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마부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같은 시기 조선의 왕실에서 홀로 된 대비마마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골계에 나타난 미망인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 미망인의 고민과 양반들의 시각을 들여다본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양에서는 미망인의 재혼을 적극 권장했다. 필자가 직접 읽어본 서양의 고문서만 해도 그랬다. 16세기 독일 괴팅겐의 미망인 안나는 남편이 생전에 운영하던 가죽공장을 떠맡게 됐는데, 남편 밑에서 일을 배운 총각 토머스와 재혼해 외로움도 극복하고 사업도 살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었다.
반면 안나의 언니 마르타는 유산이 없이 미망인이 돼 가난을 못 이겨 결국 창녀로 전락했다. 안나의 사촌동생 마리아도 가난한 미망인이 됐다 결국 거지가 됐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미망인은 빈민이 될 위험이 무척 높았고, 그래서 친척이나 지인들은 물론 사회가 나서서 미망인의 재혼을 적극 도왔다.
조선시대 미망인의 처지를 재혼을 적극 장려하던 서양과 맞비교할 수는 없다. 조선 왕조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사실상 미망인의 개가를 금지했다.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부계 혈통을 위주로 한 종족 관념이 보편화돼 결혼한 여성은 시집의 체면과 이익을 위해 희생돼야만 했다. 이 악습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부녀의 재혼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는 새 법령으로 대체됐다.
조선의 미망인들은 ‘열녀(烈女)’가 되기를 강요받았다. 수절과부(守節寡婦)로 지내라는 것인데, 열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성차별적 발상에서 나왔다. 남성들은 죽은 아내를 위해 수절하거나 병든 아내에게 헌신하는 ‘의부(義夫)’ 또는 ‘열부(烈夫)’가 되기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열행을 강요했다는 데 불평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철저한 남성 위주의 열녀관은 고대 중국에서 확립됐던 것 같은데, 한국에도 삼국시대부터 그런 관념이 존재했다. 도미(都彌)의 아내라든가 설씨녀(薛氏女) 설화를 보면 당시에도 수절과 헌신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여성들에게 열녀가 되기를 강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열녀 만들기가 유독 강조됐던 조선 후기에는 ‘청춘과부’ 또는 ‘생과부’가 대량생산됐다.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에서는 최상층인 사무라이 여성들에게만 정절 관념이 강조됐고, 평민 여성들은 혼전에도 꽤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인 남성들은 한국 여성들을 통해 성욕을 채우려다 가난한 평민여성들마저 정절을 목숨처럼 중시해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조선과 비슷하게 열녀 되기를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조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외간남자가 억지로 손을 잡았다고 해서 제 손목을 자르거나 아예 목숨까지 끊는 열녀란 오직 18~19세기 조선에서만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많은 여성은 정절·수절을 강요하는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억압했다. 조선의 많은 미망인은 생전에 별로 정이 깊지 못했던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이런 죽음은 시집이 노골적으로 강요한 흔적이 없지 않았다.
방사 무르익자 과부 입에서는 ‘아롱~’ 소리만
미망인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정도였다면 도대체 갓 쓴 양반들은 여성의 인격, 그들의 성적 욕망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조사해 보니 뜻밖에도 여성의 성을 소재로 한 골계가 무척 많아 놀랐다. 여기서는 그것을 일일이 다 거론하지 못하고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골계 하나를 뽑아 함께 읽어 보겠다.
