이쁜 궁녀들을 하나 하나 가르키며, 아내로 삼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철(徹)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마지막으로 궁녀 사이에 있던 자기 딸 진아교(陳阿嬌)를 가르켰다.
철(徹)은 바로 “호! 약득아교작부 당작금옥저지야!(好. 若得阿嬌作婦, 當作金屋貯之也.; 아교를 신부로 얻어면 당장 금으로 만든 집에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아이의 총기 있는 한마디에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며, 경제(景帝)를 찾아가 이들의 혼인을 윤허를 받았다. 여기서 금옥장교(金玉藏嬌; 미인을 훌륭한 집에 감춰둔다.)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철(徹)과 아교(阿嬌)는 얼마 후 부부가 되었다. 철(徹)을 사위로 맞이한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율희(栗姬)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경제(景帝)와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에게 은밀하고도 계획적으로 율희(栗姬)와 황태자 영(榮)을 모함하고, 철(徹)이 영특함을 칭찬을 하고 다니니 경제(景帝)도 점차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경제(景帝)가 병져 눕게 되었을 때 율희(栗姬)에게 자신이 죽으면 다른 아이들도 황태자 못지 않게 돌 봐 줄 수 있냐고 넌지시 율희(栗姬)의 마음을 떠 보았다.
하지만, 돌아 오는 답이 자신과 무슨 상관 없다는 답변에 실망한 경제(景帝)는 병이 낳자 영(榮)을 황태자에서 폐하고, 철(徹)을 황태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아교(阿嬌)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본래 경제(景帝)의 황후인 박씨(薄氏)는 아기가 없다는 이유로 폐위를 시켰고, 자연 황태자의 모친인 왕씨(王氏)가 효경황후(孝景皇后)가 되었다.
열 번째 아들인 철(徹)이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씨(王氏)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가 연합한 권력 암투 결과인 것이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율희(栗姬)는 절망에 빠져 곧 죽는다.
마침내 경제(景帝)가 죽고, 15살의 황태자 철(徹)은 무제(武帝)에, 그리고, 아교(阿嬌)는 진황후(陳皇后)가 되었다.
15세 황제의 장모이자 고모인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의 위세는 하늘 높은 지 모르고 올랐다. 하지만, 고종사춘지간이자 부부지간인 무제(武帝)와 아교(阿嬌) 사이에는 6년이 넘도록 아이가 안 생기니, 무제(武帝)의 사랑도 점차 식어 가게 되었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 던가? 진황후(陳皇后)도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못지 않은 위인인지라, 여자 문제를 비롯하여 사사건건 밤낮으로 달달 볶으니 무제(武帝)가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일등 공신인 장모이자 고모를 봐서 참는다.
무제(武帝)에게는 평양공주(平陽公主)라는 친누나가 있었다. 어느 날, 무제(武帝)는 평양공주(平陽公主)가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그중 노래부르던 평양공주의 몸종 위씨(衛氏)에게 호감을 느낀다.
몸이 달은 무제(武帝)는 기회를 엿보다 어느날 그 몸종 위씨(衛氏)에게 황은(皇恩?)을 베푼다. 이를 눈치 챈 평양공주는 몸종 위씨(衛氏)을 무제(武帝)에게 딸려 보냈다. 그 여인이 바로 위자부(衛子夫)이고, 무제의 두번째 황후이다.
궁중에 새 사람이 들어오니 진황후(陳皇后)가 바빠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무제의 사랑은 멀어져만 갔고, 진황후(陳皇后)는 고민 끝에 당시 최고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황금 100 근을 주며 글을 부탁하였다. 사마상여는 장문부(長門賦)라는 글로 진황후(陳皇后)에게 받쳤다. 무제(武帝)가 이 글을 읽고 감탄하여 진황후(陳皇后)와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장문부(長門賦)
獨坐思千里 : 홀로 앉아 있으니 잡념은 끝없이 이어지고,
春庭曉景長 : 봄날 뜰의 새벽 햇살은 길기만 하다네..
鶯喧翡翠幕 : 꾀꼬리는 지저귀고 물총새는 장막을 치는데,
柳覆鬱金堂 : 버들은 우거지고 울금은 의젓하구나..
舞蝶縈愁緒 : 이리저리 나는 나비는 수심과 얽히고,
繁花對靚妝 : 활짝 핀 꽃은 단장한 얼굴과 마주한다..
深情托瑤瑟 : 깊은 정을 어여쁜 거문고에 맡겨 보지만,
絃斷不成章 : 줄을 끊고서도 다 이루지도 못하누나..
獨坐思千里 : 홀로 앉아 있으니 잡념은 끝없이 이어지고,
春庭曉景長 : 봄날 뜰의 새벽 햇살은 길기만 하다네..
鶯喧翡翠幕 : 꾀꼬리는 지저귀고 물총새는 장막을 치는데,
柳覆鬱金堂 : 버들은 우거지고 울금은 의젓하구나..
舞蝶縈愁緒 : 이리저리 나는 나비는 수심과 얽히고,
繁花對靚妝 : 활짝 핀 꽃은 단장한 얼굴과 마주한다..
深情托瑤瑟 : 깊은 정을 어여쁜 거문고에 맡겨 보지만,
絃斷不成章 : 줄을 끊고서도 다 이루지도 못하누나..
