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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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7 2013. 8. 5. 00:33

세계 교회사
I.2000년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며 21세기 교회를 전망한다.
2,000년 교회 역사를 1. 고대 기독교사(A.D. 100-600), 2. 중세 기독교사(A.D. 600-1500), 3. 16세기의 종교개혁, 4, 17세기의 정통주의 시대, 5. 18세기의 계몽주의,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 부흥 운동, 6,19세기 유럽의 세속화,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 복음주의 부흥 운동 및 선교, 7. 20세기의 정통주의 시대, 5, 18세기의 계몽주의,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 부흥 운동, 6, 19세기 유럽의 세속화,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 복음주의 부흥 운동 및 선교, 7, 20세기의 격동과 도전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응전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지난 2,000년 교회사를 돌이켜볼 때, 고대 기독교화를 둘로 더 나누어, “희랍 로마 세계의 기독교화”(100-310년)와 “로마 제국화의 기독교”(310-600)를 논하고, 16세기 종교개혁을 둘로 나누어 다룰 것이며, 20세 에큐메니칼 운동을 첨가하려고 한다. 우리는 각 시대의 교회사를 기술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정리하고, 끝으로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교회들은 예수님의 기도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코이노니아 안에서 연합을 이룩하고, 재창조의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이 땅 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실현하시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즉, 교회들은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봉사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1.고대 기독교(100-600)
사도행전은 12장까지 유대인들의 기독교화를, 13장부터 27장까지 안디옥을 비롯한 이방 선교를, 그리고 28장에서 바울의 로마 선교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A.D. 100-310년까지는 네로 황제, 트라얀 황제 및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복음”과 “기독교”는 소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희랍 로마 세계로 확장되었고,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A.D. 310-600년까지도 “복음”과 “기독교”는 널리 확장되었으니, 바야흐로 희랍 로마 세계의 경계를 넘어 지구화의 입구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A.D. 600년경이 되면, 대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적 영향권 하에 있게 된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린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교회들은 불연과 일치 추구의 역사를 보여준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 기도가 교회 분열의 역사를 내다보았고, 사도행전 6장은 헬라 문화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본토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헬라계로부터 섬기는 직분을 세웠으며, 사도행전 15장은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의 갈등을 “사도적공의회”을 열어 해결하였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고전 1장)과 에베소 교회의 분열을 크게 염려하면서 “복음”에 입각한 치유책을 제시하였다. “복음”과 “기독의 확장”은 이처럼 새로운 선교 현장에서 교회 분열을 경험하고, 동시에 교회 일치 추구를 요청한다
2. 중세 기독교(A.D.600-1500)
우리는 중세기를 A.D. 600-950년, A.D. 950-1350년 그리고 A.D. 1350-1500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은 어떠하였고, 교회 분열과 일치 추구는 어떠하였나? 600-950년 동안에는 좀 저조하였으나, 전(全) 중세기를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는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유럽의 문화를 개변시켰다. A.D. 1054년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을 경험하였으나, 대체로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정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가 중세의 동 · 서 유럽의 세계를 각각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통일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개신교파들의 등장 이전까지는 이처럼 양대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중세 기독교는 통일성 차원에서는 훌륭했으나, 다양성 차원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즉, 서방 교회는 성경과 전통 이외에 로마의 교황을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 하는 통일성을, 동방 교회는 성경 이외에 고대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 결정을 통일성의 원리로 삼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양대(兩大) 기독교는 중세말의 소종파들은 물론, 요한 후스와 위클리프 등 15세기의 종교 개혁자들과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자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양대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의 표준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 제2바티칸 공의회 및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이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복음”과 양대 가톨릭교회가 공유하고 있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로 표현된 사도적 신앙이야말로 오늘날 세계 교회가 인정하는 통일성의 원리이다.
3. 16세기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 했지, 결코 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를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 트렌트 공의회(1545-1563)를 기점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 역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다가 개혁 교회(The Teformed Church)를 형성케 되었고 ,이 개혁 교회가 스위스를 넘어서 프랑스, 화란, 독일, 영국(특히 스코틀랜드) 및 폰란드와 헝가리 등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체로 16세기 종교개혁은 잘못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였으니, 선교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 봉사 차원에서는 크게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다라서 16세기 종교개혁은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보다도 “복음의 재발견”(the rediscovery of the Gospel)과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에로 복귀하는 운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루터와 칼빈 등 개신교 개혁자들이 새로운 복음이해를 가지고 개신교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칼빈과 스위스 개혁 교회 자체내에서 교회 일치 운동이 있었으나,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 분열의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악명이 더 높다 하겠다.
4.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
18세기에는 한류와 난류가 흘렀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을 만무르이 척도로 하는 계몽주의(The Age of Reason)요, 다른 하나는 경건주의와 이에 따른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두 운동은 모두 17세기의 교파 절대주의 시대 혹은 신학적 명제들을 절대화하는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영국의 청교도의 영향, 화란 개혁 교회의 영향 및 독일 서북부의 개혁 교회의 영향 하에서 일어난 “경건주의”는 주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상실했던 ,독일의 영주국별 루터파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났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이후 이미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제국주의에 힘입어 중남미 등에 선교 활동을 크게 할 수 있었으나, 개신교는 프랑케의 선교 활동을 비로소 복음과 기독교를 확장하는 역사를 일구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경건주의에 크게 영향받은 영국의 웨슬레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죠나단 에드워즈는 영미계통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 부흥 운동의 여파로 개신교의 선교 활동이 놀랍게 확산되었다.
5. 19세기 기독교 역사
교회사가 라투렛은 프랑스 혁명 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1815년에 시작해서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 어간의 19세기야말로 서양제국주의 시대로서, 유럽인들이 지구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시대지만, 바로 이 99년 동안에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복음”과 “기독교”가 널리 확장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의 원동력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 이었으니, 19세기 미국의 제2차 대 각성 운동세기의 추진력 이였다. 19세기는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과 더불어, 역시 분열된 교파들을 치유하려는 움직임들을 보였다. 교파별 경쟁적 복음 선교로 특징 지워지는 19세기에도 불구하고, 이 19세기는 피 선교지의 현장에서 교파들의 사귐과 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주곡이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수많은 초교파 선교 단체들이 생겼고, 교파 내적 분열의 극복과 교파별 세계 기구들을 통한 일치 추구, 그리고 교파 대 교파의 일치와 협력이 시도되었다. 이와 더불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교회의 사회봉사가 활발해진다.
6.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18-19세기의 개신교 선교 역사가 없었으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는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지는 세계선교 대회 중, 제8차 세계선교 대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수령이다. 이대회가 폐막될 즈음 “신앙과 직제” 운동이 시작되었고, 세계 제1차 대전(1914)이 터질 즈음에 “삶과 봉사” 운동이 시발되었다. 결국 “신앙과 직제” 대표들과 “삶과 봉사” 대표들이 1938년 화란의 유트레히트에서 모여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r Churches=W.C.C.)를 형성하였으나, 세계 제2차 대전으로 1948년 암스텔담에서 제1차 W.C.C.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W.C.C.의 기구가 어떻게 변화하여도, 결국 이 세 흐름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결정한다. 이 세 운동은 신학과 직제에 있어서 교회가 연합하여 복음을 함께 선교하고 전도하며, 인류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는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성경구절로 말한다면, 요 17장 21절(“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은 교회 일치와 선교를 말씀하고 있고, 골로새서 1장 20절(“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은 “정의, 평화, 창조 세계의 보전”을 포함하는, 교회의 인류와 창조 세계를 향한 모든 책임을 말씀한다.
7.결론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의 역사인 동시에, 교회의 분열과 일치 추구의 역사이다. 기독교 2,00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당 땅까지 복음이 증거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성취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일치와 선교를 위한 기도(요 17:21)가 이루어지고 있고, “가루”가 “밀가루 서말”을 부풀리고 있는 역사(歷史)는 계속 진행될 것으로 믿어진다. 골로새서 1장 20절과 에베소서 1장 10절은 인류의 역사 과정과 자연 속에서 교회를 대행자(the Agent)로 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꼭 실현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II.로마 제구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장하고 확장되는 기독교(100-313)
1. 기독교의 확장
오순절 성령강림 이래로 복음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희랍 로마 세계로 확산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베드로의 복음 설교가 3천 명을 회심시킨 이래 사도들과 사도적 공동체의 복음 설교는 성령의 크신 역사 가운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복음화 하였다. 복음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행전은 세계 교회사의 제1장이다. 사도행전은 1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인들이 기독교회를, 13장부터 27장까지는 안디옥을 비롯한 이방 선교를, 그리고 28장은 바울의 로마 선교를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끝장인 제28장의 끝 두 절에서 구금상태에 있던 바울이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이방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어떻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A.D. 70년 경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팔레스타인 교회들의 영향력이 종식되어 가고, 기독교의 중심지가 안디옥, 로마, 에베소 등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을 뜻한다. 대체로 A.D. 70년까지는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원초적인 증언들이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사 도적 시대 혹은 계시(복음)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도적 전승은 교회의 초석으로서 교회의 사도성의 표준이요, 교회의 보편성의 근거이다. 신약성경을 이루고 있는 책들은 이 시기에 있었던 사도적 복음 전승에 기원한 것이다.

2. 신약성경 안에 있는 교회의 분열과 일치 추구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교회의 분열도 일어난다. 교회 분열의 조짐과 그 일치 추구는 신약성경에서부터 나타난다. 빌립보서 4장 2절에서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서는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고 했고, 요한 삼서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 도다”라고 했다. 이는 모두 교회 분열의 조짐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 분열의 예 중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유대교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의 분열 기능성을 눈앞에 보면서 에베소서 4장 2절부터 6절까지에서 교회가 일치를 이루기를 강력히 절규하였다.