어느 시골에 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여종과 함께 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 살았다. 과부의 집에는 소가 없어 밭을 갈 때마다 이웃에 사는 홀아비에게 소를 빌렸다. 새 봄이 되자 과부는 소를 얻어 오라며 여종을 보냈다. 홀아비가 말했다. “네가 나와 하룻밤만 함께 지내면 소를 빌려주마.” 여종이 돌아와 과부에게 그 말을 전했다. 과부는 한동안 망설이다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여종은 홀아비와 잠자리에 들게 됐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홀아비가 조건 하나를 내세웠다. “네가 만일 그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아롱우(阿籠牛, 작은 얼룩소)·어롱우(於籠牛, 큰 얼룩소)’ 두 마디만 되풀이하면 소를 꼭 빌려주겠다. 만일 다른 소리를 내면 소는 못 빌려갈 줄 알아라!” 여종은 별로 어려운 일일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홀아비의 양물이 옥문으로 파고들어올 때는 ‘아롱우’, 슬며시 빠져나갈 때는 ‘어롱우’라고 소리질렀다. 양물이 들고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여종은 그 맛에 취한 나머지 ‘어롱어롱’만 되풀이했다. 절정에 이르자 ‘어어~, 어~ 어~’ 하느라 결국 소를 빌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과부는 마구 화를 냈고, 결국 직접 홀아비를 찾아가 똑같은 조건으로 잠을 자게 됐다. 과부는 상당히 침착한 편이었다. 꽤 오랫동안 아롱우 어롱우를 순서대로 되풀이 외워댔다. 그러나 한창 방사가 무르익자 ‘아롱~ 아롱~’만 과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좀 더 일이 진행되자 ‘알알~ 알~알~아~아~’ 하다 일이 끝나버렸다. 홀아비는 이것을 이유로 소를 빌려주지 않은 채 다시 내기를 해보자고 놀렸다. |
나중에 이 미망인이 홀아비를 이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반들이 미망인의 성욕을 자연적 현상으로 인정했다고 생각된다. 좀 더 이야기를 뜯어보자. 하필 농사지을 소를 매개로 미망인이 외간남자를 만나도록 구성한 것이 재미있다.
동·서양이 다 그렇듯 조선의 미망인들도 대체로 가난했다. 가난한 미망인은 소라고 하는 생산수단을 빌려야만 그나마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미망인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가 걸려 있어 이웃집 남성을 직접 상대하게 된다. 음욕이 많다거나 행동이 방정하지 못해 외간남자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양반들은 이야기 속의 미망인을 평범한 여성으로 전제했다. 미망인이 성행위 중에 ‘큰 얼룩소’ ‘작은 얼룩소’를 되뇌는 것도 흥미롭다. 그는 소를 빌리러 갔기 때문에 소에 대해서만 신경 쓸 뿐 그밖의 일에는 무관심했다. 제 아무리 목석 같은 그라지만 성적 희열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 이 이야기를 듣는 양반들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미망인은 정신을 가다듬어 도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는 점점 성행위에 몰입해 1년 생계를 보장해 주는 얼룩소를 포기하고 쾌락을 선택한다. 이 지점에서 화자와 청자, 즉 갓 쓴 양반들은 성적 즐거움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이라는 점에 수긍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기에는 성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야기에서 소가 상징하는 다른 점도 있다. 소는 밭갈이, 즉 보습을 땅에 깊이 꽂아 뒤엎는 일에 필요하다. 이를테면 농부는 보습을 통해 자연과 성행위를 하는 셈인데, 인간과 자연의 교접에는 밭을 가는 소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미망인이 남성과 정을 나누는 과정에도 소가 개입돼 있다.
성교 중에 미망인이 ‘큰 얼룩소’ ‘작은 얼룩소’ 두 마리를 연달아 부르게 돼 있는 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갈며 ‘이랴’ ‘저랴’ 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더욱이 행위 중에 미망인이 되뇌는 두 마리의 소는 어미 소와 송아지를 상징한다. 어미 소에게 송아지가 딸려 있다는 것은 그 소가 힘센 황소와 교접해 이미 풍요한 결실을 맺었다는 뜻이다. 미망인이 성행위를 하며 두 마리의 소를 연달아 불렀다는 것은 다산과 풍요를 불러오는 일종의 주술행위이기도 하다.
성생활 결핍과 가난의 이중고
미망인 이야기에서 먼저 여종이 그 남성과 동침하도록 한 것은 구성상 훌륭한 장치다. 여종이 내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미망인은 당당하게(?) 외간남자의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가난한 과부가 생계를 잇기 위해 꼭 필요한 소를 빌리러 간다는데야 그 누가 뭐라고 하랴? 물론 이 같은 연출은 미망인 이야기를 주고받던 양반들이 성적 욕망이라는 시험대에 과부를 올려놓기 위해 만든 수작에서 비롯됐다.