그러나, 이도 잠시. 진황후(陳皇后)에게는 결혼생활이 몇년이 흘렀지만 아이가 없는데, 위자부(衛子夫)가 궁에 오자마자 곧 임신하니, 진황후(陳皇后)는 궁에서 무당을 불러 무당굿 판을 벌렸고 위자부(衛子夫)와 배속에 원자씨(元子氏: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황제나 임금의 맏아들을 이르던 말)를 저주하는 일을 벌였다.
이일은 무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무제(武帝)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로 진황후(陳皇后)를 유폐하여 황후자리도 폐하였다. 그리고 무제는 무당을 불러 남을 해코지 하는 일을 금하게 하였고 이를 어길시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을 명하였다.
이것이 제1차 무고의 화(巫蠱之禍)이다. 얼마후 진왕후(陳皇后)는 미쳐 죽었다고 한다.
명문 귀족 들만 될 수 있던 황후 자리에 노비 출신의 위자부(衛子夫)가 무사황후(武思皇后)에 오른다.
무제(武帝)는 인재 등용에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는데, 부인도 그랬다. 위황후(衛皇后)는 장남 거(據)를 낳았고, 이어 양석(陽石)과 제읍(諸邑) 두 명의 공주를 낳았다.
위황후(衛皇后)의 오빠 위청(衛靑)도 군인이 되어 흉노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또한, 위청(衛靑)은 미망인이 된 평양공주(平陽公主)와 결혼하며 겹사돈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사황후(武思皇后)의 큰 언니 위군유(衛君儒)는 승상 공손오(公孫敖)와 결혼하였고, 또 작은 언니인 위소아(衛少兒)는 명문 곽씨(藿氏) 집안과 결혼하여 한나라 최고의 맹장 곽거병(藿去病)을 낳는다.
이로 인해 노비인 위(衛)씨는 한(漢)나라 최고의 가문이 된 것이다.
그 후 무제(武帝)는 굉(宏)을 낳은 왕부인(王夫人)..
단(旦)을 낳은 이희(李姬)..
그외 아이가 없는 윤부인(尹夫人), 형부인(邢夫人) 등이 있었다.
그는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 집에 가서 또 한눈에 뻑가는 미인을 보았다.
평양공주의 전속 악단 중 작곡가인 이연년(李蓮年)의 누이인 창기(娼妓) '이부인(李夫人)'이다.
그녀를 본 무제는 이부인(李夫人)에게 폭 빠졌고, 이부인과 무재 사이에 아들 창읍애왕 박(昌邑哀王 髆)을 낳았다.
무제는 악사(樂使)이던 그녀의 오빠 이연년(李蓮年)를 이광리(李廣利)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장군을 시켰다.
이는 무제의 최대 실책이고 이쯤해서 무제는 옛날의 무제가 아니었다. 이광리는 이부인을 믿고 온갖 위세를 다 부렸고, 전쟁에 나가서는 나가는 족족 대패하였다..
하지만, 무제(武帝)는 이부인의 체면을 보아 책임을 묻질 않고, 감싸기 만하였다. 그 중 한 예가 흉노와 전쟁에서 작전 실패로 대참패하고 돌아와, 흉노의 포로가 된 부관 '이릉(李陵)'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동양의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는 이의를 제기한 결과 '궁형(宮刑)'을 받고 남자로써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다. 그 후 그는 사관인 아버지로 부터 해온 중국 삼황오제 때 부터 지금 한무제에 걸쳐 역사의 기록을 편찬을 한다. 드디어 그의 대역작인 사기(史記)가 탄생된 것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 이부인(李夫人)은 천성적으로 몸이 좋지 않아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다. 그녀가 임종 할 때, 무제(武帝)가 찾아 갔으나 이부인(李夫人)은 화장 안한 민 낯을 보여 줄 수 없다고 하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끝내 무제(武帝)를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무제(武帝)는 화를 내고 돌아섰으나 그녀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부인(李夫人)인 효무황후(孝武皇后)과 한무제의 능
무제(武帝)와 이부인(李夫人 = 효무황후)과의 애뜻한 사랑으로 인해 무제(武帝)와 무사황후(武思皇后) 위자부(衛子夫)와 관계는 온전치 못하였다.
위태후의 형부인 공손오(公孫敖)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이 아버지와 이모의 권력을 믿고 못된 짓만 일삼고 다녔다. 급기야 군비 1,900만 냥을 횡령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장안 대도(大盜) 주안세(周安世)를 검거하여 무제(武帝)가 친히 국문을 하는데, 도적 주안세(周安世)는 양석공주(陽石公主)와 공손경성(公孫敬聲)이 불륜 관계라고 폭로하였다. 이게 사실로 알려지자 진노한 무제(武帝)는 이를 계기로 양석(陽石)과 제읍(諸邑) 두 명의 공주를 포함하여 황태후 위자부(衛子夫) 친정 집안은 졸지에 떼죽음이 되었다. 이로인해 황태자 거(據)의 보호막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이 때에 강충(江充)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황태자 거(據)의 스승이 황제의 사신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태자 거(據)는 사람을 시켜 강충에게 이를 무마하려했으나 강충은 이를 단번에 거철하고 무제(武帝)에게 고자질 하였다. 이미 판단력이 흐려진 무제(武帝)는 강충(江充)에게는 감찰을 잘했다고 상을 내리고는 황태자의 스승은 규정 위반의 벌로 코가 잘렸다.