3. 신약성경의 사도적 교회 안에 있었던 이단들
복음이 다양한 문화를 만나, 다양한 기독교를 만들어내지만, 모든 다양성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이단은 문화가 복음을 잘못 담아낼 때 탄생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시대가 끝나기 전에 이미 어두움의 그림자가 교회 위에 드러워졌다. 예컨대 요한 서신 저자는 성부 성자를 모두 부인하는 거짓 선생을 독자들에게 경계하고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거부하는 것을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라 하였다. 요한 이서는 이단을 교회로부터 내어 쫓으라고 경고한다(요이 9-11). 이처럼 이미 신약성경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교회의 분열을 야기시켰으니, 그것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복음 선포” 내용(Kerygma)을 고린도 교회의 이단(육체적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했다. (고전 15:12),(고전 15:1-8),(갈 1:6-8)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갈 1:11-12)이라고 하면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갈 4:4-5)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루터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 유명한 구원론(이신칭의)을 펼쳤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철학’, ‘사람의 유전’ 및 ‘초등학문’ (골 2:8)을 좇음으로써, 복음으로부터 빗나간 사람들을 향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라고 반론했고,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하여 사도적 전통을 변호하려 했다(딤전 1:7: 4:1-5: 6:3-10. 20-21). 당시 거짓 교사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여(딤전 1:4), 결혼을 금하고 금식을 장려하는(딤전 4:1)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헛된 말에 빠져(딤전 1:6), 자신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고(딤전 1:7), 양심을 거역하며(딤전 1:19,20),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았다(딤전 4:1).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등 믿음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났다(딤전 6:20).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 1:18-19)”고 경계한다. 요한일서 역시 이단의 도전에 대한 응답이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예수님의 동정녀를 통한 성육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있어서 그의 몸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요한일서는 이와 같은 초기 영지 주의적 이단 기독론에 대한 반론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니라.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2-23)”라고 반박하고 그리고 요한계시록 역시 영지주의 계통인 ‘니골라당’의 비윤리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4. 속사도 교부들
사도 시대를 뒤잇는 신학자들을 우리는 속사도 교부들 혹은 사도적 교부들이라 일컫는다. 교부(敎父 =Church Fathers)란 대체로 목사들로서 교회의 정신적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시기(100-310)의 교부들로서 소아시아의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파피아스, 로마의 클레멘트와 헤르마스 및 알렉산드리아(이집트 근처)의 바나바가 있다. 그런데 이 세 지역의 신학은 각각 나름대로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복음은 다양한 문화를 만나, 다양한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5. 복음의 변증
신약성경 시대를 지난 시기에 활동했던 변증가들은 속사도 교부들에 이어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이교도들의 기독교에 대한 저열한 뜬소문과 경멸적인 비판에 대응하여 속사도 교부들에 이어 역시 기독교 신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예컨대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친교를 근친상간으로 보았고,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는 축제로 보았다. 기독교인들은 매주 애찬(love feast)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 자매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았기 때문이요, 이 그리스도를 어린 아기로 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의 저열한 뜬소문에 대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변증한 203세기 변증신학자들은 아리스티데스, 순교자 져스틴, 타티안, 아데나고라스 등이며 터툴리안의 「변증」과 오리겐의 「켈서스 반론」은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보다 훨씬 발전한 변증신학이었다. 저스틴은 이교 세계와 복음이 어느 정도로 공통된 기반(common ground) 혹은 접촉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기독교인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터툴리안은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로써 성경과 희랍 철학 사이의 그 어떤 공통지바이나 접촉점도 인정하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복음과 기독교의 우월성을 제시함으로써 복음과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 유형으로 말하면, 터툴리안은 문화에 대립하는 복음을, 저스틴은 문화와 종합하는 복음을 제시했다면, 19세기의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을 문화 속에 용해시켰고, 16세기의 루터는 복음에 의해서 문화를 심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문화와 관계를 맺는 입장을 내세웠고, 칼빈은 복음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보하면서 문화를 개변시키는 복음을 역설하였다.
6. 이단들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
이단들은 대체로 기독교적 요소를 내포하면서 전혀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빗나간 가르침들을 가르쳤다. 이교 사상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교회의 교인이 될 경우, 이미 세례를 받았어도 교회에 들어오기 이전의 이교사상에 의하여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일어나는 바, 복음과 기독교의 왜곡이 바로 이단이다. 교회는 이단들의 전통에 대응하는 사도적 전승인 복음을 확고히 붙들었고 사도들의 뒤를 있는 감독들(목사들)의 권위를 확보하였으며, 신앙규범을 만들어야했고, 신약성경의 경전화 과정을 추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레네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및 오리겐과 같은 교부들의 신학 역시 이단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이단들은 이처럼 기독교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복음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지 아니하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약속과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명령을 따라 지리적으로 확장되었고,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에서 다양한 기독교와 신학을 만들어 냈다. 2.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교회의 분열과 일치 추구, 그리고 이단의 도전과 이에 대한 응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복음 전승의 형성, 신약성경의 경전화 과정, 신앙의 규범(regula fidei), 사도적 교회의 보편성 및 직제의 사도적 정통성이 이단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생겼다고 하는 것은 참 놀라운일이다. 4. 이 시기의 변증신학자들은 복음이 다양한 문화를 만나는 과정에서 복음으로부터 이탈하는 기독교와 신학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과론적으로, 이단들의 도전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사도적 전통에 입각한 확고한 자기정체성을 찾게 만들었다.
lll.로마 제국의 보호 하에 국가 교회화하는 기독교(313-600)
1.비잔티 기독교(Byzantine Christianity)
A.D.310-600 어간은 로마의 황제가 교회의 감독권을 행사하는 제국하의 교회 시대이다 A.D. 330년 경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의 수도를 로마로부터 지금의 터키에 있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기고 여기에 궁전을 짓고 성곽을 쌓아 이를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e+polis)이라 칭하였다.
2.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에 대한 호의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교회들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및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니, 이와 같은 기독교 세계는 당시의 사도적 보편 교회의 윤곽이다. 따라서 보편 교회 차원에서 야기되는 신학적인(혹은 교리적인) 문제는 이들 대관구의 대표들(목사=감독)의 모임에서 논의되고 해결되며 확장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모임이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었다.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a:A.D. 325)는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하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성 그리고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확정하였다. 나사라렛 예수님의 신성의 문제로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던 당시의 사도적 보편 교회는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들이 고백하고 예배해야 할 성서적 하나님의 모습을 확정했던 것이다. 니케아 신조의 내용은 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인데, 그 초점은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요, 이 예수님이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신조는 318명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 결정한 후, 보편 교회의 수의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다.
니케아 신조(325년)
우리는 한 하나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으니,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출생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오, 빛으로부터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셨기 때문에, 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로 공유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만물이 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사, 성육하시고, 인간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믿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381)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시다 우리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빛으로부터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시고, 인간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다. 그리고 그는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본다. 중요한 정통성의 표준은 칼케돈(415년)의 정통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냐(the Work)에 대해서 보다 그분이 누구시냐(the Person)에 대하여, 신약성경에서부터 논란이 일어나 여러 세기 동안 그 논쟁을 거듭하다가 결국 지증해 세계rlehrrysms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vere Deus et vere homo)이시다”로 결론맺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the Person) 안에 두 본성(the two natures in the one Person of Jesus Christ)”이 결코 혼동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며 상호교류한다고 하는 정통 기독론을 확정지웠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성적 영혼”(the rational soul)과 “몸”을 지니신 참으로 온전한 인간되심을 천명하였으니, 이 정통 기독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편 교회의 정통성의 표준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칼레돈 신조(451년)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는 다읨의 사실을 고백해야 할것을 만장일치로 가르치는 바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하신 하니님의 아들이시며, 이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고, 이성적 영혼(a rational soul)과 몸으로 구성되셨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만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으시다, 그는 신성에 관한 한창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시고, 그의 인성에 관하여는 이 동일하신 분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 이 동일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님이시오, 독생자 이시며, 우리에게 두 본성으로 되어 있으심이 알려진 바, 이 두 본성은 혼돈이 없고, 변화도 없으며, 분리될 수도 없고, 동떨어질 수도 없다. 그런데 이 두 본성의 차이는 이 연합으로 인해서 결코 없어질 수 없으며, 각 본성의 속성들은 한 위격(one Person=prosopon)과 한본체(one hypostasis)안에서 둘 다 보존되고 함께 역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두 위격(two prosopa)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실 수 없다. 이 분은 동일하신 아들이시오, 독생자이시오, 하나님인 로고스(말씀)이시오, 주 예수 그리소 이시다, 이에 관하여는 일찍이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요, 교부들의 신조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이다. 제2콘스탄티노플(553년)과 제3콘스탄티노플 공의회(670년)는 위의 기독론을 변호하고, 강화시켰고, 끝으로 제2니케아 공의회(789년)는 성상 숭배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성상 숭배에 관하여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개신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4. 이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우리는 지중해 세계 기독교가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 교회로 발전했다는 사실에서, 라틴 문화권의 기독교와 헬라 문화권의 기독교가 제국의 두 수도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다고 하는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회는 훗날의 갈라진 교회들이 흠모하는 하의 갈라지지 않은 교회(an undivided Church)의 모습을 보여준다. 2.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삼위일체 하나님(니케아-콘스탄티노풀 신조), 기독론(칼케돈 신조_ 등 기독교 정통성 표준의 확립은 훗날 기독교를 위한, 훌륭한 신학적 지침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등이 참여하는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지중해 세계의 여러 지역 교회들이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에 가까이 가는, 에큐메니칼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 그러나 이 시기의 교회는 제국하의 교회로서 국가 교회적 성격을 뜀으로써, 훗날 국가 교회들의 약점들을 미리 보여주었다.
lV.중세 기독교(A.D. 600-950)
로마 제국이 A.D. 476년에 몰락하자, 로마 제국에 건설적인 힘을 제공하였고, 희랍·로마 문화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했던 기독교는 생전의 위협을 받았다. A.D. 600-950년 사이에 기독교는 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없었고 생기 넘치는 신앙 운동을 펼칠 수 없었으며, 교회의 도덕적, 영적 자질에 있어서도 크게 퇴보하였고, 인류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도 그 몫을 다 할 수 없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의 끝날까지 그의 몸 된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의 몰락, 희랍 로마 문명의 몰락 그리고 북쪽의 야만족들의 침략과 동남쪽으로부터의 이슬람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살아남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도전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응전하였는가? 이집트 등 동방에서 기원한 서방 교회의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황제 이래로 제국의 교회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로서, 북쪽의 야만족들의 도전을 막아내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엄청난 도전에 맞설 수 있게 한 또 다른 요인은 로마 중심의 교황권 확립이었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기간은 암울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기독교는 널리 확장되었다. 예컨대, 콜룸바 등 아일랜드의 방랑 선교사들이 프랑크 영토 안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크게 했고 영국의 파송을 받은 패트릭이 아일랜드에서 선교하였으며, 6-7세기 어간에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하여 영국인들이 거의 다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로부터 약 100년 후 영국의 선교사들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회심을 주도하였다.