미망인이 성적 희열을 공유한 대상이 홀아비로 되어 있는 점도 교묘하다. 그 홀아비는 그다지 부유해 뵈지는 않지만 남에게 소를 빌려주는 것으로 볼 때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된다. 아마 미망인과 마찬가지로 양반 신분이었을 것이다. 계급이 같은데다 처지도 같아 한 사람은 홀아비, 다른 사람은 미망인이다. 하룻밤 인연이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누가 될 것이 전혀 없다.
더욱이 미망인은 생계상의 절박함 때문에 남성과 내기를 건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미망인이 신음소리를 냈던 성행위는 도덕적 비난거리가 아니다. 우리 속담에 ‘7년 과부 ×(남성성기 속어) 주무르듯 한다’는 말이 있다.
평민은 물론 조선시대의 갓 쓴 양반들도 성적 결핍에서 오는 미망인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핀 것은 한낱 가벼운 골계일 뿐이다. 만일 양반들이 사는 마을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양반들이 그 미망인에게 우호적이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안다는 속담이 있다. 어쩌다 홀로 된 늙은 양반들은 청상과부인 며느리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법하다. 그렇다고 며느리를 재가시키지는 못했다.
우선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 뻔하고, 과부 며느리마저 없을 경우 늙은 홀아비의 생활은 더욱 꾀죄죄해질 것 아닌가?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 늙은 홀아비 양반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양반들이 남겨 놓은 이야기 한 토막을 읽어 보자.
젓가락이 물자 대번에 젖빛 물을 왈칵 내뿜었다
깊은 산중이었다. 젊은 과부가 늙은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살았다. 어느 여름날 건장한 생선장수가 생선을 팔러 왔는데 마침 집에는 과부 혼자뿐이었다. 과부는 이런 호기를 그냥 놓칠 수 없어 갖은 언사를 동원해 생선장수를 유혹했고(비슷한 이야기에서는 생선장수나 소금장수가 유혹한 것으로 돼 있다) 마침내 둘이 그 일을 벌이게 됐다. 두 남녀가 한창 열에 들뜨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대문 밖에서 시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때였던 것이다. 놀라 일어난 과부는 겨우 치마만 걸친 채 황급히 생선장수를 마루 밑에 숨겼다. 며느리는 서둘러 시아버지 밥상을 차려 마루에 대령했다. 아직 욕정을 삭이지 못한 생선장수가 마루 밑에서 위쪽을 바라보니 마룻장 옹이 틈새로 과부의 옥문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생선장수는 옹이를 통해 양물을 과부의 몸 안으로 힘차게 밀어 넣었다. 평소 얌전하기로 이름난 과부였지만 허리가 꼬이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과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쳐 앉았다 야단법석이었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들고 앞으로 조금 일어나 시아버지 입에 넣어드리고는 다시 앉고, 다시 반찬을 집어 시아버지 수저 위에 올려놓으려 주춤거리다 다시 내려앉고는 했다. 며느리의 얼굴이 점점 홍조를 띠는 것이 평소와 달라 수상했다. 시아버지는 도대체 며느리가 앉은 자리에 무슨 물건이 있기에 저토록 몸을 꼬며 안절부절 못할까 궁금해졌다. 생각 끝에 며느리에게 숭늉 심부름을 시켰다. 시아버지는 침침한 노안을 크게 뜨고 며느리가 앉았던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거기에는 제법 큼직한 꼴뚜기 한 마리가 있었다. 평생 산중에서만 살아온 노인이라 해물이라면 무조건 귀하게 여기던 터였다. 침을 꼴깍 삼키며 젓가락을 든 손을 멀리 뻗었다. 그 귀한 물건은 잡으면 미끄러지고, 또 잡으면 미끄러지고, 그러기를 몇 번 거듭했다. 마침내 그 꼴뚜기라는 놈을 잡기는 잡았는데 젓가락이 꼭 물자 대번에 젖빛 물을 왈칵 내뿜었다. “아깝게도 썩은 꼴뚜기로다!” |
방금 읽은 양반들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시아버지의 눈길은 바로 홀아비 양반의 눈길이다. ‘복 있는 과부는 앉아도 요강 꼭지에 앉는다’는 말이 있듯 불쌍한 며느리가 모처럼 성욕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섭섭하지 않은 일이었다. 며느리의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생선장수요, 그는 떠돌이라서 그들 남녀의 만남은 일단 일회적이다.
