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나는 3번의 자살을 시도했다. (음악이 나오지 않으시면 음악 파일을 클릭하십시요) 26살의 젊은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군청건설과에 근무하였다. 그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1971년 5월25일 오후 3시경.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만 38년의 세월이 끈질기게 지나갔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인동초보다 더 모진 고통의 세월들이였다. 나에게 행복한(멋진) 세월도 있었다. 탤런트(배우)가 될 기회가 있었으며 정치꾼, 아미면 주먹 왕이 되었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3가지 중 어느 하나 종류의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군대(병역)를 마치고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온 나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는 너무나 컸다. 그래! 이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에 제대 후 이듬해 군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1년 1월 5일 내 인생에 처음 시작하는 직장이다. 그런데 내 적성과는 처음부터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번인가 그만 두려했지만 돌아서는 내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실 부모님의 감정을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달 두 달 그리고 5개월 후 뜻밖의 사고(오토바이)로 현장에서 사망처리 되었다. 사고 이후 나는 식물인간이 되고 가느다랗게 맥박만 뛰고 살아 있는 시체나 별 다를 없었다.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부모형제들의 안타까운 모습.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지만 내 목숨은 정말 모질도록 질겼다. 해를 넘기고 이듬해 시체나 다름없는 몸을 이끌고 이듬해 퇴원을 한다. 그리고 집에서 사선을 넘고 넘은 삶이 시작된다. 수개월 여러 해 지나도록 식사조차 내 손으로 할 수 없게 되자. 식사 때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 힘들다는 표현보다 차라리 죽고 싶은 충동이날마다 나의 수몽을 조여 왔다. 식사 때마다 어머니께서 떠 먹여주신 음식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불효자식을...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님의 고생을 덜어주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사고 후 누구의 탓처럼 집안 식구들의 갈들이 심하게 나타났다. 그때마다 건강했을 때 내 모습은 간대 없고 식구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나를 지켜보신 어머님의 모습은 죄인 같은 심정이셨다. 그래서 엄님의 고생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마루 위 선반에 얹어놓은 쥐약을 발견 하고 가족들이 나간 틈을 이용 한 병을 감는 순간(손이 자유롭지 못하니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때마침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막내 동생에게 그만 들키고 만다. 첫 번째는 실패로 그리고 두 번째 세월은 가고 손가락이 하나 들 움직이고 손목에 근육이 살아났다. 이번에는 좀 더 신사적인 모양을 택했다. 여러 날 동안 침대 호창을 찢어 오라줄(끈)을 만들어 목에 감아 죽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 잔인하게 생각되었지만 당시 그 어떤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내 몸은 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어머님께서 움직여주셔야 했기 때문에 어머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2시간이면 욕창 방지를 위하여 몸을 움직여주시고 나는 또 다시 어머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대로 있어야했다. 어쩌다 1분이라도 시간이 지체하시면 내 모습은 너무나 변한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사랑하는 내 자식이 죽어 있다면 그 장면을 보신 어머님의 심정이 어떠실까! 를 생각하니 너무나 포기하고 다음기회를 찾기로 했다. 또 침대보가 찢겨진 걸 보신 어머니께 들키고 만다. 세 번째 시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여러 해가 지나갔다. 손 신경이 돌아와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쩌면 손이 건강해졌으니 좋지 않겠나 싶지만 아직도 온전치 못한 건강 때문에 못 할 때보다 오히려 움직이니 삶은 더 힘들었다. 짧고 긴 3년 몇 개월이 지나가고 또 다시 아침이 되었다. 아침 식후로 생각 된다. 가족들은 일터로 나가고 나 홀로 언제나처럼 어머니를 기다린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어쩌면 지금보다 건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긴 세월동안 어떻게 죽을까! 그 생각만 하다 보니 오직 죽음만을 선택하게 되었다. 항상 죽어야겠다는 생각만하니 우연한 기회에 극약을 구입하게 된다.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극약을 감춘다음 좀처럼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회가 왔다. 맨 정신으로는 진행할 수 없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또 술 한 잔을 컵에 부어놓고 거기에 준비해 감춰둔 극약을 찾아 넣었다. 술잔 속에서 약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이제 이 잔을 들고 마시면 3분정도면 모든 것이 날 것이다.미움이나 갈등, 슬픔이나 고통, 기나긴 세월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 사로 잡혀 있는 순간 들녘에 가신 어머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어찌 어머님뿐이랴! 잠시 전 함께 식사했던 모든 식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웠다. 못난 나 때문에 3년 몇 개월 동안 괴롭혔던 가족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래! 