2. 중세 황금기(A.D. 950-1350)
1200년에서 1300년까지를 중세 황금기로 볼 때, 이 황금기가 바로 우리가 논하려는 시기에 포함된다.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시기를 황금기로 보지만 개신교 사람들은 600-1500년 어간의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복음과 성경의 여러 메시지들로부터 멀어졌다는 이유에서 암울한 중세기로 본다. 그러면 왜 이 시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시각에서 중세 황금기인가? 개신교조차도 이 시기(1200-1300)를 그래도 좀 나은 중세기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이 ‘황금기’란 서방 교회에 해당하는 말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서방 교회에 대해서만 논하려고 한다. 우리는 네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복음 전파에 의한 기독교의 황청의 노력과 특출난 교황들 4. 서방 교회의 창의적 신학 사상이다.
1)복음 전파에 의한 기독교의 확장
9세기와 10세에 유럽의 많은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한 스칸디나비아(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된 것은 10세기 후반이었다. 950-1050년 어간에는 중앙 유럽의 가장 큰 슬라브계 국가인 보헤미아와 폴란드가 기독교 세계로 완전히 들어왔다. 950년부터 4세기 어간에는 이슬람에게 빼앗겼던 스페인과 시실리의 많은 지역을 기독교가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950-1350년 사이에 유라시아(Eurasia) 대륙 서쪽 끝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기독교를 자신들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다. 2)수도원 운동을 통한 교회 갱신 11세기,12세기,13세기에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 갱신이 크게 눈이 띤다. 11-12세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클루니 수도원 운동은 13세기의 구걸승단인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수도회 및 예수회(Jesuits)의 모체가 되었고, 교회의 개혁을 주도할 감독들과 교황들을 배출하였다. 12세기의 시토 수도회와 13세기의 카르멜 승단과 어거스틴 승단도 유명했는데, 프란시스는 청중들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지팡이, 돈, 음식, 두벌 겉옷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며 병든 자들은 치유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했다. 프란시스와 그의 제자들은 예배, 회개, 관대함, 용서를 강조했고 이웃 사랑과 원수사랑 그리고 겸손을 설교했다. 도미니크는 프란시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 받았다. 그가 프란시스를 만난 것은 1218년이었다. 두 승단은 “구걸하는 승단”이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3)교회를 갱신하려는 교황청의 노력과 특출 난 교황들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된 힐데브란트는 다음에 논할 교황 인노 센트 3세와 더불어 중세 교황 주의의 절정을 장식하였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로마의 교황만이 ‘보편적’이라는 칭호를 지닐 자격이 있다. 이 교황만이 주교들을 퇴위시키고 즉위시킨다. 교황은 황제까지 퇴위시킬 수 있다. 그는 한 곳의 주교를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다. 교황의 허락 없이는 어떤 종교회의도 열 수 없다. 교황이 내린 처벌이나 처형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다. 교황권의 절정은 1198 ~ 1216년간 재직한 교황 인노센트 3세에서 보였다. 그는 교황을 태양에, 황제를 달에 비유하여 힐데브란트처럼 국가가 교회에게 예속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같은 교황 절대주의 시대는 십자군을 사용하여 가타리와 왈도 등 이단 박멸에 무자비하기도 하였다. 4)서방 교회의 창의적 신학 사상 11세기에서 12세기 초의 안셀름이 유명한 창의적 신학자였고,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는 13세기 어간의 신학적 논란과 토론의 절정으로서 20세기의 신토마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제2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 표준 신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세 황금기의 신학은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라 불리 우는데, ‘schola’란 ‘학교’라는 뜻으로서 스콜라주의는 학교 사람들의 지적인 성취를 의미한다. 수도원들이나 대성당, 특히 대학교들 안에서 스콜라주의 신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교육되었다.
3. 몰락하는 중세기(A.D. 1350-1500)
황금기를 지난 중세기가 이 기간 동안에는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교회 갱신의 징표들이 계속 나타나는 가운데 16세기 종교개혁을 준비한다. 교회사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70년 바벨론 포로에 비유하여 “아비뇽 포로” (1309-1377)라 일컫는 바, 이는 교황청의 부패를 반증하고 있으며 중세 교황주의 교회의 몰락을 예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서방 교회의 몰락과 아울러 각성의 징표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징표들의 연속성 속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논하는 다음 글에서 이 각성의 징표들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4.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개신교는 주로 복음과 성경을 표준으로 이 시기의 기독교를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평가하는바, 무엇보다도 교황주의 직제와 발전된 교리들과 기타 교회행습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2. 하지만 우리 개신교는 겨자씨와 같은 복음이 나무가 되는 역사가 이 시대에도 계속 진행되었고, 누룩과 같은 복음이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가루 서말을 부풀렸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과 러시아 등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수도원 운동을 통한 공동체 추구와 서양 문화의 보전과 승화, 그리고 서양 문화 전반의 기독교화를 볼 때에, 결코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3. 만약에 이 시기에 대하여 종말론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다면, 이 시기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계시되고 약속된 미래적 종말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한편 이미 교황주의 교회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 기독교 황제 중심의 기독교 제국의 형태로 이미 이 땅 위에 실현되고 있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4. 끝으로 이 시기에 동방 정통 교회는 이단을 정죄하는 기독교 정통성의 표준을 복음과 성경 그리고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 결정으로 보는 경향이었으나,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기에 더하여 14개 이상의 로마 가톨릭 공의회의 교리 결정을 정통성 시비의 표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V. 복음을 재발견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루터교의 형성(16세기)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대 각성 운동에로 인도하는 작은 각성 운동들로서, (1)공의회 운동(coniliar movement), (2) 신비주의 운동, (3)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 (4)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 운동, (5) 민족단위의 국가들의 등장, (6) 위클리프와 후쓰등 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의 개혁 운동이 있다. 1)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혹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1309-1377)를 치유하기 위해서 나타난 운동이 공의회 운동(Concilar movement)이였다. 이 운동은 교황의 권위보다 더 높은 협의기구 혹은 의결기구를 구성하자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갱신에 이바지하려고 했다. 루터가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18년에 교황청에 공의회 개최를 제안하였고, 칼빈 역시 그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이와 같은 공의회를 통한 해결 방안을 제안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 서방 교회는 분열의 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2) 신비주의 운동 독일의 에크하르트, 타울러,『독일 신학』은 계층 질서적 성적체제와 7성례전을 통해서 매개되는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개인이 직접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찾았고 그루트와 아켐피스 계통의 “공동생활형제단”과 라드윈 계통의 빈데스하임 공동체는 신비주의와 경건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추구하였다. 루터가 그의 생애 초기에 타울러와『독일 신학』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신비주의 운동이 교회 갱신을 추구했음을 증거 한다. 신학적, 제도적, 성례적, 법적 객관주의가 신비주의자들의 주관주의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올바른 객관주의와 올바른 주관주의를 찾게 되었다. 즉, 루터와 칼 빈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은 성서 주의적 객관주의가 아니라 성서 안에 있는 복음의 객관성과 이 복음에 대한 구 원론적 신앙이라고 하는 주관적 확신을 확보했다. 루터초기가 어느 정도 신비주의와 연계되어 있고, 칼빈 역시 후기 중세기의 신비주의와 연결 고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루터와 칼빈은 로마 가톨릭적 객관주의도, 신비주의자들의 주관주의도, 모두 넘어서고 있다 하겠다. 3)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 르네상스는 중세기의 교회와 신학이 희랍·로마 문화를 왜곡시켰고 따라서 인간의 고귀함을 일그러뜨렸다고 주장하였다. 즉, 르네상스는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back to the sources=회랍 로마의 고전)는 모토를 가지고 인간 회복 운동, 나아가서 교회 갱신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이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넘어오면서 성경과 고대 교부(특히 어거스틴)로 돌아가자는 모토로 변하여 종교개혁 운동에 기여하게 된다. 루터를 제외한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 개혁신학자들 모두가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은 적어도 교육을 통한 인간 갱신 운동이었다. 4)후기 스콜라주의 운동 영국의 옥캄과 독일의 비엘, 그리고 프랑스의 다이 등 후기중세기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이성을 내세우는 중세의 주지주의를 비판하고 양심과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를 지향하면서 교회의 도덕적 갱신과 신앙에 호소하였다. 이 같은 경향이 16세기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자인 가브리엘 비엘의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그의 본격적인 종교개혁 신학을 제시하게 되었다. 5)민족 단위의 국가들의 등장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 등 민족 국가의 등장은 신성 로마제국의 중앙집권적 권력의 악화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중앙집권적인 힘을 악화시켜 16세기 종교개혁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는 국가별 개신교를 낳게 되었다(독일의 루터교, 스위스 도시 국가들의 개혁 교회, 화란의 개혁 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영국의 성공회 등). 6)위클리프와 후쓰 끝으로 옥스퍼드에서 브레드워다인과 같은 어거스틴주의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이 위클리프에게서 영향 받은 보헤미아의 후쓰는 개혁 이전의 개혁자들로서 교황청의 출교와 화형을 받았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이들은 교황을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 하는 계층 질서적 성직 체제와 7성례를 통한 은총의 매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2. 종교개혁
1)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별안간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독일”은 화란,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큰 부분을 포함하였고, 스페인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주된 구성이었는데, 독일 내에는 7선제후(electors: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영주)가 있었고, 200개에 달하는 제후국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난립하는 제후국들의 모든 제후들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졌고,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 집권 체제의 통일성을 위협하였다. 게다가 80개가 넘는 도시 국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중앙집권적 교황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민족 국가적 특징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독일의 도시민들의 집권층과 영주들에 대립해 있었다. 서유럽의 역사적 변화와 서방 교회의 몰락, 그리고 독일 내의 경제·사회적 상황 및 종교적 부패 외에도 16세기 종교개혁을 일으킨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루터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이었다.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죽는 상황을 목격하고(1505년 문학 학사를 끝내고, 법학에도 몰두할 즈음), 구원의 길을 찾아 수도원에 입원하지만 수도원의 삶(monastic life-ideal: chastity, poverty, obedience)은 루터에게 고민만 일으켰다. 수도원적인 삶의 이상을 추구하면 할수록, 의로우신 하나님 존전에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부끄러운 자신의 죄인 된 모습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이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이 그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수도원의 삶을 통해서, 아니 사제가 되고 교수가 된 후에도 루터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 때문에 시험(Anfechtung)을 경험하였고 고민에 쌓여 있었다.