남성에 굶주린 며느리로서는 상대방의 인격·가문·능력 따위를 검토할 필요도, 겨를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의 성적 능력뿐이다. 생선장수와 며느리의 성교는 뜻밖에 시아버지가 출현함으로써 일시 중단된다. 그러나 젊은 그들은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그야말로 대담무쌍하게 성애를 실천에 옮긴다.
시아버지를 바로 코앞에 모셔두고도 과부는 핑계를 만들어 성행위를 계속한다. 과부의 억제된 성욕이 일단 배출구를 발견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양반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노회한 시아버지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결정적 순간 며느리는 재차 성교 중단의 위기에 몰린다. 생선장수는 시아버지에게 현장을 들킨 채 맥없이 시든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부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지만, 며느리의 부정을 마지막 순간에 저지한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여성성기의 속어) 본 벙어리요, ×(남성성기의 속어) 본 과부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시아버지는 마치 며느리의 그런 심정을 이해했던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양반들이 펼쳤을 또 다른 담론의 줄기가 엿보인다. 첫째, 과부인 며느리에게 절대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양반들의 공론이다. 따지고 보면 며느리가 혼자 있을 때 생선장수가 집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때 집안에 감시자가 있었더라면 또는 생선장수 같은 잡인이 여성의 거주공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조치해 놓았더라면 불상사는 예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상류사회에서는 남녀가 공간적으로 철저히 격리됐다.
둘째, 여성의 성적 욕망이 발동하면 사실상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걱정이다. 제 아무리 착한 며느리라도 남성의 살맛을 다시 보는 순간 시아버지를 속이려 드는 데 끝이 없다. 마지막 순간 시아버지가 긴급조치를 취했기에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생선장수는 며느리의 몸 안에 씨앗을 뿌려놓을 뻔했다.
달리 말해 양반들의 눈에 비친 과부의 욕망은 위험천만했다. 그것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 둬야 할 것이었다. 갓 쓴 양반들의 이런 생각은 여성 전반 특히 과부에 대한 철두철미한 사회적 감시와 외부세계로부터의 격리로 구체화될 가능성을 내포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은 물론이요, 여성은 제 아무리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라도 남성과 단둘이, 그것도 방문을 닫은 상태에서 만나면 큰 흉이 됐다.
한국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의 강도가 시대에 따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도 여성들은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었다. 양반 가문의 여성도 남편이 죽고 3년만 지나면 당당하게 재혼했고, 족보에 첫째남편, 둘째남편의 이름을 모두 싣는 것이 보통이었다.
태종 11년(1411) 윤12월1일자 실록을 보면 사헌부가 재상 조견에게 벌을 주자고 상소하는데, 미망인 표씨에게 재혼을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건의 내막을 좀 더 살펴보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남자 납치해 성욕 해결
“과부 표씨는 판서(判書) 표덕린의 딸로 본래 오건의 아내였다.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마침 박지란 중견관리가 조견에게 중매할 뜻을 밝히자 표씨는 찬성했다. 드디어 결혼식 날 밤이 됐다. 표씨는 신랑이 짐작했던 것보다 무척 늙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즉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는 사헌부에 거짓으로 호소해 조견이 자기에게 결혼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표씨를 비방했으나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과부 표씨는 정력이 왕성한 수원부사(水原府使) 조계생과 재혼했다. 과부 표씨는 벼슬이 훨씬 높은 조견보다 힘센 조계생을 선택했다.”
