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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기위한 기도 같은데 모두를 살리는 기도

참빛7 2011. 3. 26. 11:20

 

죽기위한 기도 같은데 모두를 살리는 기도  

"죽기위한 기도 같은 데 모두를 살리는 기도"

방동섭(천안대학교 기독신학 대학원 교수)

*눅22:39-46


나도 시한부 인생

지난 번 전남 장성에 의료선교를 갔을 때 혈압을 체크해 본 적이 있었다. 체크 결과 위 혈압은 170 아래 혈압은 140이 나왔다. 그 때 어느 의사가 걱정하면서 "목사님 그 정도 혈압이면 갑자기 돌연사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그 때까지 나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미래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생의 처음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매우 깊이 느꼈다. "아! 사실은 나도 시한부 인생이구나" 새삼 "오늘이라는 시간만 나에게 주어졌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성경을 글로만 보면 안된다

복음주의 크리스쳔들은 깊은 사색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우리는 무조건 성경을 읽기보다 깊은 생각을 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래야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가끔 봉사는 잘 하는데 깊은 사고 훈련이 안되어 있는 신자들이 있다. 그래서 말씀은 읽지만 주님의 깊은 뜻은 읽어내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말씀을 해석해 버린다. 온 몸을 흔들며 열심히 찬양은 부르지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도무지 듣지 못한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문자로 된 언어가 음성 언어로 바뀌어 내게 부딛혀 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다. 성경을 글로만 보면 안된다. 소리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에게 깊은 사색과 기도가 필요하다.


깊은 기도가 깊은 사상을 낳는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깊은 기도가 나와있다. 예수님의 사상이 무게가 있고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기도의 깊은 골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깊은 기도의 삶에서 언제나 심오한 진리가 터져 나온다.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말씀 계시를 통해 가르쳐주신다. 마6:9에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교정하려면 주기도를 깊게 묵상하면 된다. 두 번째는 행동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오늘 본문이 바로 행동으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본문 속에 기도에 대한 깊은 진리가 숨겨있다.


1. 기도는 사건이 아니라 삶이다.

우리는 기도를 삶으로 하지 못하고 사건으로 할 때가 많다. 즉,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야만 기도한다. 문제가 생겨야만 기도한다. 자녀가 수능고사를 봐야만 새벽기도를 한다. 교회마다 수능고사 끝나고 대학 입시가 끝나면 기도회가 썰렁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를 삶으로 하지 않고 이벤트(사건)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깊숙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기도는 생의 원칙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가?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시매"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을 언뜻 보면 예수님이 단지 습관적으로 기도하신 것처럼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 "습관"이라는 말은 원문에 보면 "에토스(ethos)"라는 말로 되어있다. 이 말은 "원칙"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영어의 "Ethics"(윤리학)라는 말이 나왔다. 윤리는 인생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생의 원칙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루를 여시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은 기도였다는 말이다. 즉 기도 없이는 하루 인생을 출발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게는 기도가 사건이 아니라 삶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이같이 중요한 기도도 예수님은 사건으로 하지 안고 매일의 기도의 연장 속에서 하시고 있다.

허약한 하부구조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기도가 인생의 에토스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너무 특별기도를 좋아한다. 사건으로서의 기도가 너무 유행하고 있다. 기도가 사건이 아니라 삶으로 다가와야 한다. 오늘날 사회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substructure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IMF가 터지고 경제가 무너진 근본적인 이유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할 경제의 하부구조는 없으면서 지나치게 외향적으로 화려했던 것이다.


기도는 인생의 하부구조

북극의 빙산 10/1만 수면 위에 떠있다. 10/9는 물속에 잠겨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는 봉사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10/9의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기도는 교회를 지탱하는 하부구조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영국의 어느 교회의 목사, 너무 힘들어 사임을 생각하고 마지막 정리를 위해 교회에 갔다가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되었다. 조용히 내려가 보니 교회 지하실이었다. 거기서 몇몇 성도들이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목사는 생가을 바꾸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내가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그는 최선을 다해 그곳에서 목회하여 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많은 사역은 겟세마네라는 기도의 하부구조(substructure)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가 혹시 잘 못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은 최후의 기도를 드리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모처럼 오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겟세마네에 오셨다. 기도가 그의 생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일하지 않으셨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작업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보여주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세상 종교의 기도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오해