2)루터신학의 주요 주제들
(1)두 종류의 의 (1519)
루터는 밖으로부터 온 의와 우리 자신의 의를 말한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이다. 의는 성화에 해당한다. 두 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의이다. 우리 혼자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밖으로부터 온 의가 그것을 성취케 한다.
(2)갈라디아서 강해 (1519)
본서의 주요 주제는 율법과 복음 그리고 두 왕국 사상이다. 루터는 어거스틴 전통에 따라 이신칭의를 받아 성화로 나가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그리스도 왕국과 불신자들의 세계인 세계왕국을 말한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에 관여하여왔고 제국이 교회를 지배했던 역사를 떠올리면서. 두 왕국의 구분을 분명히 하 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믿는 사람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통치 밑에 있기는 하나.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불신자들의 세계를 이처럼 구별하는 동안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를 약화시켰다고 생각된다.
(3)로마의 교황주의에 대하여 (1519)
이 저서에서 루터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표지를 둘로 본다. 하나는 말씀설교요. 다른 하나는 성례전(세례 와 만찬) 집례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교회 표지론은 루터교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인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제 8항에서 공식화 되었다.
(4)1520년의 3저서
1, 독일 귀족에게 고하는 글: 이 저서는 3가지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여기에서 “만인제사장직론”에 근거. (1) 평신도와 성직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2) 평신도 역시 성서 해석권을 갖으며. (3) 평신도가 공의회를 소집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2, 교회의 바벨론 포로: 루터는 여기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7성례전을 2성례전으로 축소 시켰고. 모든 평신도의 말씀설교권과 성례집례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안수례 받은 특수 교역직에 의해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집례가 이루어 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 3,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함 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노예 되었다고 하는 역설적 진리를 말한다. 역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제사장이라고 하는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3. 이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중세 말(1350-1500) 서방교회의 각성 운동들의 연속선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열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개혁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교회분열이 초래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2, 루터의 여러 신학적 주제들은 중세 교회의 교회 의 페러다임 을 바꾸어 놓았다. 1) 이신 칭의 는 구원론에 있어서 르네상스 휴머니즘. 후기 중세기 유명론. 에라스무스. 로마 가톨리시즘이 주장하는바. 구원론에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 공헌을 거부 함 으로서. 신학적 페러다임 이동을 가져왔다. 2) 의인인 동시에 죄인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양자의 불연속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문화 참여라고 하는 역설을 주장하는바. 중세 신학의 페러 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3) 율법과 복음은 복음이 철학. 교회의 법. 교회의 제도와 직제. 기타 교회의 행습들에 의한 교회의 요구들에 의하여 질식당하는 상황에서 중세 신학의 페러다임 이동을 가져왔다. 4) 오직 성서로만 과 복음의 재발견은 니케아 신조와 칼케톤 신조 그리고 칼케돈기독론을 제외한. 기타 중세교회의 전통을 제거함으로써. 중세 신학의 페러다임 이동을 가져왔다. 5) 루터의 만인 제사장직론 은 성. 속의 이중구조를 깨뜨렸다.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존전에서 신분이 같다는 것이다. 6) 중세는 성직에 관하여만 소명(Beruf. Vocatio) 이라는 말을 적용하였으나. 루터는 만인 제사장직론 에 입각하여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았다. 7)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중세기는 교회가 국가위에 군림케 하였고. 국가를 자신에게 예속시켰으나. 루터는 교회의 영적 임무와 국가의 세속적 임무를 확실히 구분하였다.

VI.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형성및 기타 종교개혁(16세기)
1. 스위스의 종교 개혁과 개혁전통
루터와 나이가 같은 쯔빙글리 가 1518년 쮜리히 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이래로. 파렐은 1528년 베른에서. 오이코담파리우스는 1526년 바젤에서. 마틴 부처는 1523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그리고 칼빈은 1535년 제네바에서 각각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 개혁은 파렐에 의해서 준비되었고. 제네바 시 의회에 의해서 공식화 되었다.
2. 스코틀렌드 종교개혁
종교개혁당시 스코틀렌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결국. 스코틀렌드는 이같은 외세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개혁 전통의 종교개혁을 국가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스코틀렌드 종교개혁의 특징은 국가 전체적으로 장로교(개혁교회)를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즉. 스코틀렌드는 1560년 국회에서 녹스에 의해서 작성된 스코틀렌드 신앙 고백서를 채택하여 국가차원에서 장로교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 교회 체제를 지닌. 스코틀렌드 장로교회는 19세기에 이르러 분열의 아픔을 경험한다. 즉. 자유교회가 기성국가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갔던 것이다. 20세기의 최근에 들어서서 이 두 교회는 통합에 성공하였다.
3. 영국의 종교개혁
보통 성공회라 일컬어지는 교파는 헨리8세(1491-1547)로부터 시작되는 영국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감독들을 직접 임명하고 이들을 국가 공직에까지 기용했던 헨리 8세는 무었보다도 루터의 책들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루터 종교개혁에 반론하여 1521년 7성례전들에 대한 주장이란 책을 저술할 정도였다. 헨리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는 개혁교회 계통의 왕으로서 영국교회를 개신교화 하는 일에 크게 기여 하였다. 엘리자베스1세 때에는 청교도 운동이 시작되어 영국 성공회가 또다시 개신교화 하는 경험을 하였으니. 1563년에 그 유명한 “93개 조항”이 채택되었다. 이처럼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조 중심의 종교개혁으로서 개신교화(Protestantization)의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좌경화 종교개혁
쮜리히 정부의 지원을 받아 종교 개혁을 수행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그레벨. 만츠. 블라우로크. 후브마이어. 후터등을 지도자로 하는 재세례파가 등장하였다. 재세례파들은 콘스탄틴 대제 이전시대 혹은 니케아 이전시대를 교회사의 황금기로 보고 그 이후는 타락의 역사로 본다. 루터나 칼빈은 일편단심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 신학을 개혁 하려는 생각밖에 없었으나. 이들 좌경화 종교 개혁자들은 처음부터 분리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5. 반 종교 개혁(the counter-reformation)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 개신교적 종교개혁의 공격에 대한 반격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이기에. 교회사를 이를 반(反)종교개혁 이라 부른다.
6.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우리는 우리 한국 장로교(개혁교회)의 기원을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개혁 교회에까지 소급하여 찾게된다. 2. 성공회의 기원과 역사에서 우리는 국가 교회의 전형적인 습을 발견한다. 3. 16세기 당시 좌경화 종교개혁 교파 사람들이 도처에서 심한 박대를 받은 사실은 종교의 다원화가 아직 실현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4. 서유럽은 한편 가톨릭 교회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결별하게 되는 비극을 경험하였으나. 다른 한편 이 가톨릭교회가 결별하게 되는 비극을 경험하였으나. 다른 한편 이 가톨릭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를 개혁으로 인도하였다.
VII. 교파주의를 절대시하는 17세기정통주의 시대
17세기는 성서의 권위와 성서주의(biblicism)에 입각한 교파별 교리주의 시대이다.
1. 루터교 정통주의
17세기의 루터교와 개혁교회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경직화된 교리 체계에 입각한 교파 절대주의 시대를 열었다. 17세기 당시 루터교는 독일의 영주국들과 스칸디나비아 3국에. 개혁교회는 스위스. 프랑스. 화란. 스코틀렌드. 영국. 독일의 일부. 헝가리. 폴란드 등에.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서 유럽의 그 나머지 지역에 확산 되었던바. 교파들 간의 신학적 싸움은 곧바로 영주국들 간에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1577년엔 순수 루터주의를 재정립하는 일치신조가 작성되었다. 이 신조야말로 루터 교 정통주의 의 전주곡으로써 아리스토테레스의 철학을 많이 사용하는 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을 낳게한다.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의 가르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관과 자연의 초자연의 이층구조에 입각한 계시론이다.
2. 개혁 교회의 정통주의
개혁교회 역시 17세기에는 정통주의 시대를 맟이한다.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에 맞먹는 정통주의 신학이 개혁 교회 안에도 형성 되었으니. 알슈테드. 보에티우스. 투레티니 등은 17세기 개혁 교회의 정통주의 교의학자들이었다. 다른점은 성경관에 있어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그것이 다소 도르트의 그것보다 낫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는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규범 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과 기독교인들의 기독교적인 삶을 성경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3.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퓨리탄
동일한 17세기 인대도. 프랑스의 위그노 계통 개혁 교회와 영국 퓨리탄 전통의 개혁교회는 상당한 활력을 보였다. 프랑스의 최초의 위그노 공동체는 칼빈의 슈트라스부르크의 모형을 따라 1546년에 Meaux 지역에 세워졌다. 그리고 파리의 최초의 위그노 교회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의 모형을 따라 1555년에 조직되었다. 퓨리탄들이 뉴잉글렌드 의 조상들이 되고. 미국교회 초기 역사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 넣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으나. 이들이 받은 박해는 역시 17세기 교파 절대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4.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주의
1545-1562년의 트렌드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17세기에도 이 공의회의 교리 선언을 정통성의 표준으로 내세워. 역시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로욜라는 1549년에 일본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펼쳐 1612년엔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을 정도로 일본 기독교가 커졌다. 1614년 일본에는 적어도 3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스페인이 중남미 대륙을 선교하는 동안 포루투갈은 동양선교를 시도하였다. 포루투갈은 인도의 고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중국의 마카오를 식민지화 하면서 동시에 기독교화 하였다. 개신교는 18-19세기 동안에 교회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기독교를 널리 화장시켰으니. 이런 의미에서 라투렛 교회 사가 는 1817-1914년까지를 위대한 세기라 하였다.
5. 이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가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로만을 너무 경직시켜 성서의 권위주의를 우상화하였고. 17세기야 말로 프란시스 베이콘. 코페르니쿠스. 뉴톤의 과학주의적 이성과 데카르트의 선험적 이성. 그리고 허버트경의 이신론(理神論)이 등장하던 시대였다. 2. 17세기의 교파 절대주의와 20세기 초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 이유는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성경의 중심주제를 성경의 통일성으로 보지 않고. 영간론에 의해서 성경의 모든 명제적 진리들이 동일한 가치를 가졌다고 봄으로써. 성경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통일성은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3. 본래 종교 개혁은 오직 성경으로만(solo scriptura)을 내세웠으나. 17세기에 이르면 루터교는 루터교 신학 전통을. 형성하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개신교의 신학사에서 “solo scriptura“ 안에서 나름대로의 신학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4. 우리는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에 비추어. 16-17세기 개신교의 약점을 발견한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자체 갱신과 더불어 건전한 신학을가지고. 선교와 사회 참여와 교회 일치에 힘써야 할 것이다.