이 길이 당신들을 위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이제 나는 가족들에게 자우를 줘야한다. 나 때문에 우리가족들이 격은 고생을 생각하며 특히 어머니께서 겪는 고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리는 순간 컵 속에 넣어진 독약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이 마음이 식기 전에 사나이 뜻은 중천금인데 비겁하게 포기해서는 안돼!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아 한 손이라도 움직여 숱 가락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손가락 뿐 아니라 손도 움직이며 식사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데 지금 나는 독약이 든 잔을 들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술 컵을 들고 입에 넣은 순간 그야말로 찰라. 순간 누군가 잔을 든 내 손을 내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수였다. 훗날 형수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다른 때와 달리 오늘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서 청구멍을 뚫고 나를ㄹ 감시하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종요하더니 내가 술잔에 약을 넣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들고 있는데 형수께서 얼마나 떨리는지 온 몸이 움직여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달려들어외 내 손에 술잔을 내리쳤다고 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자살을 생가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지내온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지나간 간증시간에도 제가 말했지만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하락치 않으시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인생들이랴! 하나님의 자녀 모든 선택권이 아버지의 장중에 계시지만 마귀의 자녀는 그 선택을 마귀가 이용합니다. 문론 하나니의 허락하에서... 왜? 그 선택권까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므로...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신 바울 사도고백처럼 영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무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그러나 나는 내 목숨마져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의 장중에 맡겨드리며 나의 어떤 선택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며 또 나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살아라 가르쳤던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나의가는 길을 허다한 증인으로 바라보는 그들 때문에 나의 자유을 상실하고(십자기에 못박고...) 감사와 찬송으로 이 길을 갑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감사뿐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음악이 나오지 않으시면 음악 파일을 클릭하십시요)
26살의 젊은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군청건설과에 근무하였다.
그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1971년 5월25일 오후 3시경.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만 38년의 세월이 끈질기게 지나갔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인동초보다 더 모진 고통의
세월들이였다.
나에게 행복한(멋진) 세월도 있었다.
탤런트(배우)가 될 기회가 있었으며 정치꾼, 아미면 주먹 왕이 되었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3가지 중 어느 하나 종류의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군대(병역)를 마치고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온 나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는
너무나 컸다.
그래!
이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에 제대 후 이듬해 군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1년 1월 5일 내 인생에 처음 시작하는 직장이다.
그런데 내 적성과는 처음부터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번인가 그만 두려했지만
돌아서는 내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실 부모님의 감정을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달 두 달 그리고 5개월 후 뜻밖의 사고(오토바이)로 현장에서
사망처리 되었다.
사고 이후 나는 식물인간이 되고 가느다랗게 맥박만 뛰고 살아 있는 시체나
별 다를 없었다.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부모형제들의 안타까운 모습.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지만 내 목숨은 정말 모질도록 질겼다.
해를 넘기고 이듬해 시체나 다름없는 몸을 이끌고 이듬해 퇴원을 한다.
그리고 집에서 사선을 넘고 넘은 삶이 시작된다.
수개월 여러 해 지나도록 식사조차 내 손으로 할 수 없게 되자. 식사 때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
힘들다는 표현보다 차라리 죽고 싶은 충동이날마다 나의 수몽을 조여 왔다.
식사 때마다 어머니께서 떠 먹여주신 음식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불효자식을...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님의 고생을 덜어주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사고 후 누구의 탓처럼 집안 식구들의 갈들이 심하게 나타났다.
그때마다 건강했을 때 내 모습은 간대 없고 식구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나를 지켜보신
어머님의 모습은 죄인 같은 심정이셨다.