이 일로 황태자 거(據)는 강충(江充)을 못마탕한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강충(江充)은 66세의 무제(武帝)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안위가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무제가 병이 들었다.
병의 원인이 무고(巫蠱; 무축(巫祝)의 주법(呪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라고 판단하고, 조사를 명하자, 강충(江充)은 무제(武帝)가 다니는 길과 침소 아래에 저주스러운 물건을 파묻고 이를 황태자의 소행으로 꾸미려 하던 것을 황태자가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강충(江充)을 죽여 버렸다.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무제(武帝)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이고 진압군을 보냈다. 끝내 황태자 거는 스스로 자결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사황후(武思皇后)도 폐위가 되어 궁에서 쫒겨났고 그녀 스스로 자결을 했다.
황태자 거(據)의 두 아들과 어린 손자들까지 죽이고, 젖먹이 증손자 하나만 살아 남는다. 그가 훗날 선제(宣帝)가 된다. 이것이 제2차 무고의 화(巫蠱之禍)이다.
이후, 이부인(李夫人)이 낳은 아들 창읍애왕 박(昌邑哀王 髆)이 태자가 되나, 얼마 후 박(髆) 마저 병으로 죽었다.
훗날 무제武帝)는 무고의 화(巫蠱禍)의 전모를 알게 되어 강충(江充) 일족을 죽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태자 유거가 죽은 곳에 궁궐을 새로 짖고 이름을 '사자궁(思子宮)'이라 하였다.
무제는 나이 이제 막 8세인 마지막 후궁인 "구익부인 조첩여(鉤翊夫人,趙捷予)"의 아들 불릉(弗陵)을 태자로 명하고, 그러고 나니 자신이 죽으면 증조할머니 여태후(呂太后)가 그랬던 것처럼, 구익부인(鉤翊夫人)도 어린 아들을 끼고, 정사에 간여할 것을 걱정되어 자진하도록 하였다.
부인, 자식, 손자까지 모두 죽이고, 71세 나이로 8세의 아들 하나 앉혀 놓고 임종하면서, 아들의 앞날이 걱정되어 곽거병(霍去病)의 이복동생인 곽광(霍光, ? ~ B.C. 68)과 흉노(匈奴) 태자 출신인 김일제(金日磾, B.C.134년~ B.C.86년)에게 어린 아들의 후사를 맡기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11. 무고(巫蠱)의 난(亂) 또는 유거(劉據)의 난(亂)
한무제에게는 장남인 태자 유거(太子 劉據,: 戾太子 劉據, BC 128년 - BC 91년))가 있었다. 한무제는 훗날 그를 눈물로 그리며 후회하며 "여태자(戾太子)"라 불렀다.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와 비슷함.)
태자 유거(劉據)는 아버지 한무제(7대)와 폐황후 "위자부"의 아들이며, "한 소제 휴불능(漢 昭帝: 8대: 劉弗陵)"의 이복형이고. "선제(宣帝: 10대 황제)"의 할아버지이다.
한무제(武帝) 때인 BC 91년에 아버지 황제가 장남인 황세자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무고(巫蠱)의 난(亂) 또는 유거(劉據)의 난(亂)이라 한다.
무제는 황태자로 책봉한 큰 아들 유거(劉據)가 별달리 무능한 바가 없는데도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이 앉고 살았다. 그리고 종종 신하들에게 그 불만을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漢)나라에서는 무고(巫蠱)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무고(巫蠱)란 "증오하는 사람의 나무 인형 등을 만들어 땅에 묻어놓고 저주하는 일종의 巫術(무술)"이다. 당시엔 미신에 불과한 무고(巫蠱)가 효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따라서 무고(巫蠱) 행위가 발각되면 가혹하게 처벌당했다. 예컨대 승상 공손오(公孫敖)는 부인이 저지른 무고 행위에 연좌되어 요참(腰斬: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당했다.
공손오(公孫敖)는 원래 유난히 소심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를 승상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엎드려 울면서 고사(苦辭)했다. 무제 즉위 이후 그때까지 승상작을 받은 자는 9명이였다. 그 중 4명이 갖가지 이유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무제는 울먹이는 공손오(公孫敖) 앞에다 승상의 인수(印綬)를 툭 던져놓고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공손오(公孫敖)는 무제의 부인인 위(衛)황후의 언니의 남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도 몰랐던 부인의 무고 행위 때문에 처형되어 승상 50%(10명 중 5명) 처형이란 기록을 채우게 되었다.
공손오(公孫敖)를 처형시킨 사건에서 무고의 효용성에 큰 힌트를 얻은 자가 혹리(酷吏)로 이름 높은 강충(江充)이었다. 강충(江充)은 원래 조왕(趙王)을 섬겼다. 그는 태자 유거(劉據)의 비행(非行)을 무제에게 고발하여 투옥시킨 인간이었다. 비행이란 황궁내 황제 만 다니는 황제 전용 도로를 태자 유거의 사자(使者)가 수레로 황제의 도로로 달린 일이 '강충(江充)'에게 적발되었다.