VIII. 18세기의 계몽주의.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 부흥운동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모두가 17세기 기독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리고 18세기 복음주음주의 부흥 운동 역시 개신교 선교활동을 낳았다.
1. 계몽주의
18세기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계몽주의 시대로 구분된다. 17세기의 교리 논쟁과 교파 싸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18세기 계몽주의는 성경. 교회 그리고 신학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을 모든 진리(종교적 진리까지도)의 척도를 삼았다. 18세기 계몽주의는 과학 혁명과 철학 혁명으로 시작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중세기의 천동설에 반대하여 지동설을 주장하여 케플러로 이어지고. 베이콘 은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근거한 신학적 명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명제의 연역법에 반대하여 관찰과 분석. 실험과 종합울 통해서 경험적 확신에 도달하는 귀납법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온도계. 망원경. 진자의 법칙및 중력 의 법칙을 만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 하였으며. 뉴톤은 인과(因果)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주장하였다. 바야흐로 창조주 하나님이 자연 밖에서 자연을 통치하고 있다고 하는 신앙은 더 이상 지탱되기가 힘들었다. 자연은 자연 자체 내의 법칙성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기독교는 초자연과 초월을 무시하는 바. 내재주의 혹은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 일컫는다. 영국의허버트 경은 이신론의 아버지였다. 그는 자연인의 이성이 생래적인 보편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2. 경건주의 운동
계몽주의가 먼저 일어나고 경건주의를 받아들인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확실히 경건주의는 또한 계몽운동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경건주의 운동이 유럽서 제일 먼저 일어났고 계몽주의는 제일 나중에 들어온바. 무엇보다도 국교화된 지역별 루터 교회가 정통주의 교파 절대주의를 지향하면서 복음의 활력과 성령의 활기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 운동은 이처럼 정통주의로 경직화된 17세기 루터교 국가 교회 안에서 일어난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는 의도였다.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교회사적 공헌들을 열거하면 다음 과 같다.
1. 각교파의 교리를 정교하게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리 논쟁을 위한 자료로써 성경을 읽지 않고 성령의 지도하에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격려. 권고. 위로. 경건한삶을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신조와 신앙고백들의 해석적 틀을 넘어선 성경석의를 강조 하였다. 2.교리 설교보다 주석 설교를 강조 했다. 3. 성서 언어를 강조하였다. 4. 구약성서 보다 신약을 강조하였다. 5. 초대교회를 강조 하였다. 6. 목사 후보생의 교육을 강조 하였고. 평신도의 위치를 높였고 상류층과 노동자의 차별을 없앴으며. 교회 정치는 장로교 정치쪽에 가까워졌다. 7. 가난을 물리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하며. 감독 체제를 개혁하였다. 8. 새로운 교육열과 인류애에 불타 올랐으니. 일반교육의 개혁과 신학 교육의 갱신.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봤다. 9. 찬송가를 많이 만들어 경건의 열정을 표출시켰다. 10. 해외 선교를 강조 하였다.
3. 복음주의 각성 운동
18세기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 중심의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조나단 에드워드 중심의 미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은 선교의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이론신을 한류라고 한다면. 18세기의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과 복음선교 활동은 난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와트는 증기기관을. 카트라이트는 방직기를 발명하였으니. 기계의 출현으로 실직자들이 많이 생겼고. 산업화로 인하여 농부들은 농토를 버리고 공장과 광산 주위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정착지에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었다. 기성 영국 성공회(국교)의 교구 제도의 구조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경건주의로부터 힘을얻은 웨슬리형제와 기타 복음주의자들은 이처럼 기존의 삶의 터전과 그 틀을 잃어버린 서민층을 대상으로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였던 것이다. 영국런던 에서는 1678년경 소수 젊은이 들이 종교적 모임들을 조직하였고. 1700년경엔 이 같은 모임이 100개에 달하여영국은 물론 아일렌드까지 퍼졌다. 이 영국의 모임들 역시 경건주의자들의 모임처럼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실천적 목적으로 읽었으며. 경건한 삶을 양육 시켰고 성찬을 종종 나누었다. 그리고 가난한자. 군인. 항해자 및 죄수등을 돕고 위로와 격려의 설교를 많이 했다. 요한 웨슬리의 아버지인 사무엘 웨슬리도 이같은 “religious society”를 구성하였다.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는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미국에 청교도가 상륙할 때가 1620년대였는데. 3세대가 경과하면서 청교도 조상들의 신앙 열정이 13개주 모두에 있어서 식어갔다. 미국의 대 각성운동은 아마도 영국의 영향을 받아 1726년 뉴져지주 의 네델란드 개혁교회 계통에서 프렐링휴이젠의 지도하에 일어나. 1734-1735년 사이에 이같은 부흥의 불길은 매사추세츠의 노스햄프턴 마을에 옮겨 붙어 뉴잉글렌드 의 대각성 으로 이어진다. 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노스햄프턴의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 이다.
4.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18세기에의 두 흐름에서 우리는 이미 18세기 자체내에 모더니즘의 극복의 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2. 17세기의 교파 절대주의가 이성의 시대를 야기 시킨 사실에서. 적어도 우리 기독교는 이성의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의 소리를 잘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물론 우리는 이성을 만물의 척도로 하는 계몽주의에 대하여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으나. 계몽주의가 서구의 사회. 정치적 민주화에 공헌한 부분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이 선교 활동으로 이어지고. 19세기에 오면 이 흐름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불러 일으킨다.
IX. 유럽의 세속화.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신학. 그러나 “위대한 선교의 세 기”(19세기)
18세기 서유럽의 역사에는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흐른다. 하나는 계몽주의요. 다른 하나는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운동 및 개신교 선교 활동이다. 경건주의는 선교 활동을 불러 일으켰고. 동시에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가져왔다. 그리고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 역시 개신교 선교ㅕ 활동을 낳았다.
1. 유럽의 세속화
19세기의 유럽은 18세기 계몽주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유산을 물려받아 급격한 세속화를 경험 하였다. 예컨대 기독교는 1.과학과 산업혁명. 2. 역사학. 3. 인간의 내적 도덕성. 4. 자유주의. 5. 마르크스주의. 6. 노동의 세속화. 7. 반 성직주의에 의하여 세속화 되었다. 즉 기독교는 과학의 발달로 (특히. 다원의 진화론) 창세기를 다시 읽게 되었고. 과학은 계시와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역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인간의 도덕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윤리적인 명령을 아랑곳 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모든 권위 구조를 거부했고.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죄론 과. 구원론과 종말론을 완전히 세속화 시켰으며. 노동의 세속화는 기독교의 모든 직업윤리를 와해시키어 노동의 가치를 단순히 임금으로만 계산하게 되었다.
1)과학에 의한 기독교의 세속화
185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 과학자들 사이에 유물주의적 과학자 들이 있었다. 이들중 유명한 사람들은 포크트(Vogt). 몰쇼트(mollschott). 및 뷔흐너(Buchner) 였다. 포크트는 교회의 교역자 들을 대단히 증오 하였고 유물주의 철학을 강력히 옹호 하였다. 그는 다윈과 더불어 창세기 1장을 인정할 수 없었으니. 종(種). 하나님. 영혼의 실재 및 영적 세계를 거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같은 유물론적 과학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의 혁명을 지지했다. 뷔흐너 는 튜빙겐 대학의 의학교수로서 유물주의적 과학자 였는데. 그의『힘과 물질』은 1904년까지 21판을 거듭했고. 15개국의 말로 번역되었다. 그는 생물이란 아무 계획 없는 자연의 우발적 현상에 불과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은 물질의 소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 창조 및 영적 능력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세계에는 전혀 기적이 없다고 하였다.
2)역사학에 의한 기독교의 세속화
19세기는 “역사학” 분야를 신학과 철학으로 부터 독립시켰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구속사와 공관 복음서의 역사성이 여지없이 무너졌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역사는 하나님의 숨은 섭리의 손길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인간의 조작물 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역사의 세속화이다. 19세기는 또한 역사 결정론을 주장했다. 역사 결정론은 통계학에 의존한다. 역사 결정론은 심지어 살인이나 자살까지도 개인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것이 라기 보다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객관적 법칙성에 의한 것으로 본다. 19세기는 또한 낭만주의적 사관도 경험 하였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의 객관적 데이터 보다 도 그 밑에서 꿈틀거리는 생명. 힘. 운동같은 것을 강조하면서. 객관적 법칙성 보다도 개인과 개인의 천재성을 강조 하였다. 이에 반하여 19세기 꽁트(August Comte) 같은 사람의 실증주의는 인류 역사란 신화와 신학. 그리고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되어 향후 과학 기술과 산업사회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사관이 오늘 21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역사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칼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였다. 자본주의를 정죄하며 사회의 부정의와 인간의 노예 됨을 정죄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성은 결국 기독교적 도덕성에서 나온 것이다. 소외 개념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의 죄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계급 투쟁을 통한 소외의 극복. 나아가서 계급 없고 소외 없는 사회건설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점은 하나님나라 건설의 세속화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종말적 기대와 비슷한 미래적 비젼 을 갖는다. 마르크스주의는 곧 다가올 프로레타리아 천국을 대망하면서 이 프로레타리아 천국과 종말적 긴장을 유지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회심 자처럼 맑시즘의 회심자는 회개. 신앙. 열성적 제자의 도 등을 가지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주의적 개신교 신학
슬라이에르마허. 헤겔주의 신학자들. 릿츨. 하르낙. 트뢸취 등에 의하여는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은 이미 논한 19세기 세속 주의에 대한 응전 이었다. 19세기 개신교 신학이 인간 중심의 신학이요 문화의 신학으로 문화속에 용해되는 신학이라고 비판 받는 것이 마땅하나. 19세기 세속화 인간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훌륭함이 인정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1)슐라이에르마허
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와 18세기 칸트의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낭만주의 물결 속에 빠져17세기 기독교를 경멸하는 그 당시지성 슐라이에르마허 의『종교론』인 들에게 주는 글 이었다. 그의『종교론』은 낭만주의자들이 인정할만한 “무한자“(神)가 자연에 대한 느낌과 직관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과 느낌에 매개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변증학적 노력에 해당한다.
