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자아의 죽음"|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중에서
대개 모든 종교는 고등종교나 하등종교 할 것 없이 그 나름대로 제사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 의식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정성을 요하는지 모릅니다.유교의 제사의식만 봐도 어동육서 라든지, 홍동백서 또는 조율이시 등 아주 븍잡하고 어려운 규칙들을 정확하게 지켜 정성을 다하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무당이 굿을 준비하는 것도, 불교 사찰의 불공도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성과 의식의 절차 면에서 모두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반면 오늘날 기독교의 제사라고 할 수 있는 예배의 의식과 그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유교의 제사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많은 정성을 쏟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합니다.이것은 목사인 저의 직업병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 예배가 이렇게 편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처음부터 우리의 제사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쉬운 제사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오히려 초창기 기독교의 제사와 예배는 우리에게 남다른 예식과 정성을 요구하였고 우리 기독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옛날부터 무던히도 애를 써왔습니다.
완전히 불사르라
레위기 l장부터 27장까지는 우리의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요구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화제,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많은 종류의 제사가 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방법을 알려 주시면서 그 제물에 대해 첫째 피를 쏟고, 둘째 가죽을 벗기고, 셋째 각을 뜨고, 넷째 불 위에 다 태우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제사의 모습입니다.즉 우리가 만든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이에대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 “사랑과 자비의 종교라면서 어쩌면 이렇게 무참히 동물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말하곤 합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분이실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 입니다. 하나님은 잔인하십니다.제물을 드리는 방법에 있어서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은 진정 잔인한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우리가 하나님께서 잔인한 분이 아니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제사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 얘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먼저 각 제사들의 마지막 공통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처진 제물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단 위에서 불사르라는 것입니다. 그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불사를 때 하나님은 그때야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1:9, 1:13, 1:17, 2:9, 3:5)
이미 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불태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항기로운 냄새, 즉 아름다운 제물이 되기 위해 전부를 불살라야 한다는 것, 그 의미가 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완벽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이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우리는 창세기 4장3절,4절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창4:3-4)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정성스럽게 드린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의 제사를 다르게 받으셨습니다.즉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이로 인해 결국 가인은 분해서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 죽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아벨이 그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 믿음의 차이 때문에 제사에도 차이가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그 근거로 히브리서 ll장4절을 내세웁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우리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으로 인해 '믿음'이라는 단어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아벨이 가인보다 더 믿음이 좋았다고 말하고 그 믿음의 차이로 인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정말 누구의 믿음이 좋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성경 그 어느 곳에도 그들의 믿음의 차이를 얘기해 주는 대목이 없기 때문입니다.그들의 믿음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따라서 제사의 차이는 결코 믿음의 차이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아벨이 양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거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양만 좋아하시는 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양을 드린 것이 믿음이라면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을 드린 것 역시 믿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집에서 키우는 양 중에서 그 새끼를 한 마리 잡아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한 해 동안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어 거기에서 얻은 소산을 드리는 것이 더 깊은 정성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고 안 받으시는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l1장 4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믿음'이란 단어 뒤에 '예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단어 보다 예물, 즉 제물이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즉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가 드린 ‘예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 하심이라(히11:4)
또한 그 예물의 의미를 히브리서 9장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렇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열쇠가 됩니다.즉 피를 흘려야 했다는 것입니다.피를 흘려야한다는 것은 다 불태워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이것은 완전히 죽는 것을 나타냅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정 기쁘시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은 바로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의 모든 귀결도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히 죽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물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 바처진 것은 피 흘리게 한 후 다 태워서 완전히 죽여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향기롭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 구약시대의 가르침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런 구약시대의 제사의 가르침이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옛날의 가르침 정도로만 생각되기도 합니다.그렇다면 구약시대처럼 제사를 드리지 않는 요즘에는 이것이 정말로 의미가 없는 가르침일까요? 아닙니다.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바르게 예배하라고 주문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문의 말씀이 바로 로마서 1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롬12:1)