한국 교회는 기도를 오해할 때가 많다. 어떤 오해가 있는가? 기도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작업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세상의 종교에서 들어온 것이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어떤 면에서 양적으로 보면 타종교가 우리보다 훨씬 많이 기도를 한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번은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데, 종업원이 사무실에 들어가 한참동안 안나왔다. 하도 궁금해서 사무실에 들어보니 그 종업원이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자신은 중동에서온 이슬람 교도인데 기도시간이라 엎드렸다는 것이다. 형식적이 기도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뭔가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외국 땅에서도 성지를 향해 그렇게 기도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작업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와 그들의 기도가 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세상 종교의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는 작업이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작업이다. 본문 43절 보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을 볼 수 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보여주신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찾기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었다.

OK 기도원이 아니라 KO 기도원으로

어느 기도원 이름 OK 기도원! 우리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만사 OK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OK 기도원"은 "KO 기도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기도원에서 우리가 KO 당해야 한다. 내가 죽어지고, 내 욕심이 죽어야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 내 뜻이 이루어지면 사실 비극이다. 나에게 너무 미운 사람을 향해 "저사람 하나님이 안데려가시고 뭐하시나"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그 사람도 나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담대해 질 수 있는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다.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은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시원하고 담대할 때는 없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의 기도의 확신이고 기도의 깊은 맛이라고 할 수 있다.


3. 기도는 대용물이 없는 노동

기도라도 한번 해보지?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적당히 때우는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44절). 이것은 무슨 말인가? 기도는 한마디로 노동이다. 우리가 언어사용을 잘 해야한다. 가끔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기도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도는 한번 해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기도가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았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으면 이렇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았겠는가?

기도는 솔로가 아니라 듀엣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돕는 분이 계신다. 43절에 보면 예수님은 기도할 때 "사자가 하늘에서 나타나 도왔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기도는 누가 돕는가? 롬8:26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다. 기도는 성령과 함께하는 노동이다. 기도는 다른 종교처럼 혼자 땀 흘리고 온갖 정성을 쏟는 것이 아니다. 혼자 열심 내는 것 아니다. 성경적인 기도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하다. 타종교는 기도를 혼자한다. 기독교의 기도는 solo가 아니라 duet이다. 성령과 내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대용물이 없는 노동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기도가 대용물이 없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다른 봉사 많이 했기 때문에 기도를 대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을 많이 하려면 기도가 그 만큼 같이 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줄이는 것 보다 일을 줄여야 한다. 두 번째, 내가 해야 될 기도 남이 대신 할 수 없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한 채로 그대로 있다. 옛날 상가집에서는 호곡하는 사람을 돈주고 써서 상주 대신 우는 일이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울음이 그치면 불효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효하지 않으려고 사람을 쓴 것이다. 그런 위선이 어디있는가? 한국 유교의 문제점은 유교가 한국사람에게 위선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는 것은 대신 울어줄 수 있는지 몰라도 기도는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 어머니의 자녀를 위한 기도는 우선 그 어머니가 해야 한다. 아내의 남편을 위한 기도는 그 아내가 해야 한다. 남에게 기도 부탁하고는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기도 예수님 당신이 하셨다. 베드로가 대신 하지 않았다. 나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누군가 나와 함께 기도할 수 있다. 나를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기도는 내가 해야 한다.

최대 과업

스펄젼은 "기도는 신자들이 배워야 할 최대의 과업"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기도를 일평생 배워야한다. 우리가 기도를 제대로 못 배우면 이방 종교인처럼 기도하게된다. 그리고 기도를 잘 못 배우면 기도하는데도 신앙은 무너진다. 기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웠다. 첫째, 기도는 사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도는 대용물이 없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해야될 기도는 안하면 영원히 안한 채로 남아있다. 다른 것으로 대치 할 수 없다.

모두를 살리는 기도

예수님의 기도는 새시대를 준비하는 기도였다. 즉 구속의 시대를 여는 기도였다. 죽기 위해 기도하는 것 같았는데 수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기도였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고 이웃을 살리는 새 시대를 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호산나 선교지역관련소식'에서 퍼왔습니다.

 

 

http://cafe.daum.net/khc23467

 

출처 : 예수님이 주인된 교회를 꿈꾸며
글쓴이 : 조슈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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