2)헤겔주의신학자들
헤겔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헤겔의 철학을 변증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우파 헤겔주의 신학자들 이 있고 헤겔 철학의 허구성을 찌르는 좌파 헤겔주의 신학자들이 있다. 예컨대 헤겔 우파는 삼위일체 교리. 기독론. 세례와 성만찬. 역사와 하나님 나라와 같은 기독교의 신학적 주제들을 헤겔 철학에 의하여 변증하였다. 성부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부정성의 극한인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셨고. 성령을 통해서 이아들을 부활 시 키 시사 다시 이아들과 화해 하셨다는 한 하나님의 자기 분화를 통한 변증학적 발전은 죄와 죽음이라고 하는 부정성에 의하여 억눌려있는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는 원천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들어감으로써 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운동에 참여케 하는 수단이다. 참으로 하나님이시오. 참으로 인간이시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의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合一)를 이룩하였고. 성령을 통하여 교회가 탄생되었으니. 이 교회는 저 화해의 역사적 실현 그것이다.
3) 릿츨과 하르낙
릿츨(1822-1889)은 헤겔의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칸트의 실천이성을 중요시 하는 신 칸트 계열의 신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와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집중하였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및 종말론적 초월적 하나님 나라 등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릿츨은 사실과 가치.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이분화 하여 신약 성경을 초대 교회의 가치 판단의 소산으로 보아, 신약 성경 내용 중 형이상학적 세계와 역사적 사실을 제거해 버렸다. 하르낙은 릿츨의 제자로서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론,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 등의 초월적 차원을 무시하고 역사적 예수님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2:15)고 하는 설교를 가장 중요 한 신약 성경의 메시지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설교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실천이성의 도덕적 자기실현 을 하는 것이다. 하르낙 의 복음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예수와 그의 설교(막2:15)이다. 하르낙 은 사도바울과 요한의 복음을 거부하고, “단순한 복음”을 주장하였다.
3. 위대한 선교의 세기
라투렛 은 프랑스 혁명 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 어간의 19세기야 말로서양 제국주의 와 식민지주의 의 황금기였다고 본다. 18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 그리고 선교 활동의 유산을 물려받은 19세기는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과 옥스퍼드 운동. 그리고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세기는 18세기 계몽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럽 전체의 급격한 세속화. 낭만주의와 관념론. 산업혁명. 식민지주의. 무엇보다도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 신학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세기였다.
4.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내가 이 반석(예수 그리스도 와 신앙)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마16:18).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를 통해서 진리로 증명된다. 18-19세기의 난류와 한류는 2000년 기독교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발견된다. 2. 우리는 19세기 독일의 개신교 신학이. 그 약점(문화. 신학. 인간중심적 신학. 변증신학)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당시 서유럽의 세속화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보아.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18-19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선교활동과 사회 참여로 이어졌고. 이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원동력이 복음의 활력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X. 20세기의 도전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응전
1. 20세기의 도전
1914-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사년동안 지속된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30개국이었고. 참전국의수는 6천5백만이었는데. 이중 1/7이 죽었고 1/3이 부상을 당했다. 계수하기 쉽지 않으나 민간인의 부상자수도 부상당한 군인들의 수와 맞먹었다. 이 세계 제1차 대전으로 18-19세기 동안에 형성된 낙관주의적 인간론과 세계 진보론 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19세기의 과학 문명과 산업의 발달은 대량 살상 무기들을 만들어 인류와 자연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8-19세기적 “근대주의”(modernism)는 깨지고 말았다. 1917년엔 레닌과 초기의 볼쎄비키 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 다수파)에 의해서 선동되고 주도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의 경우 이즈음에 금주 운동과 여성 참정권 문제가 일어났다. 또한 멕시코 혁명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1710년에 발발하여 십 수년 동안 이어진 멕시코 혁명은 1927년에 “국제 연맹” 에도 불구하고 1922-1943년 어간 이태리에서는 무솔리니 지도하에 파시즘이 등장하여.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태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민족 전체를 군대 조직으로 바꾸어갔다. 1933년 1월엔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국회에서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파시즘의 독일판에 해당하는 나치즘이 독일에서 등장하여. 이태리의 파시즘을 능가하였다. 이 나치당의 영향으로 반(反) 셈족주의가 국제 파시즘의 기성조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독일과 기타 지역에서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대 학살을 당했다. 1944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략했고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세계의 주요 강대국 들은 세계대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태평양의 여러 나라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아프리카 식민지들. 근동지역. 남미의 동남북 지역. 태평양 군도 등 57개국이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상황은 어떠하였나? 온갖 형태의 반식민지주의가 “제3세계”에서 확산 되었으니. 패전국들의 식민주의가 해체되었고. 승전국들까지도 전쟁의 결과 위신과 존경을 잃었다. 전후 중국은 민족주의적 공산 사회주의 노선을. 일본은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길을. 그리고 쿠바는 1950년대에 공산화 되었다. 독일의 분단을 계기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급격히 냉각된 동서 냉전체제는 우리 한국에도 6.25 동란을 일으켰다. 1960년대의 미국의 민권 운동과 여러 운동은 중남미의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해방 운동과 더불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고. 1980년대 말 구 공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공산동유럽의 와해는 동서 냉전의 구도를 바꾸어 힘의 다변화 시대를 열었다.

2. 개신교의 응전
독일은 제1차 대전의 쓴잔을 마셨고. 히틀러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파괴되고 분단되었다. 따라서 유수한 독일의 신학자들은 20세기중엽에 이르면 대부분 중년 이상이거나 노년에 이르고 이들의 뒤를 이을 신학자들이 별로 배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개신교 신학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유럽 대륙의 신학 활동은, 대체로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키는데 성공한 스위스와 스웨덴에서 일어났다. 개혁 신학의 부활을 가져온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가 바젤에서 나왔고, 루터 신학의 부흥을 일으킨 아울렌(Aulen)과 나이그렌(Nygren)이 중립국인 스웨덴으로부터 나왔다. 슈펭글러(Spengler)의 『서구문명의 몰락』(1918)과 더불어. 18-19세기의 “모더니즘”의 소산인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을 고한 칼 바르트의『로마서 주석』(계2판 1921년)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저서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인 칼 아담스는 이 저서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 비유했거니와, 이 작품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상실되었던 종말론적 복음을 다시 찾아냈고,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심판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였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확보하게 하였으며, 구속사를 살려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18-19세기의 난류를 이어받은 전통이다. 19세기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웨슬리와 에드워즈 등)과 선교 활동의 전통을 이어 받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독교의 지리적 확장을 경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며, 선교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게 한 초교파적 세계 기구들로는 선교단체들 이외에 YMCA와 YWCA 세계연합, SCM(기독 학생운동)과 WSCF(세계 기독 학생 연합)같은 것들이 있었다. 1910년 에딘버러의 제8차 (세계 선교 대회)가 에큐메티칼 운동의 분수령이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성공회의 주교인 브렌트가 WMC폐막 즈음에 “신앙과 직제”(Faith and Oeder) 운동을 제안하였고, 미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이 운동을 전개하여 미국과 유럽에로 그 운동을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신앙과 직제”의 대표들과 “삶과 봉사”의 대표들이 1938년 화란의 위트레히트(Utrecht)에서 미국의 케버트(Cavert)의 제안을 따라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란 명칭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은 현장을 채택하였다. “세계 교회 협의회란 성경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부르심에 함께 응답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1961년에 보안된 내용)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1939)의 발발로 10년 후인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W.C.C. 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WMC(세계 선교 대회)는 1921년에 IMC로(국제 선교 협의회)로 바뀌어 W.C.C.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1961년에는 이 IMC가 W.C.C.에 통합되어 1750년대에 이 IMC가 다시 CWME(세계 선교와 복음 전도 세계 대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로마 가톨릭 교회의 응전
로마 가톨릭이 제1차 대전에서 벗어날 즈음 교황좌는 계속해서 유능한 사람에 의해서 채워졌다. 1914-1922년까지 재직한 베네딕트 15세, 1922-1939년까지 재직한 비오 11세, 그리고 그 이후 비오 12세는 모두 경험과 창의력이 있는 인물들로서 교회 갱신에 기여했다. 베네딕트 15세는 제1차 대전 중과 그 후에 세계를 향하여 평화 수립의 원칙들에 호소하였고, 전쟁 당사국들로 하여금 피차 자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포로와 민간 교환을 협상하였고 병든 자들은 도왔으며, 전쟁 포로의 본국소환, 포로들과 관계 가족들 간의 편지 왕래 및 파괴된 지역의 복구와 구제로 도왔다. 신학 연구의 부흥도 일어났다. 전후에 등장한 실존주의에 대응하여 마리뗑, 질송, 프리즈와라 등은 네오 토미즘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부 신학의 부활과 예배 및 예전의 갱신도 있었다. 1962-1965년 사이에 열린 제2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갱신과 개신교와의 에큐메니칼 관계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의 공헌은 16세기 종교개혁 이래로 가장 빛나는 것이리라. 제1바티칸 공의회(1869-1870)가 교황 무오설을 선언한 후 많은 사람들은 공의회 시대는 끝났고 교황들의 절대군주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1950년 말 요한 23세는 근교의 빈민들을 전례 없이·방문하고 다른 감독들(bishops)을 “나의 형제 감독”이라 불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요한 23세는 20세기 로마 가톨리시즘의 방향을 회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2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 10월에 열렸다. 본 공의회는 많은 비 가톨릭 옵저버들을 초청하였다. 공의회 시작시에는 31명, 마지막 회기를 마칠 즈음에는 93명의 비가톨릭 옵저버들이 대거참여하였다. 특히 유의할 것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및 아프리카 흑인을 대표한 사람들이 42%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1962-1965년 사이에 열린 제2 바이칸 공의회의 4회기동안에 결정된 주요 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제1 회기 때부터 논의되어 제2 회기(1953.9)에 와서 확정 된 “거룩한 예전에 대한 교리 헌장”은 예배와 예전의 갱신, 무엇보다도 예배와 예전에서의 모국어 사용을 강조하였다. 2. 제3 회기(1964.9) 동안에는 “교회에 관한 교리헌장”, “동방 교회들에 대한 교령” 및 “에큐메니즘에 대한 교령”이 나왔다. 3. 제4회기(1965.9)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현대 세계 속에 있는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이 확정되었는데, 후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실참여 혹은 사회 봉사를 논하고 있다.