우리 속담에도 ‘청상과부는 수절해도 30대 과부는 수절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성생활에 익숙해진 뒤에는 홀로 지내기가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세상 인심이 표씨를 비방했을지 몰라도 재혼까지는 막지 못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15세기는 그래도 숨통이 트인 세상이었다. 조선 초기에 미망인들의 개가를 가로막는 법이 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16세기쯤 돼서야 그 법이 양반 여성들을 본격적으로 구속한다.
조선의 미망인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일탈행위를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데리고 사는 여종과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고, 좀 더 대담한 미망인들도 있었다. 성종 때 성구연이라는 양반의 딸 성철종이 미망인이 되자 사내종 막동과 정을 통한 뒤 함께 다른 고장으로 도망가 살림을 차렸다.
이 밖에 미망인들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비구들과 연달아 정을 통해 임신하고 낙태까지 하는 등 갖가지 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미망인들이 승적(僧籍)을 얻어 두고 마음껏 음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재가할 수 없어 합법적으로는 욕망을 해결할 방도가 없던 서울의 미망인들은 계를 만들어 당시 서울의 큰길인 운종가(雲從街)를 지나는 서생(書生)들을 무작정 납치해 벽장에 며칠씩 숨겨 뒀다 곗날이 돌아오면 모여 추첨을 했다. 당첨된 미망인은 벽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서생과 운우의 정을 나눴다.
이런 풍습은 비교적 나이 든 평민 미망인들이 조직한 백상계(白孀契)에서 시작됐다. 나중에는 양반 가문의 젊은 미망인들도 이를 본떠 청상계(靑孀契)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망인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미혼 남성을 납치해다 성폭행을 가했다.
비록 한때의 풍습이었고 그나마 야담으로 전할 뿐인 이야기지만, 성적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자유로운 성관계를 위해 기혼여성들이 청운계(靑雲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파트너를 대면하고 보니 자기 남편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 대도시에서만 여성 전용 카페가 운영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정말 드물었다. 여성의 재혼은 금지된 상태였고, 예외가 있었다고 해도 이른바 과부 보쌈에 지나지 않았다. 보쌈이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홀아비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고 미망인을 업어다 함께 사는 것이었다. 더러는 미리 미망인의 의향을 타진한 뒤 형식적으로만 보쌈을 한 경우도 있었다.
어쨌거나 보쌈질은 일종의 야합이었고, 그것도 미망인의 처지를 동정한 것이 아닌 가난한 홀아비의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제도였다.
“부디 오늘밤은 저와 동무해 주무시라”
미망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경우나 미망인이 재혼 후 출산한 자녀에게는 치명적으로 불리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후자에 속한다. 그의 어머니 한씨는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어 홀로 살다 늙은 홀아비 최옥과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거의 보쌈 수준이라서 한씨는 정처(正妻)로 인정받지 못했고, 한씨가 낳은 아들은 서자 취급을 받았다.
혼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홀아비가 보쌈하면 미망인이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끌려가던 미망인이 닥치는 대로 입으로 무는 경우가 있어 등을 돌려 업기도 했다.
미망인의 뜻을 꺾기 위해 매로 때리거나 인두로 지지는 등 악형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고 성폭행도 비교적 자주 발생했다. 심지어 미망인이 다시 돌아가기도 했고, 드물게는 강탈해온 미망인을 제3자가 다시 탈취해 가는 소동도 일어났다.
순조 22년(1822) 10월21일자 실록을 보면 박씨라고 하는 양반가의 청상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이웃에 살던 김조술(金祖述)이라는 양반이 박씨에게 마음을 두고 괴롭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몸을 깨끗이 하였다’”고 했다.