태자 유거는 강충( 江充)에게 사람을 넣어 이 사건을 눈감아 주도록 청탁했지만, 강충(江充)은 유거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걸 그대로 무제에게 보고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황태자 유거와 강충(江充)과의 사이는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이때 무제의 나이 66세이고, 황태자는 이미 38세의 장년이었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면 황태자가 즉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충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강충은 무고를 이용해 황태자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다. 무제가 황태자 유거의 유약함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황실 주변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충'은 오로지 고자질을 잘해 황제 측근이 된 자였다. 이 사실을 안 여태자가 강충에게 이 일을 눈감아 줄 것을 부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안그래도 탐탁치 않은 무제는 더욱 여태자를 밉게 보게된 것이다.
당시 무제의 나이가 66세로 노쇠해서 언제 여태자가 다음 황제 제위를 물려 받게 될른지 모르는 판에 태자의 눈밖에 나게 된 강충은 황제 선수를 쳐 태자를 잡을려고 단단히 벼러고 있었다.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자기는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하루는 무제가 낮잠을 자면서 이상한 꿈을 꾸게 돠었다. "수 천개의 나무 인형이 그를 공격"해 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인지 황제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강충은 "단하(檀何)"라는 흉노 출신의 무당을 매수하여 황제에게 “궁 안에 무고(巫蠱-주술 등으로 남을 저주하는 일)의 기운이 있으니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큰 환란이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무제가 이 문제를 강충에게 맡겨 처리토록 하자, 강충은 궁 여기 저기를 파 헤치며 들아다니다가 파는 곳마다 여러 궁에서 나무 인형이 나왔는데, 특히 태자궁(宮) 근처에서는 아버지 무제(武帝)를 저주하는 글을 적은 인형까지 마루 밑에 많이 묻혀 는 것이 나왔다. 강충 일당이 사전에 태자궁에 묻은 것들이었다.
이때 무제는 수도인 장안(長安: 현제 서안) 서북방 80km에 위치한 감천궁(甘泉宮: 산시성(山西省) 춘화현(淳化縣) 북서쪽의 80km 떨어진 감천산(甘泉山)에 있던 이궁(離宮)이다. 진나라 때에 만들어졌으며, 한(漢)의 무제(武帝)가 증축하였다.))에서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에 열중하고 있었다. 80km나 떨어진 곳에 있어 궁에 소식을 뒤 늦게 들었다.
황태자 유거는 강충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강충이 파 놓은 모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여겨 황제의 사자를 사칭하여, 강충을 유인해 낸 뒤에 그를 죽여버리고 무당 '단하(丹霞)'도 상림원의 숲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태자는 백관들에게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장락궁(長樂宮: 진(秦)나라의 흥락궁(興樂宮)을 고쳐서 쌓은 것으로, 그 안에 태후(太后)가 주거하였던 장신궁(長信宮)이 있다.)을 호위하는 북군을 풀어 수도를 접수하여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감북군사자호군(監北軍使者護軍) 임소경(任少卿-이름은 안(安))은 태자의 부절(符節)을 받기만 했을 뿐, 이내 태자의 명을 무시한 채 영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태자는 할 수 없이 시민들을 소집하여 5일 동안 승상의 군과 대치하면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감천궁에서 도를 닦든 무제는 급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 반란군 진압의 명을 내렸고, 이에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태자의 민병대는 곧 진압군에 진압되어 갔다. 진압군은 도망가는 태자의 민병대들을 추격하였고, 태자 유거는 호현(湖縣)의 천구리(泉鳩里)라는 곳에 가서 은신하고 있었으나, 수색으로 들통나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건이 난지 29일 만에 목을 매 38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하였다. 훗날 무제는 아들 유거의 잘못 된 죽음을 알고 슬퍼하며 태자가 죽은 곳에 아들을 그리는 사자궁(思子宮)을 지웠다. 그리고 그의 생모인 위(衛)황후도 태자 유거의 모반이 알려져 황후자리에서 폐위되었다가 유거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녀도 자결하였다.
유거의 아들 유진(劉進)도 역시 잡혀 죽었고, 포대기에 싸인 손자만 유순(劉詢)이 감옥의 여죄수의 젖을 먹으며 살아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뒤에 한나라 10대 황제(선제:宣帝)가 되었다.
이리하여 무고의 난은 수많은 사람들을 사상케 하고 막을 내리면서 진압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포상이 내려졌으며 태자의 일을 방조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형벌에 처해졌다.
임안(임소경)은 태자의 명을 거역했지만, 부절(符節)을 받는 등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요참을 당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무고의 난의 진상을 알았든 무제는 강충의 일가와 그에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그리고 무고의 난 이후 3년 뒤 BC 88년에는 무제의 장성한 아들인 '창읍애왕'이 죽었다.
12. 한무제의 선택..
무제는 두명의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지만, 다음 황위를 장성한 다른 아들 '연자왕 유단'과 '광릉여왕 유서'가 있음에도 구익부인 조씨(조첩여:趙婕妤 = 구익부인,첩여-> 후비(后妃)의 계급 중 하나이다. 사후에 효소태후로 추증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昭帝: 8대 황제)을 태자로 내정하였다.
한소제는 BC 86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한무제는 한고조(유방)의 부인인 여태후 일족들의 왕실내에 정치적 폐해를 잘알고 있었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았다. 이때가 BC 87년이다. 구익부인은 역모의 주모자라고 고변되었다. 역모의 억울함을 황제에게 이야기 하였지만, 한무제는 구익부인에게 역모를 씌운 자초지중을 설명하며, 사후 복권과 외척을 손 안될것을 확약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칼을 주며 자결을 명한다.