4.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전망
1.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고대 교회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 문화를 기독 교회화 하는 데에 기여했던 것처럼, 오늘의 기독교는 세계 제1,2차 대전의 도전과 파시즘과 나치즘의 도전, 나아가서 공산권 붕괴 후 지구화의 도전 앞에서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신정통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 등을 통해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기독교적 활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겠다. 2.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 경제의 지구화와, 지식 정보화와 정보 기술의 혁명의 지구화를 경험하고 있고, 이에 따른 경제 정의 문제와 환경파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개인주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도적 신앙 내용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사유화되고 감성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다원화 종교와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XI. 세계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운동
1. 2,000년 서양 교회사를 통해서 본 세계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운동
우리는 2,000년 서양 교회사를 통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신약성서에서부터 교회의 분열과 일치 추구는 있었고, 동, 서방 교회가 갈라지기 이전 그리고 개신교가 탄생하기 이전인 고대 기독교 세계에서도 교회 분열과 일치는 있었기 때문이다. 1)고대기독교(100-600) 사도행전은 “복음”의 지구화 혹은 세계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은 12장까지 대인들의 기독교화를, 13장부터 27장까지 안디옥을 비롯한 이방 선교를, 그리고 28장에서 바울의 로마 선교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A,D. 100-310년까지는 네로 황제, 트라얀 황제 및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복음”과 “기독교”는 소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희랍 로마 세계로 확장되었고,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A,D. 310-600년까지도 “복음”과 “기독교”는 널리 확장되었으니, 바야흐로 희랍 로마 세계의 경계를 넘어 지구화의 입구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2)중세 기독교(A.D 600-1500)
우리는 중세기를 A.D 600-950년, A.D. 950-1350년 그리고 A.D. 1350-1500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초기 중세기는 로마 제국의 멸망(476년)으로 가장 암울한 시대였고, 후기 중세기는 중세기가 사향길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은 어떠하였고, 교회 분열과 일치 추구는 어떠하였나? 600-950년 동안에는 좀 저조하였으나, 전(全) 중세기를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는 계속해서 확장 되었고, 유럽의 문화를 개변시켰다. A.D. 1054년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을 경험하였으나, 대체로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정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가 중세의 동·서 유럽의 세계를 각각 기독교적으로 통일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개신교파들의 등장 이전까지 이처럼 양대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였다.
3)16세기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 했지, 결코 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 프렌트 공의회 (1545-1563) 기점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스위스 쮜리히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 역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다가 개혁 교회(The Regormed Church)를 형성케 되었고, 이 개혁 교회가 스위스를 넘어서 프랑스, 화란, 독일, 영국(특히 스코틀랜드) 및 폴란드와 헝가리 드응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4)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이 기성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갱신하는 데에 주력했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이후 이미 스페인과 포루투칼의 제국주의에 힘입어 아시아와 중남미 등에 선교 활동을 크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622년엔 바티칸에 “신앙 전파국”(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선교 활동은 18세기에는 한류와 난류가 흘렀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을 만물의 척도로 하는 계몽주의(The Age of Teason)요, 다른 하나는 경건주의와 이에 따른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다. 경건주의에 크게 영향받은 영국의 웨슬레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죠나단 에드워드는 영미계통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 부흥 운동의 여파로 개신교의 선교 활동이 놀랍게 확산되었다.
6)19세기 기독교 역사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 교회사가는 프랑스 혁명 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느 1815년에 시작해서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 어간의 19세기야말로 서양 제국주의 시대로서, 유럽인들이 지구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시대지만, 바로 이 99년 동안에 기독교2,000년 역사 동안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복음”과 “기독교”가 널리 확장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의 원동력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개신 교회들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였으니, 19세기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과, 영국 및 유럽 대륙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야말로 위대한 19세기의 추진력이였다. 이 19세기는 유럽 전체의 급격한 세속화, 낭만주의와 관념철학, 산업혁명, 식민지주의, 무엇보다도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 신학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세기”였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리는 역사로서는 바로 이 99년 사이가 2,000년 교회 역사상 가장 두드러 진다 하겠다. 영국 복음주의(British Ebangelicalism)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선봉에 섰다. 19세기의 개신교 해외 선교는 급속히 확장되어서 지구촌 구석구석에 개신교를 심었는데, 이 엄청난 선교 운동의 중심은 대영제국이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특히, 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운동과 비국교도 운동에 힘입어 영국 국가 교회와 관계없는 자발적 선교 단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럽 대륙에서도 개신교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에 의하여 솟아난 에너지를 선교 활동으로 표출시키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생겼다. 이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만 해도 1815년에 생긴 “바젤 복음주의 선교회”, 1821년의 “덴마크 선교회” 와 “파리 선교회”, 1828년의 “라인강 지역 선교회”, 1836년의 “라이프찌히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와 “북부 독일 선교회” 등이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선교 활동은 교파주의적 색채를 띈 기독교 확장의 역사였다. 19세기에는 어느 나라, 어느 교파의 선교사나 선교 단체가 어느 나라에 어떤 교파의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느냐가 중요했다. 종교개혁 이래로 17세기의 교파 절대주의(confessional absolytism)를 거쳤고,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친 19세기의 개신교는 아직도 교파주의로 인한 어려움을 격었던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는 교파주의와 개 교회의 성장주의 이상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복음주의 부흥 운동과 선교 활동으로 불타올랐던 19세기는 특히 피 선교 지역의 선교 현장에서 교파들간의 친교와 연합, 나아가서 선교단체들 사이의 친교와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8-19세기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에서, 복음주의와 선교 활동이 필연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낳았다고 하는 역사적 필연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의 교파를 초월하는 “자발적 공동체들”(volyntary associations)의 성격을 띈 기독교 단체들이 생겨, 에큐메니칼 운동에 기여하게 된다.
7)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18-19세기의 개신교 선교 역사가 없었으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는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지는 세계 선교 대회 중, 제8차 세계 선교 대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수령이다. 이 대회 이전까지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같았으나, 이 대회를 계기로 그것을 활짝 열린 문으로 마구 쏟아져들어 오는 햇빛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 대회가 폐막될 즈음 미국 성공회의 브랜트 주교에 의해서 “신앙과 직제” 운동이 시작되었고, 세계 제1차 대전(1914)이 터질 즈음에 스웨덴 루터교의 대주교인 죄더볼룸에 의해서 “삶과 봉사” 운동이 시발되었다.
8)결론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복음”과 “기독교”의 확장의 역사인 동시에, 교회의 분열과 일치 추구의 역사이다. 우리는 위에서 “고대기독교사”와 “중세 시독교사”, “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 “19세기 기독교사” 및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사”를 논하였는데,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동안 확장된 기독교 세계의 일치와 선교와 사회 참여를 프로그램화 하여 추진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교회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사건이라 여겨진다. 기독교 2,00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성취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일치와 선교를 위한 기도(요 17:21)가 이루어지고 있고, “가루”가 “밀가루 서말”을 부풀리고 있는 역사(歷史)는 계속 진행될 것으로 믿어진다. 골로새서 1:20과 에베소서 1:10은 인류의 역사 과정과 자연(自然) 속에서 교회를 대행자(the Agent)로 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꼭 실현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에도 “복음”과 “기됵교”의 확장,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을 계속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는 18-19세기 개신교의 복음주의 운동과 선교 활동이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복음주의와 18-19세기적 선교 운동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이것에 비추어서 우리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를 보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 한국 개신교 1930년 이전까지 19세기 복음주의 부흥 운동과 선교 활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의 지도하에 상당히 에큐메니칼하게 나갔으나, 1930년대 이래로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개신교 근본주의 때문에 그리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꺼번에 안겨진 자유로 인하여 한국 개신교는 분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W.C.C.의 교회 일치 추구의 역사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세 흐름이 있다. 신학과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 세계 선교를 추구하는 “세계 선교와 복음 전도를 위한 세계 대회”(CWME=CWorld Mission and Evangelism) 및 “교회의 사회 참여”(JPIC Unit 3=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가 그것이다.
1)1948년 암스텔담 W.C.C.
1948년 암스테르담 W.C.C. 총회는 “비교 교회론”적 입장을 지향한다. 본 W.C.C. 총회는 결코 교파들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 하고 있지 않는다. 다만 S.I.I. “우리에게 주어진 일치”는 이 세계의 거의 모든 교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 에서 하나 됨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이 일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백성에게 주신 일치 바로 그것이다.
2)1954년 에바스톤 W.C.C
1954년 에바스톤 역시 1948년 암스텔담에서처럼 기독론(복음)에 근거한 교회의 일치를 주어진 일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주어진 일치에 있어서 복음과 교회는 불가분리하다. 1952년 룬드의 신앙과 직제 대회가 기독론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가시적인 교회 일치를 추구한 이래로. 1954년 에바스톤 W.C.C 총회는 교파들의 가시적 일치 추구를 DNL한 기독론적 기초를 확실히 하였다. 3) 1961년 뉴델리 W.C.C 1960년 스코틀랜드 센 엔드류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 대회 문서인 『One lord one baptism』이 세례와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시적 교회 일치의 근거로써 강조 하였고. 1952년 빌링겐의 IMC 가 Missio Dei 를 내세우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역설한 이래로. 1961년 뉴델리 W.C.C 총회는 1954년 에바스톤의 기독론에 근거한 교회 일치로 만족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근거한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교회 일치를 추구 하였다.
