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현 조선인 노동자 집단학살
우리는 흔히 일제(日帝)의 조선인 노동자 징용이 태평양전쟁 시기에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국권침탈과 더불어 일제는 값싸고 질좋은 노동력을 구하고자 조선의 많은 청장년을 각종 공사현장으로 끌고 갔다. 물론 처음부터 징용령 같은 인력수탈 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나 친일지주들에게 땅을 배앗긴 농민들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속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대부분이 농토를 잃은 소작인이거나 이농 유랑민, 도시의 실업자들이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는 해마다 늘어났다. 1913년도에 3600명이던 재일거류민은 18년에 2만 2천명, 23년에 8만 6백명으로 증가하고 28년에 24만 3천명이던 거류민수가 33년에는 42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 33년 6월말 현재 42만 6천명이던 재일거류민 중 33.1%인 14만 3천명이던 거류민수가 33년에는 42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 나머지 10만의 고정직 노무자는 직공이거나 고용인이고 광산노무자가 세번째로 많았다. 이들에 대한 보수는 일본인 노무자의 70% 이하 정도였으며 반액 미만일 경우도 허다했다. 동포들은 이처럼 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2년 8월에 크게 물의를 빚은 나카타현의 조선인 노동자 집단학살 사건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질러졌다.
1922년 초부터 시나노가와[信濃川]의 급류를 타고 흘러내리는 조선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한두 구의 시체가 흘러내리다가 차츰 여러 구의 표류시체가 발견되고 이것이 일본의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사회문제가 되었다. 표류시체들은 시나노카와 댐 건설 공사장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본인 현장 공사 감독들에 의해 구타당해 죽은 시신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런 끔찍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당시 도쿄 등지에 거류하던 아나키스트 박열(朴烈)이 주도한 흑도회(黑道會) 간부들은 조사단을 구성하고 현장조사에 착수하여 일제의 참혹한 조선인 학살 만행을 폭로했다. 시나노가와 댐 공사장은 인가에서 30리, 철도 연변에서 1백리 이상 떨어진 외딴 공사장으로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작업에 동원된 이래 '지옥의 계곡'이라 불리게 되었다. 산을 뚫고 산봉우리를 깎아서 댐을 만들어 발전량 30만 킬로와트의 동양 최대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댐 공사에 필요한 인부들을 일제는 주로 경남 일대에서 모집해갔다. 왕복 여비는 고용주가 부담하고 하루 8시간 노동제로 월 2일의 유급휴가와 고액의 임금을 준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많은 조선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800여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이 댐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하루 14~15시간의 힘든 노동을 시킨 뒤 '한바'라 불리는 감옥과 같은 노무자 합숙소에 가둬놓고 저임금에 강제노역을 시켰다. 한바는 일제가 메이지시대 초기 북해도 개척을 시작한 이래 계속되고 있는 일본 특유의 합숙소였다. 당초 북해도의 반란군을 정벌한 메이지 정권이 이 죄수들을 철도공사에 동원하면서 죄수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옥을 방불케 하는 특이한 구조로 합숙소를 지은 것이 한바의 유래였다. 시나노가와 댐 공사에는 한바를 그대로 살려 합숙소라는 이름의 감옥을 만들어 조선 노무자들을 수용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살상을 밥먹듯이 저질렀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새벽에 현장으로 끌려나가 가장 위험한 공사에 동원되고 그나마 2~3중의 하청조에 임금의 태반을 배앗겼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하청조의 두목들이 권총으로 살해하거나 붙잡아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밀양 출신의 김갑철(金甲喆)은 19세의 소년 노무자였는데 도망가다 붙잡혀서 하청조 책임자가 하역할 때 쓰는 쇠갈고리로 맨살 10여군데를 찍혀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나체(裸體)로 만들어 눈구덩이 속에 무려 3시간을 방치해 두었다. 우윤성(禹允成) 등 3인도 도망치다 붙잡혀 발가벗긴 채 벽돌을 찍는 틀속에 집어넣은 후 물과 모래, 시멘트를 섞어 굳어지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시멘트가 점차 굳어지면서 돌과 모래가 살속으로 파고드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면 강물에 던지거나 공사장에 매장시켰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한 숫자조차 모른다. 그러나 박열과 김약수 등 흑도회 간부의 진상조사에 다르면 1백명 이상 사망하고 적지 않은 수가 억류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흑도회는 도쿄와 오사카 등에서 연설회를 갖고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규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연사로 나서지 못하도록 하고 조선인 6명, 일본인 2명의 연사를 구속하여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일본의 내무성과 조선총독부도 사실을 은폐하고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채 정확한 진상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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