한무제의 신하들은 아들 유불릉(소제: 전한 8대)을 태자로 올리자 마자,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인 것에 혼란스러워 한 대신들은 그 이유를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신하 중 한명이 한무제에게 아들을 태자로 세우는데, 왜 그 모친을 죽이는지 물어봤보았다...
한무제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황제가 무능하거나 어린 황제가 원인이었다. 불릉의 어미는 젊고 힘이 넘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죽은 뒤 황제의 어미는 교만하고 자긍심이 커져 태후라는 이름으로 음란한 일을 마음대로 저지르니 누가 제어하겠는가? 아무도 제어할 수 없게된다. 너희는 고조(유방) 여태후의 독재와 일족의 폐해를 모르느냐?'며 신하들을 책망하였다.
한무제는 조첩여가 자결한 뒤에 복권시켜 주었다. 아들 소제가 황위에 오른 뒤에는 그녀는 태후로 추증되었다. 그녀는 아들인 소제의 시호를 따 효소태후(孝昭太后)로 불린다.
13. 한무제의 죽음과 김일제(金日磾) 에게 투후(秺侯) 하사(下賜)..
다음해인 BC 87년 한무제는 임종 전에 봉거도위(奉車都尉) 곽광(霍光)과 부마도위(駙馬都尉) 김일제(金日磾), 태업 상관걸(太僕 上官桀)에게 어린 소제를 보필하라고 유촉하고,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투경후(秺敬侯), 즉, 투후(秺侯)로 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제는 소제가 아직 연소하다며 작위를 사양했다. 소제 즉위 1년여 후에 일제가 중병에 걸렸다. 대장군 곽광은 소제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김일제를 후(侯)로 封(봉)하도록 건의했다. 일제는 병상에서 투후(秺侯 - 현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의 인수를 받았다.
14. 김일제(金日磾) 의 죽음
BC 86년, 일제는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茂陵(무릉:長安 서북부에 위치한 무제의 墓) 근방에 陪葬(배장)되었다.
일제 사후(死後) 투후(秺侯)에 임명하였으며, 그의 자손들이 그 관직을 7대 째 습직하였다.
15. 김일제의 가계도표.. 그리고 신라 금(김)씨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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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도왕 | ||||||||||||||||||||||||||||||||||||||||||||||||||||||
투경후 김일제 |
김윤 | ||||||||||||||||||||||||||||||||||||||||||||||||||||||
투절후(秺節侯) 김상 |
김건 | 성도경후(成都敬候) 김안상 | |||||||||||||||||||||||||||||||||||||||||||||||||||||
□ | 성도이후(成都夷候) 김상(金常) |
김창(金敞) | 김잠(金岑) | 김명(金明) | |||||||||||||||||||||||||||||||||||||||||||||||||||
투후 김당 |
김섭(金涉) | 김참(金參) | 김요(金饒) | 성도후(成都候) 김흠(金欽) |
김준(金遵) | ||||||||||||||||||||||||||||||||||||||||||||||||||
성도대후(成都戴候) 김탕(金湯) |
김융(金融) | ||||||||||||||||||||||||||||||||||||||||||||||||||||||
<김일제의 기계도>
김일제의 자손들은 때 왕망(王莽)의 외가(외사촌)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는데, 후한 광무제가 신나라 황제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중국 산동시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祠堂)인 투후사(秺侯祠)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일제의 자손들은 작은 벼슬을 습직하면서 살았다. 삼국지에도 김일제의 후손인 김선(金旋)과 김위(金褘)가 등장한다.>
투후 김일제는 신라 왕족인 김씨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현재 이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김알지)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그리고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에 오른쪽에서 4번째 줄에 "□태조한왕계천령지..(□太祖漢王啓千齡之..- 태조 (성)한왕께서 천년을 열었도다.."라고 되어 있다.
김인문(金仁文) 비문(碑文)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42대 왕인 흥덕왕의 비문에서도 "자기는 태조 한왕(太祖漢王)의 24대 손(孫)"이라는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碑文: 중국 서안 비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는 투후 김일제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7세기 후반 들어 형성된 신라 김씨의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의견이다.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통일 진나라 때 진시황은 흉노를 막기 위한 전국적인 공사를 시작하였다. 물런 춘추 중국시대 때 부터 북방에 있는 세나라(연-燕,조-趙,,진-秦)들이 쌓은 장성들을 계속 잇는 공사지만,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유방(劉邦: 한나라 고조) 만리장성 축조로 가기 전 탈영하여 세를 모아 진나라에 반란을 일러켰다. 이때 수많은 흉노인(포로와 일반인들이)과 진나라 사람들이 노역으로 부터 도망을 쳤다. 여러방면으로 도망(진나라의 영향력이 없는 곳) 친 곳 중에 하나가 한반도도 분명 포함이 되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의 경주 땅에 도달하여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선보이며 동화되었고, 그들 중 한분을 추대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그가 바로 박혁거세이고, 나라 이름은 신라(新羅-신라라는 이름은 22대 지증왕 때 부터 사용)였다.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과 삼국시대 나뉜다. 전한은 고조 유방에서 왕망(王莽)이 새운 신(新)나라 건국 때까지 이고, 신나라 멸망 후 광무제(光武帝) 등극과 조조의 위나라가 탄생하기 전까지가 후한 시대이다.
