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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주의 구원론-야고보서의 구원론 난제해설

참빛7 2013. 8. 5. 00:50

성경주의 구원론-야고보서의 구원론 난제해설
 




지난 2천년 동안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을 영혼구원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오해했다. 이 때문에 변승우 목사와 같은 극단적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야고보서를 근거로 기세 좋게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 많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은혜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야고보서 때문에 큰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것은 유명하다.


권연경 교수는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신약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적 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고보서의 칭의론이 바울의 칭의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어느 누구라도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가 나를 바보라 부를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했다.'


루터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이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야고보서를 해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물론, 칼빈주의자들마저도 무리하게 야고보서를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다음은 그랜드종합주석의 무리한 야고보서 해석이다.

'야고보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설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다만 진실된 믿음에는 행함이 수반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 신자는 반드시 선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고, '선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가짜 신자라'는 견해다. 이런 오해 때문에 어떤 칼빈주의 신학자는 '한국교회 신자들 중에 천국에 갈 사람은 3%도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제자는 '한국교회 신자들은 1,000명중에 1명도 천국에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5장 1-5절은 이들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너 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 하는도다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1, 4-5)

필자의 저서 [성경주의 성령론]에서 밝힌 것처럼,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는 성령세례(성령침례)를 받은 진짜 신자다. 그런데도 그는 이방인들도 좀처럼 범하지 않는 간음죄를 지으며 살았다. 헬라어 원문은 그가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범죄행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처럼 진짜 신자도 육신이 연약해지면 지속적으로 불신자보다 악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도 바울은 '습관적, 혹은 지속적으로 악하게 사는 신자도 영혼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했다(고전 5:5). 따라서 '진짜 신자는 반드시 착하게 산다'는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이 야고보서에 대한 궁색한 해석밖에 내놓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알미니안주자들은 '야고보서는 행위구원을 가르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인 변승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나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쓴 일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힌 바가 있다. 왜냐하면 야고보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구원을 받는 진리를 가르치는 에베소서 2장 8-9절이나 요한복음 10장 28-29절, 히브리서 10장 14절 등의 말씀과 부딪치면 쩔쩔맬 수밖에 없다.


구원론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필자에게 가장 고민스러운 대목 역시 야고보서 2장과 빌립보서 2장 12절, 히브리서 6장 4-8절이었다. 이 구절들이 모두 행위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에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필자가 이 구절들을 놓고 계속 기도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야고보서 1장 25절이 생각나게 해 주셨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본문을 읽은 필자는 기쁨에 겨워 '할렐루야'를 외쳤다.

'할렐루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으로 얻어야할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라,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필자는 즉시 야고보서 2장과 빌립보서 2장 12절,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을 검토했다. 예상대로 모두 복이나 상 받는 것을 가르치는 본문이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첫 번째 증거는 야고보서 1장에 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에서 야고보서의 기록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야 고보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율법을 잘 지켜서) 복과 상을 받게 하려고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도들이 시험을 참고 율법을 지켜 생명의 면류관(상)을 받게 하고(약 1:12), 복을 받게 하려고(약 1:25)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야고보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야고보서 2장이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에 이어 야고보서 2장에서도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했다.

너 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8-12)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혹은 '율법을 지켜야 상(면류관)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약 2:14-26)'고 바꾸어 말했다. 복이나 상을 받는 것도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야고보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을 영혼구원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야고보서를 근거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 받는 것'을 뜻하는 두 번째 증거는 야고보서가 아브라함과 라합과 귀신을 예로 들어 구원을 설명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아브라함.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1, 24)

본 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내용은 창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창 22:1-17).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영혼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큰 복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본문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쳐서 큰 복을 받았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것을 근거로 '너희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거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라 '복을 받는 것'을 뜻함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최소한 창세기 15장의 사건 때, 영혼구원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 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6)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장차 번성한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이 별처럼 번성할 것을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함(영혼구원)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바울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는 진리를 증거할 때, 창세기 15장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1-3)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믿어 영혼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불러내셨을 것이다. 창세기 15장의 기록은 아브라함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사실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근거로 '신자도 아브라함처럼 선한 일을 해야 영혼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거나 '진짜 신자는 아브라함처럼 반드시 선하게 살아 영혼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2)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기생 라합.

야고보는 행함으로 큰 복을 받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기생 라합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을 받은 사실을 소개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

기 생 라합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이 일로 그녀는 자신의 목숨과 가족들의 목숨을 구원받았으며(수 2:1-24), 유다지파의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아 다윗 왕의 고조모가 되는 복까지 받았다(마 1:5). 이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어 영혼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히브리서 11장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어 복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여호수아서는 라합이 영혼구원을 받은 시점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이 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 영혼구원을 받았다. 이 때의 라합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다.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마 26:70-74), 그들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어(마 16:15-19)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었고(눅 10:20),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마 16:15-19). 라합 역시 똑같은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믿음을 근거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면 안 된다.


3) 행함으로 복이나 상을 받지 못하는 귀신들.

야고보는 '선하게 살아야만 복이나 상을 받을 수 있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귀신들이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사실도 소개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귀 신들도 하나님이 유일한 신(神)이신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귀신들은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혼구원을 받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은 본성이 악한 것은 물론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육체로 선하게 살아 복과 상을 받을 수도 없다. 하지만 신자들은 영이 거듭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영혼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로 선한 일을 해서 복과 상을 받을 수 있다.
야고보는 복과 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2-24)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다. 신자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을 때(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때), 비로소 믿음이 온전해 진다. 영혼구원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다. 신자가 선행을 힘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다(약 2:22-24, 대하 20:7, 사 41:8). 예수님은 영혼구원을 받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요 15:14). 이 때문에 많이 충성한 아브라함은 천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적게 충성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눅 16:23).


신자의 선행은 자신이 영혼구원을 받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복과 상을 받는데만 도움을 준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행위구원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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