4) 1968년 웁살라 W.C.C
1961년 뉴델리 웁살라 W.C.C에서 동방 정통 교회가 정식 W.C.C 회원 교회가 되었고. 제3세계의 신생 교회들이 W.C.C 에 가입하면서 교회의 다양성이 강조 되었다. 그리고 1963년 제4차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세계 대회가 『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라고 하는 주제에서 복음(the Gospel Tradition)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유하고 있는 교파들의 다양성(traditions)을 강조한 이래, 1968년 웁살라 W.C.C. 총회는 1961년의 개 교회 혹은 지역 교회들의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정체성 확립으로 만족 하지 않고, 다양한 개 교회들과 지역 교회들의 “보편성”(catholiciy)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S.I.7은 교회의 보편성(catholiciy)을 모든 인류를 위해서 살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속 사역에 근거시키면서, 모든 종류의 이기주의들과 자기중심들과 대립시키고 있다. 이보편성은 인류사회의 보편성 속에 침투하는 혹은 이것을 끌어안는 보편성이다. 그러나 웁살라가 주장하는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다양성 추구를 전제한다(S.I.12).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예배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역동적 실체로서 다양성을 갖는다(S.I.13). 이런 역동성 속에서 다양성은 성령의 카리스마로서 교회의 보편성을 풍요롭게 만든다. S.I.21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인간의 하나됨을 창조론과 하나님 형상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론에 근거시키고 있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교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교회의 세계참여가 첨예화되던 1968년 웁살라 W.C.C.는 교회의 세계참여 차원에서의 보편성을 매우 역설한다(S.I.4) 교회들의 협의회를 통한 친교는 1961년 뉴델 리가 제시한 교회의 보편성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개 교회들 내지는 지역 교회들의 대표들이 협의회적 친교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S.2.2.4). “협의회를 통한 친교”는 개 교회의 정체성, 교회들의 다양성, 교회들의 보편성을 더욱 고양시킨다. 협의회들은 지역교회들과 보편 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이런 협의회적 친교가 없이는 보편 교회를 향하여 전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교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진정한 협의회적 특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회적 특정(concililarity of triune being of God)을 반사시킨다”(S.2.2.5).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는 1968년 웁살라가 제안한, 장차 로마 가톨릭 교회와 기타 비 W.C.C. 회원 교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에큐메니칼 협의회”(a genuinely universal ecumenical council)를 더욱 진전시켰다.
6)1983 벵쿠버 W.C.C.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세례. 성만찬. 직제) TEXT를 통과시킨 후 각 W.C.C 회원 교회들에게 발송하여 그 반응을 모았다. 이 BEM 문서는 신앙과 직제의 역사 이래 교회 일치에 있어서 항상 문제되어 오던 세례. 성만찬. 직제에 대한 신학적 수렴과정이요. 특히 에큐메니칼 성만찬 예전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1983년 뱅쿠버 W.C.C 총회는 BEM TEXT 에 근거하여 FLAK 예전서(Lima liturgy)를 만들고. 이것을 가지고 초대형 천막에서 성만찬을 올렸다. 뱅쿠버 W.C.C 총회는 일치의 징표로서 3 가지를 들고 있다. (1) 사도적 신앙의 공동이해 (2) 세례. 성만찬. 직제의 상호인정. (3) 공동의 결의 방법과 권위 있는 공동의 교도방법이다. 이 셋 중에서 “사도적 신앙의 공동이해”는 1983년 뱅쿠버 이래로 수렴과정을 거쳐. BEM 주제와 함께 스페인의 신앙과 직제 세계 제5차 대회(1993)에서 거의 확정 된 것이나 다름없다.
7) 1991 켄버라 W.C.C
1991년 켄버라 W.C.C는 제 3분과 “일치의 성령이시여! 당신의 백성을 화해 시키소서”에서 코이노니아 의 개념을 가지고 교파들의 다양성을 통한 일치를 설명한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친교를 갖는다.
8) 1993년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스페인의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제5차 신앙과 직제 대회는(Koinonia in life Witness)를 다음 주제로 삼았다. 본 문서는 신앙이 있어서 코이노니아 삶에 있어서 코이노니아 및 증거에 있어서 코이노니아를 논한다. 신앙 차원의 코이노니아는 복음다음으로 중요한 니케아ㅡ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공유 하므로 써 가능하고 삶 차원의 코이노니아 는 세례. 성만찬. 직제를 상호 인정하는 교회 중심의 삶을 뜻하며 증거 차원의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세계 선교와 사회 참여를 위한 것 이다.
9) 제8차 하라레 W.C.C 총회에 대한 보고서
제8차 W.C.C 총회에는 1998년 12월3일부터 14일까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영국으로부터 해방되기 이전에는 로디지아로 불렸음)의 수도인 하라레(harare)에서 열렸다. 세계 여러 나라들과 여러 지역으로부터 파송 받아 온 4.500-5.000명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대형 천막 안에서 예배를 함께 올림으로써 총회를 시작 하였다. 339개 교파들로부터 파송된 900명 이상의 공식대표들. 지역별 에큐메니칼 기구들. 국제 에큐메니칼 단체들. 교파별 세계연합체들. 각 나라의 교회 협의회. 기타 단체들로부터 파송 받은 사람들 유명인사들 그리고 방문자들이 함께 모여 W.C.C 창립50주년. 곧 에큐메니칼 희년을 축하 하였고. UN인권 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우리 한국에서도 장로교 통합 측 대표6명. 기독교 장로교 대표2명 및 감리교 대표 2명을 비롯한 4~50명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참여 하였다. 특히. 통합측에서 파송받은 11명의 신학생들의 참여는 우리 한국개신교의 미래를 밝게 하는 사건이었다. (1) 전체주제: “하나님께 돌아오라-소망가운데 기뻐하라” 토마스 베스트는 이번 주제가 “기독교 신앙과 삶”의 삼중적 구조를 지녔고, 이 삼중적 구조가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번 전체주제의 후반부는 로마서 12:12절의 “소망 중에 기뻐하라”(Rehoice in Hope)에서 왔는데, 그것의 더 큰 의미는 W.C.C. 창립 50주년과 UN 인권 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 정신에 있으며, 이 희년 정신 안에는 부채 탕감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아프리카 대륙의 문제가 포함된다(PL4.1, 10). 이미 1975년 W.C.C. 총희가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것도 그 당시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것도 그 당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 투쟁의 상황 때문이었는 바, 이번 W.C.C. 총회가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서 개최된 이유는 바로 이 희년 정신에 입각한 부채 탕감에 있다 하겠다. (2) 지구화(Globalization) 공산 동구권과 구소련 연방이 붕괴되고, 1990년 접어들면서 에큐메나칼 논의에서 점점 더 빈번히 들리는 단어는 “지구화”(globalization)이다. 이것은 초국가적이고 점점 더 세계적이 되는 경제구조, 금융구조 및 통신구조에 의해서 조성되는 “한 세계”(one world)에 대한 비전이다. C.U.V. 문서는 이와 같은 “지구화”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교회들의 일치 및 인류의 일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이 “지구화”는 직접적으로 교회들에게 업습해오는 도전이라고 한다. (3) 세계 교회 협의회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비전(A Common Understanding and Vi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C.U.V.) W.C.C.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1989년에 시작되어 1997년에 향후 W.C.C.의 정책성명으로 확정된 위 문서는 아직 완성된 문서는 아니었으나, 이번 총회의 초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첫 번째 공청회와 파다레와 두 번째 공청회를 지도하고 검토한 프로그램 지침안 준비위원회(the Programme Guidelines Committe)는 “두 번째 공청회”(Hearings - Phase 2)의 결과를 “한 하나님이 신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향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이룩하려는 …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4)W.C.C.와 “대화공간”(Forum)에 대한 비전 라이저 총무는 현 W.C.C. 회원권 조건이 과연 유일한 것인 가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남반구의 복음주의 교회들 및 오순절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참여를 촉구한다. 사실상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알려진 회원 교회들을 가지고 있는 현 W.C.C. 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 양 한 도구들과 대행 기구들이 등장해 왔고, 그 중 어떤 것들은 W.C.C. 그 자체 보다 더 오래 전에 생기기도 했다. W.C.C.는 교파별 세계 기구들, 지역별 에큐메니칼 기구들과 국가별 교회협의회들 및 국제 에큐메니칼 기구들과 정규적 사역 관계를 가지고 있다. W.C.C. 규정은 이들을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안에 있는 꼭 필요한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들은 W.C.C.의 회원이 될 수 없고, W.C.C.의 프로그램과 활동들의 발전에의 참여에 있어서 제약을 받고 있다. 그래서 라이저 총무는 개정을 제안한 W.C.C. 헌법 제3조가 말하는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PL 4.1, 26)고 본다. (5)새로운 선교 성명서 1989-1990년 어간에 일어난 공산 동구권과 구소련 연방의 붕괴, 그리고 시장 경제의 지구촌화 이후, 세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선교 성명서가 요청된다. 1982년에 나온 에큐메니칼 선교 성명서에 해당하는 “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이 결코 무효화되지 않으면서, 1990년 대와 21세기 세계 상황에 더 걸맞는 성교성명서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번 성명서는 오늘의 세계 정세를 특징짓는 것들 가운데 “지구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고 있다.
10)결론
이번 W.C.C. 초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화”와 “세계 교회 협의회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비전”이라고 본다. 전자는 1990년대와 21세기에 전개되는 인류 공동체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요, 후자는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세계 교회의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후자는 에큐메니칼 희년과 UN 인권선언 희년을 맞이하여 지난 50년에 걸친 에큐메니칼 운동을 돌리켜 보고 있으며, 그 동안의 성취와 실패를 논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가려는 의도와 목적을 담고 있다. 다음에 소개되는 이 문서의 핵심 역시 “교회의 가시적 일치 교회”.“인류 공동체의 회복” 및 “창조 세계의 보전”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말이다. - 우리는 젊은이들과 아이들, 여자들과 남자들, 평신도들과 안수 받은 교역자들, 이들 모두의 은사들을 긍정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가시적 하나 됨을 갈망한다. - 우리는 인류공동체의 치유와 모든 나머지 창조 세계의 보전을 기대한다. - 우리는 원수를 친구로 바꾸어 놓고 죄악의 고리를 끊는 용서의 자유케 하는 힘을 신뢰한다. - 우리는 이질적인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타종교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추구하면서 대화와 연대(蓮帒)의 문화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개방한다(PL 4.1, 34). 이상 W.C.C.의 교회 일치 추구의 역사에서 대체로 개신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삶과 봉사”(Life and Work) 및 “세계 선교”(CWME)에서는 더 더욱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방정교회는 이미 1927년 로잔 세계 대회부터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신앙과 직제 운동의 교회 일치 추구에 열심히 참여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개신교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동방정교는 항상 회원권 문제를 제기하여 왔다. 대체로 그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 기독교 판도에서 자신들이 지녔던 비중을 떠올리면서,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 교회 그리고 16세기에 서방 교회로부터 가라져 나간 개신교를 기독교의 세 축으로 보고, W.C.C. 회원권 문제도 여기에 걸맞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다.
이형기 지음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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