그래서 엄님의 고생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마루 위 선반에 얹어놓은 쥐약을 발견
하고 가족들이 나간 틈을 이용 한 병을 감는 순간(손이 자유롭지 못하니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때마침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막내 동생에게 그만 들키고 만다.
첫 번째는 실패로 그리고 두 번째
세월은 가고 손가락이 하나 들 움직이고 손목에 근육이 살아났다.
이번에는 좀 더 신사적인 모양을 택했다.
여러 날 동안 침대 호창을 찢어 오라줄(끈)을 만들어 목에 감아 죽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 잔인하게 생각되었지만 당시 그 어떤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내 몸은 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어머님께서 움직여주셔야 했기 때문에
어머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2시간이면 욕창 방지를 위하여 몸을 움직여주시고 나는
또 다시 어머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대로 있어야했다.
어쩌다 1분이라도 시간이 지체하시면 내 모습은 너무나 변한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사랑하는 내 자식이 죽어 있다면 그 장면을
보신 어머님의 심정이 어떠실까! 를 생각하니 너무나 포기하고 다음기회를 찾기로 했다.
또 침대보가 찢겨진 걸 보신 어머니께 들키고 만다.
세 번째 시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여러 해가 지나갔다.
손 신경이 돌아와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쩌면 손이 건강해졌으니 좋지 않겠나 싶지만 아직도 온전치 못한 건강 때문에
못 할 때보다 오히려 움직이니 삶은 더 힘들었다.
짧고 긴 3년 몇 개월이 지나가고 또 다시 아침이 되었다.
아침 식후로 생각 된다. 가족들은 일터로 나가고 나 홀로 언제나처럼 어머니를
기다린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어쩌면 지금보다 건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긴 세월동안 어떻게 죽을까!
그 생각만 하다 보니 오직 죽음만을 선택하게 되었다.
항상 죽어야겠다는 생각만하니 우연한 기회에 극약을 구입하게 된다.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극약을 감춘다음 좀처럼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회가 왔다.
맨 정신으로는 진행할 수 없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또 술 한 잔을 컵에 부어놓고 거기에 준비해 감춰둔 극약을 찾아 넣었다.
술잔 속에서 약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이제 이 잔을 들고 마시면 3분정도면 모든 것이
날 것이다.미움이나 갈등, 슬픔이나 고통, 기나긴 세월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 사로 잡혀 있는 순간 들녘에 가신 어머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어찌 어머님뿐이랴!
잠시 전 함께 식사했던 모든 식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웠다.
못난 나 때문에 3년 몇 개월 동안 괴롭혔던 가족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이 길이 당신들을 위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이제 나는 가족들에게 자우를 줘야한다.
나 때문에 우리가족들이 격은 고생을 생각하며 특히 어머니께서 겪는 고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리는 순간 컵 속에 넣어진 독약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이 마음이 식기 전에 사나이 뜻은 중천금인데 비겁하게 포기해서는 안돼!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아 한 손이라도 움직여 숱 가락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손가락 뿐 아니라 손도
움직이며 식사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데 지금
나는 독약이 든 잔을 들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술 컵을 들고 입에 넣은 순간 그야말로 찰라.
순간 누군가 잔을 든 내 손을 내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수였다.
훗날 형수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다른 때와 달리 오늘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서 청구멍을 뚫고 나를ㄹ 감시하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종요하더니 내가 술잔에 약을 넣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들고 있는데 형수께서 얼마나 떨리는지 온 몸이 움직여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달려들어외 내 손에 술잔을 내리쳤다고 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자살을 생가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지내온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지나간 간증시간에도 제가 말했지만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하락치 않으시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인생들이랴!
하나님의 자녀 모든 선택권이 아버지의 장중에 계시지만 마귀의 자녀는 그 선택을 마귀가
이용합니다. 문론 하나니의 허락하에서...
왜?
그 선택권까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므로...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신 바울 사도고백처럼 영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무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그러나 나는 내 목숨마져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의 장중에 맡겨드리며
나의 어떤 선택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며 또 나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살아라 가르쳤던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나의가는 길을
허다한 증인으로 바라보는 그들 때문에 나의 자유을 상실하고(십자기에 못박고...)
감사와 찬송으로 이 길을 갑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감사뿐이다.
주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