16. 왕망의 신나라와 김일제 후손들..
즉,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王莽: 新나라 - 중국 역사상 가장 단명 국가)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漢) 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김당(金當)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김당(金當)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세습)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AD 5년 어린 평제(平帝)를 독살(毒殺)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攝政)을 하다가 AD 8년에 한나라(전한-前漢)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워 황제에 올랐다.
왕망은 김일제 사망 이후 그의 후손들은 줄곧 한왕실에 중요 요직에 있어고, 왕망도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 이는 ‘한서 왕망전(漢書 王莽傳)’에 상세히 나와 있다. 왕망이 황제가 되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는 신나라에 완전 실세가 됐었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劉氏: 한나라 왕족들)들의 저항과 적미의 난(赤眉의 亂:
왕망을 도와 신나라에 건국에 이바지 했고, 신나라 권력 한가운데 있었든 김씨 일가들은 이제는 필사적으로 중국 땅을 탈출 해야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한반도 깊숙히 들어 왔다. 그들이 움직인 동선(動線)은 당시 가져간 화폐인 동전(오수전과 화천)이 그들이 머물렀든 곳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목포와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 무제때 발행 )과 화천(貨泉: 왕망 때 발행)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 다른 김씨(김일제의 동생 가문들)들이 가락(김해)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胤)이다. 윤(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胤)의 4대손이자 안상(安上)의 3대손 탕(湯) 역시 신나라의 멸망으로 한반도 김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金首露)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秺侯 日磾)의 5대 자손(子孫)이 신라 김씨계(新羅 金氏係)이고,
김일제(金日磾) 동생 윤(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駕洛金氏) 지금의 김해김씨계(金海金氏係)가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다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제의 손자 김당과 왕망이 반란을일으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다. 약 15년 치세 후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을 세우자, 김당(김일제 직계 손)과 김윤(김일제 동생 직계 손)의 후손들은 산동반도의 투국에서 배를 이용하여 강화를 거쳐 경주일대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이들은 당시 마한의 중앙 마한 목지국(월지국)의 배려로 경주로 옮겨 살게하였다. 당시 온조십제(백제의 전신)는 평안남도 덕천~영원일대 호수에 자리잡고 동북쪽 동예지역의, 낙랑말갈과 대치하다 말갈에 밀리자 황해도로 남하하고 있었을 시기였다.
경주로 들어온 김당의 후손들은 중앙마한의 배려로 중국 진(秦)나라의 망인(忘人)들과 그곳 원주민의 왕인 박혁거세, 석탈해의 후손 왕들의 배려로 사로국(신라의 전신)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훗날 김당의 후손은 세력이 키워 신국(新國: 신라의 의미는 개인적 생각으로는 선조 김당과 왕망이 대국에서 못 이룬 국가 신나라를 다시 만들어 만방에 알린다는 뜻이 더 강하다.)을 건국한다.
김륜의 후손들은 김당 후손의 허가를 받고, 경주에서 김해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게 된다. 나라명이 가락국(가야)다. 가락국의 왕 김수로는 김륜 가문의 후손이다.
17. 허황후의 내력
그리고 우리 익히 알고 있든 가락김씨(駕洛金氏)의 시조할머니 허왕후(수로왕의 부인)는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였다. 허왕후는 현재 중국 양자강 상류 사천성 안악현 (옛이름은 보주(普州)) 서운향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보주황후(普州皇后)라고 불려진다. 그녀(보주황후, 허황후)의 발자취를 밟아보면 다음과 같다.
히말라야와 갠지즈 강을 끼고 있는 인도 북부 평원에 아유타(Ayodhya)라는 곳에서 한무리의 아리안족들이 살고 있었다. 아유타 동남쪽에 가야(加耶)라는 소왕국이있었다. 그들은 갠지즈 강에서 물고기 잡이로 생계을 잇는 진짜 작은 왕국이었다. 가야의 여름은 장마로 인해 갠지스 강이 넘쳐 순식간에 바다를 이룬다. 이때 부터 11월~4월에는 비 한방울도 구경도 못하는 가뭄이 이어진다.
현재 인도 아유타(Ayodhya)지역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줄어 들고,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작은 웅덩이로 모여들게 된다. 이 웅덩이를 그들의 말로는 가라(加羅)라고 한다. "가라"는 항상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를 말한다. 어업을 생으로 삼는 가야인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았다. 그래서 가야인들은 쌍어문양(雙漁文樣:물고기 두마리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 ) 표시를 독특하게 사용하게 되었다.(가라국에 문양도 쌍어문양이다.)
또 그들은 가까운 남쪽에 6년 간 부처가 고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부드가야(Buddh Gaya)가 있어 오래전 부터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당시 인도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해 4개의 계급으로 이루워져 있고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준 가야왕실 사람들은 지금도 몇 천년째 이어져 오는 신분제도를 그 당시 타파하여 만민평등을 선언했다. 그러자 주위에 많은 왕국들이 이를 못 받당하게 생각하였다.
인도 아유다와 부드가야의 위치
특히 당시에 가장 강력한 아유타왕국에서 가야국을 응징하게 되어 많은 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국을 초토화 시켜다. 하지만 가야국 사람들과 아유타에서도 힌두교 보다는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야인들과 합세하여 미리 가야를 탈출하였다.