보쌈을 하려다 실패한 경우로 보이는데, 조정에서는 박씨에게 열녀문을 하사했다. 이처럼 보쌈에 얽힌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 편이어서 양반들도 그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갓 쓴 양반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느 마을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비가 있었다. 큰딸이 막 이팔청춘을 넘긴 터여서 사실상 밥짓는 일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밤이면 너무 외로워 홀아비는 과부를 업어오기로 작정했다. 마침 아랫마을에 젊고 예쁜 과부가 있었다. 과부를 업어 간다는 소문이 많은 편이어서 과부는 밤마다 부엌칼을 베개 밑에 놓고 자다 사내들이 들어오면 칼을 꺼내 휘둘렀다. 때로는 고추 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들어오는 사내들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사내들은 눈도 못 뜬 채 연방 재채기만 하다 슬그머니 줄행랑을 놓고는 했다. 매번 방비를 제대로 했지만 과부로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데다 장래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마침 과부의 친정은 가난해 스무 살이 되었는데도 장가를 가지 못한 남동생이 있었다. 과부는 남동생을 데려다 자기 옷을 입게 하고 머리까지 곱게 단장시켜 자기 방에 거처하게 해 놓고는 친정으로 몰래 가버렸다. 문제의 홀아비는 그 과부를 업어오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멍청하지만 힘만큼은 센 장정 몇을 불러 술을 사주며 보쌈을 부탁했다. 그들은 과부의 방에 침입해 큰 자루에 과부를 담아왔다. 홀아비는 군침을 흘리며 동침을 요구했으나 자루 속의 과부는 사납게 발길질을 해댔다. 홀아비는 아마 첫날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과년한 큰딸을 불러 업혀온 ‘어머니’와 함께 자라고 명했다. 딸은 자루 속 과부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부디 오늘밤은 저와 동무해 주무시라”고 했다. 나이 스물이 넘게 장가를 못 간 사내이고 보니 총각은 다 큰 처녀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한바탕 일을 벌였다. 이튿날 아침 붙들려온 과부는 상투를 틀었다. 여지없이 큰일을 당한 큰딸은 혼자 엉엉 울었다. 놀란 아버지가 까닭을 묻자 간밤에 벌어진 일을 그대로 고했다. 화가 상투 끝까지 치밀어 오른 홀아비는 딸 방으로 뛰어들며 “네놈은 누구냐”며 악을 썼다. “저 말인가요? 어젯밤 업혀온 사위올시다.” |
참으로 고약한 대답이었다. 늙은 홀아비가 재미를 보려고 보쌈을 시도했다 도리어 가난한 총각에게 딸을 빼앗기게 됐다는 얘기다. 그는 이미 장성한 딸이 있어 가사노동에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도 굳이 보쌈을 시도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젊은 미망인을 노린 것이 그만 화근으로 작용한 셈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 미망인이 갖가지 수단을 써서 보쌈에 저항했다는 점이다. 미망인이 개가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망인은 가난하게 살기보다 차라리 수절을 원했다. 그런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할 양반이 미망인의 뜻을 꺾는 데 경쟁을 벌이다시피 했으므로 손해를 봐도 당연하다는 뜻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선 성리학계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에게도 일찍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가 있었다. 이황의 맏아들은 단 한 명의 자식도 두지 못하고 요절했는데, 미망인이 된 며느리는 우연히 9대 독자의 외딸이었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친정으로 향했다
어느 날 이황은 며느리를 불러놓고 말했다.
“너는 9대 독자의 딸인데 내 집에 시집와 불행히 이리 됐구나. 너희 친정 집안은 이제 자손이 영영 끊어지게 되어 애석하기 그지없다. 어서 친정으로 돌아가 부디 부모님의 뜻을 받들라.”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친정으로 향했다. 긴 세월이 지난 뒤 이황은 단성이라는 곳을 여행하다 해가 저물어 어느 양반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주인의 대접이 매우 후했다. 모든 음식이 한결같이 입맛에 맞았는데, 특히 간장 맛이 이황 본가의 맛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이황은 그 댁 며느리의 가문을 확인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황이 친정으로 되돌려보낸 그 며느리의 솜씨였다. 그녀는 새로 시집와 아들 딸을 여럿 낳아 잘 살고 있었다. 이황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서둘러 주인과 작별인사를 나눈 다음 여행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며느리 역시 옛 시아버지에게 인사말 한 마디 올리지 못했다.
양반들은 미망인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편에 서기보다 도리어 감시하고 옥죄었다. 그러나 이황 같은 큰선비는 적당히 핑계를 대가며 며느리에게 재혼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 이황 역시 우연히 다시 들른 옛 며느리의 집에서 옛일을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모두에게 무서운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