성경은 우리가 곧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므로 피를 흘리고 다 불태워 드려서 온전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실까요. 그것은 제물 그 자체인 우리의 자세에 근거합니다. 즉 우리 마음과 자세가 온전하게 죽을 때 비로소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기간이 그리 길지 않고, 그중 10년은 일본에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의 목회기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일본이든 한국이든 목사가 가장 많이 하는 사역중 하나가 바로 장례식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장례가 제 전문분야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일본에 있을 때도 장례를 많이 주관하다보니 간혹 국제적인 장의사가 된 것 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마지막을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이 별반 다르지 않지만 장례 형식에 있어서는 두 나라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일본에서는 대부분 화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장이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한국은 화장장에 가면 먼저 화로에 시신이 안치된 관을 넣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이상 강한 불로 시신을 태운 다음 그곳의 직원들이 고인의 뼈를 다 수거하여 곱게 가루형태로 만들어 유골함에 넣은 후 유족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일본은 다릅니다. 화로에 관을 넣고 한 시간 정도 태우는 것 까지는 한국과 같지만 그 후 화로에서 관을 꺼낼 때 유족들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유족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화로에서 관을 꺼냅니다. 그 순간 유족들의 아픔은 극에 달합니다. 그렇게 불에 타고 남은 뼈들을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빼내고 그 뼈들을 유족들에게 직접 유골함에 담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유족들이 흰 장갑을 끼고 긴 나무젓가락으로 고인의 타다 남은 뼈를 하나하나 집어서 유골함에 넣습니다. 일본 사람들이야 그것이 자신들의 오랜 문화이고 전통이기 때문에 별 슬픔없이 담담하게 그 일을 해내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서 살다가 그런 장례를 치르게 될 때면 완전히 문화충격에 휩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이 죽었고 그 죽은 시체를 화장했는데 이제 내 눈앞에서 뼈만 남은 것을 보게된다면, 그리고 그 뼈를 내가 젓가락으로 유골함에 넣는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간혹 젊은 사람이 죽으면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이 일본까지 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본인들은 물론 보는 사람들까지도 너무나 힘든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집례하는 목사도 힘들고 참여하는 교인들도 힘이 듭니다. 불에 다 타고 남은 자식의 뼈를 보고 부모님들은 오열합니다. 그리고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제발 일어나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목놓아 외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고 단지 적막만 흐를 뿐입니다. 이것을 보며 저는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불에 태워 죽이는 것, 우리를 그렇게 태워 제물로 드리라는 것, 거기에서는 사람의 말과 생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말이나 욕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기의 주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침묵만 있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존재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타다만 앙상한 뼈 조각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로 태운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즉 나를 죽이되 철저히 죽이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피를 흘린 뒤에 또 다시 각을 뜨고, 각을 뜬 뒤에 재차 불에 태우라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어렸을 때 일입니다. 집 마당에서 닭을 잡는 모습을 많이 지켜 보았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고 피를 흘리게 한 후 물이 끓는 솥에 넣었는데도 가끔 닭이 푸드덕 살아 솥에서 뛰처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 닭은 피를 흘렸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기분이 묘한 광경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생선회를 먹을 때입니다. 기술 좋은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생선의 각을 뜨고는 접시위에 생선회와 뼈를 같이 올려 놓았습니다. 그 뼈에는 생선의 머리와 꼬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를 다 먹을 때까지 뼈에 붙어 있던 머리와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회를 뜨는 요리사의 기술에 놀라기 보다 질기고 질긴 생선의 생명력이 느껴져 온 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이처럼 각을 떴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를 흘리고 난 뒤에, 그리고 각을 뜬 뒤에 다시 불에 태우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완전히 죽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는 지금껏 하나님 앞에서 많이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 같은 우리가 어느 순간 다시 살아있고, 죽었다고 하면서 또다시 살아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만 한 것 같습니다. 피를 흘렸지만 또 살았고 각을 떴지만 또 푸드덕 거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하게 죽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나 나의 소리를 내면서 내 의지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올 틈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한번 불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향기로운 제물되기
저는 목회를 할 때 웬만해서는 제 의견을 잘 말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조금 나쁩니다. 물론 저도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어떤 문제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가지고 있고, 시각이 있고,해결을 위한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넒은 집에 살고 싶고,좋은 차를 타고 싶습니다.직업이 목사이지만 목사라도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돈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도 받고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고, 남은 여생동안 여행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저를괴롭힙니다.더 버려야 하고 더 포기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저에게는 그런 저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는 것이 제 자신을 죽이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의 생각을 죽일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꼭 낮아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꼭 가난해져야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낮아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I 되었습니다.내 생각이 내 마음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각이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이 내 중심에 오시도록 하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합니다.우리의 삶 자체가 감격스러운 예배로 느껴지지 못하고, 매주일의 예배가 감격스럽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안에I 자아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피를 다 쏟을 때야 비로소 참 제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스스로를 죽일 때 참 예배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나를 전부 불태울 때 옆에 앉아 있는 교우들이 진정 내 형제와와 자매로 느껴지고, 나를 철저하게 부인할 때 내가 하는 봉사와 섬김에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또한 피를 흘리며 철저히 죽는 나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됩니다.그래서 죽어야 합니다. 더 철저히 우리 스스로를 태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읽고 그 삶을 따르려는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어떻게 하면 우리 삶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내 의지와 내 생각을 비우는 것입니다.즉 나를 철저히 죽일 때 비로소 우리 안에 그리스도 에수께서 들어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입니까? 형식입니까? 습관입니까? 아니면 이벤트 행사입니까? 아닙니다.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자세입니다.나를 죽이고, 내 성격과 내 고집과 내 경험과 내 지식과 내 가치관을 버릴 때,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우리가 평생 드려야 할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간직하는 일 일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내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간직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앞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예배를 드리며 살아도 날마다 죽은 제사를 드리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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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늘 죽은 제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대식 목사저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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