가야국왕을 중심으로 그들은 인도 북쪽 시키(Sikkim)을 통과하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고향 인도 땅을 벗어나 남만(南蠻) 땅을 거쳐 지금의 사천성 자양시 안악현 서운향(瑞雲鄕 = 보주)에 터를 잡았든 것이었다. 마치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 한 것과 같다. 인도 가야에서 중국 사천성 자양시까지 직선 거리만 2,000Km가 넘는다.
험준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2,000km 대장정이 펼쳐진 것이다. 몇년에 걸쳐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사천성 자양시 외딴 산골에 자리를 잡은 이들 인도 가야국 일행은 그곳 원주민들과도 원만히 지내며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허씨(許氏) 성을 가졌다. 허씨 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중국식 발음 "허"는 인도 브라만(사제)를 모시는 신전(神展: 초기 불교의 절)의 무인(巫人)들의 총칭(總徵)이었다. 그래서 가야국 사람들은 중국식으로 성을 허(許)로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허씨(許氏)로 불렸다.
아유타의 무력을 피해 가야의 사람들은 히말라야의 시킴 지역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간다.
인도 가야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현재 자양시 안악현 서운향으로 이주
(개인적으로 불교를 처음 중국 땅에 가져 온 사람들이 바로 인도 가야사람이다. 그 후 한나라가 말기와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와 위진 남북조를 거쳐 5호 16국 말기 북위 때 쯤에 불교를 중국 땅에서도 믿고 불경을 범어에서 한문으로 번역을 하고 부처의 말씀을 설파 한 것이다.)
마침 보주지방을 순찰하든 한나라의 중앙관리에게 천축국(인도) 사람들이 대거 이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그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이색적으로 생긴 인도의 여성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중앙에 보고를 하게 되었고, 그 여인을 장안성으로 데리고 입성을 하게 된다.
그때 선제 유순(宣帝 劉詢: 10대 황제)은 황위에 오르기 전에 그녀를 보고 결혼을 하였다. 선제는 즉위하면서 조강지처로 허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대신들은 선제가 즉위하는데 공이 컸던 곽광(霍光)의 딸 곽성군(霍成君)을 황후로 삼아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하지만 선제는 외척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의식해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조정에 아무런 외척이 없는 아름다운 인도의 아가씨인 허씨를 황후에 책립하였다.
그녀가 공애황후 허평군(恭哀皇后 許平君) 이다. 이에 곽성군의 모친 현아(顯兒)는 둘째 임신 중이던 허평군이 병이 걸린 틈을 타 여의(女醫) 순우연(淳于衍)을 매수해 허평군을 독살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후에 곽성군과 현아가 허씨의 소생인 원제를 죽이려고 계획한 일이 탄로나 현아는 처형되고 곽성군은 폐위된 후에 자결하였다. 허씨는 후에 공애황후(恭哀皇后)에 추존되었다.
그녀는 한나라의 황후(皇后:원제의 모후)가 된다. 일개 인도의 이민자 집단에서 한왕실(漢王室)에 고귀한 집단으로 직위가 상승하게 되었다.
<<원제와 후궁 왕소군 이야기: 한나라 고조(유방) 때 부터 이어져 오든 북방유목민족인 흉노 때문에 항상 골치꺼리였다.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가 한나라 왕실에 여자를 원했다. 이유는 자신의 알씨(閼氏: 황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고민 끝에 원제는 후궁인 왕소군(王昭君: 중국 4대 미녀 중 한명)을 호한야 선우에게 보냈다. 흉노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효원황후 왕정군(孝元皇后 王政君: 가야여인, 원제가 왕씨 성을 하사. 허씨에서 왕씨로)은 원제의 황후이자 한나라 12대 황제 성제(成帝: 9대 황제) 유오(劉鰲: BC 33 ~ BC7)의 모후이다. 원제가 죽고 성제가 즉위하자 그녀는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제수하고 성제의 버팀목이 되도록 하였다.
성제에게는 여러 자식들이 있었지만, 대개 요절하였거나, 당시 황후인 조비연(趙飛燕)과 후궁 조합덕(趙合德)에게 독살을 당하고, 성제도 갑자기 죽어 버려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태왕태후 왕정군과 왕망의 지지로 애제 유흔(哀帝 劉欣: 13대 황제)을 다음 황제 위에 오른다, 얼마 후 애제가 사망하고 평제(平帝 劉衎: 14대 황제, 당시 9살, 중국 전한(前漢)의 마지막 황제.)가 즉위한다. 황제의 장인이 바로 왕망(王莽)이였다.
BC 1년 애제(哀帝) 가 급사하고, 평제(平帝) 가 즉위하면서, 왕정군은 이 기회를 타서 태황태후(太王太后)의 지위를 이용하여, 죽은 애제(哀帝: 13대)의 외척 및 측근 세력을 배제하여,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임명하였고, 정치를 보좌를 명했다. 태황태후 왕정군에게 후원을 받으면서 조정의 권력 장악를 도모하게 된다. 왕망은 평제 5년에 자기 딸과 결혼을 시켜 황제의사위가 된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조카 왕망이 왕위 찬탈을 꿈구는 중에도 오히려 한나라 황실의 외척으로서 왕씨가 권력을 과하게 하지 않게 하였다. 왕망을 제후로 임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에도 그녀는 반대를 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AD 5년 그녀는 조카 왕망과 대립한 결과, 평제가 왕망에게 독살되어 유영(劉嬰)을 황제로 옹립한다. 왕망이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주공 단(周公旦)의 고사에 모방하여, 가황제(仮皇帝)를 자칭하자, 당시에 전국 옥새를 보관하고 있던 황태후 왕정군에게 전국옥새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요구했을 때, 왕정군은 격노하였고, 왕망의 사자인 왕순(王舜)을 잡고, 왕망에게 비난했다고 한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옥새를 왕순을 향해서 내던지고 쓰러져 울었다고 한다. 이 때 떨어진 옥새는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 한무제 이후 한(漢)나라 왕실에는 김씨계(金氏係)와 허씨계(許氏係) 왕씨계(王氏係) 세 집안이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許氏)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고, 김일제의 동생 윤(胤)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霍氏)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霍氏)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외사촌 지간이었든 김일제 후손들과 허왕옥의 후손들은 서로가 얽기고 설키어 신나라에 많은 권력을 잡았다. 이후 15년 뒤 농민 반란과 적미의 난, 광무제 유수(劉秀:光武帝)의 토벌로 신나라가 망하면서 왕망은 상인 두오(杜吳)에게 죽임을 당한다. 김일제 후손들과 허평군의 후손들은 그들의 직위와 재산은 모두 박탈 당하였다.
AD 45년 그리고 그들이 살려면 아무도 모르는 한나라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치는 것 밖에 없었다.
김씨 일가들은 산동성에서 배를 마련하여 발해만을 건너 한반도 서해(깅화도)를 따라 내려와 김해 땅에 한무리(김윤의 후손)가 정착을 하였고, 또 다른 부류(김당의 후손)는 현재 경주인 서라벌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들이 경주 김씨, 김해 씨의 한반도에서 시조가 되시는 분들이다.
허씨 일가들도 사천성 보주에서 양자강을 뱃길로 한나라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든 것이다. 일부는 보주 산속 깊숙한 곳으로 도망을 갔고, 또 일부는 중국 무창(武昌)에 자리를 잡았고, 또 일부는 바다를 건너 지금에 김해에 도착을 하게 된 것이다. 먼저 도착하여 뿌리는 내린 김윤의 후손에게 허씨 여인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이가 바로 우리가 부르는 김수로고 허왕옥인 것이다.
한무리가 서라벌에 도착을 하니 당시 나라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름도 없는 Mini 왕국 사로국에 도착을 하니 서라벌 육부족과 당시 왕을 돌려가며하는 박씨와 석씨계열 왕도 많이 당황하였을 것이다.
고서에도 분명 신라의 말은 고구려(부여족)나 백제(부여족)의 사람말과는 틀렸다고 한다. 하지만 사로국의 사람들과 한나라에서 도망쳐온 사람들과는 서로 말이 통했다. 그들도(흉노) 진나라의 도망쳐 온 이력들이 있는 사람라 한나라를 도망 쳐온 사람을 잘 이해해주었다. 사호국의 사람들은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였다.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때가 AD 23년으로 그 때는 서나벌(신라)의 2대 남해차차웅 20년이다. <삼국사기>는 “20년 가을 태백성(太白星)이 태미성(太微星)의 위치로 들어갔다. 21년 9월 왕이 죽으니 사능원에 장사지냈다.”로 기록하고 있어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인다.
AS 24년 등극한 “3대 유리이사금의 왕비는 갈문왕(왕의 동생 혹은 사돈) 일지의 딸이다. 혹은 왕비는 박(朴)씨로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왕비도 김씨로 보인다. 왜냐하면 5대 파사이사금의 왕비가 김씨로 갈문왕 허루(葛文王許婁)의 딸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김씨는 신라로 들어오자마자 갈문왕이 되고 왕비를 배출하는 등 신라에서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후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김알지가 태어나는 해가 4대 탈해이사금 9년(AD 65년)으로 이 때 서나벌이란 국호가 계림(鷄林)으로 바뀐다. 신라에서 김씨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때는 5대 파사이사금의 왕비와 6대 지마이사금의 왕비가 김씨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의 계통은 세한(성한왕: 김알지-->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미추이사금(13대 임금)으로 이어져 김알지 탄생 약 200년만인 AD 262년에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후 14/15/16대는 석씨(昔氏)가 왕을 하다가, 17대 내물이사금부터는 김씨(金氏)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전 세계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라. 후삼국 때 비록 고려에 나라 전체를 바쳤지만, 전쟁이 일어나 궁전이 불 타고 소실 된 기록들은 없는데, 그러면 1,000년의 신라 역사 기록물들은 온전히 남아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지금의 신라나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 기록이나, 일본의 기록, 그리고 고려 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나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와 당시 기록이 아닌 후세의 기록만을 의존한다.
김부식과 일연, 그들도 그 책들을 쓸 땐 특히 나라 건국에 대한 것은 더욱 더 그렇다. 분명 뭔가를 보고 참조 하였을 것인데, Fact(사실)는 없고 말도 안되는 Fake(허구)만 가득한 신화들이 적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사실을 부정하고, 허구를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해추모(고주몽), 박혁거세나 김알지, 김수로가 알에서 궤짝에서 태어낳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투후 김일제 이야기 2부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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