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스크랩] 모 연예인 관련설 구원파. 권신찬,유병언,이요한,박옥수 계열

참빛7 2014. 8. 15. 20:09

지금 모 유명 연예인 관련설이 떠돌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 DAUM과 아고라는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거의 네이버는 댓글 폭탄 상태... 20여년에 가까운 공든 탑도 하루 아침에 무너진다는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권신찬-유병언 계열이 아니더라도....

권신찬-이요한 계열이나 권신찬-박옥수 계열이 있음을 주의하셔서 


만에 하나, 자의든 타의든 어떠한 이유에서건 소속되어 있거나, 관련된 분들이 계시다면 

각자가 알아서... 잘 알아서.... 판단하시고, 잘 선택하시길...


연예인 분들이야 당연히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하신 분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지인들의 소개로 가셨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그들의 말에 설득 당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이런 것에 속해 있거나, 이런 것에 빠져드는 것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책임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사회적 파급력이 어느 정도로 큰 영향을 주는지, 연예인 분들 한 분 한 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계실거라 봅니다.


왜 수 많은 종교가 그렇게도 연예인들을 선호하는지 잘 생각하셔야만 합니다. 

연예인들은 그 존재 자체로 해당 종교의 엄청난 홍보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종교란 그런 것(연예인들의 네이밍벨류)을 활용하는 것과는 아예 거리가 멀어야만 합니다.

그냥, 당위성이 아니라, 반드시 그러해야만 합니다.


만에 하나, 구원파 중에서 권신찬 - 유병언 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에 속해 있으시고, 

세월호 사건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구원파는 제 아무리 좋게 설명해 봐야 영지주의며, 위험한 구원론과, 신론 역시 양태론이며, 

종말론 역시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이고, 알레고리적 해석임을 스스로 잘 확인하시고,  

아무쪼록 잘 판단하시며, 스스로 잘 알아서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도무지 화가 나고 잘 이해가 안가신다면, 

아래 사이트로 들어가셔서 간단하게 정리된 내용들을 훝어보시고 

앞으로 더 큰 피해를 보지 않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 분의 팬들께서 알아서 잘 찾아보고 

그 연예인 한 분 한 분들께 직접 제공해야만 진정한 팬 정신이 아니음메??? 

그래야 그 스타 분의 직,간접적 피해를 줄이지..-_-^ 


너희 팬클럽 뭐하고 있쪄 

땟지할꺼야~~~~땟지땟지!!!




관련정보:


구원파(박옥수, 이요한, 권신찬) - 평이협 자료


구원파(박옥수, 이요한, 권신찬) - 세이연 자료



일부발췌

세 분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원파 분파현황

세칭 구원파는 크게 유병언(권신찬) 계열, 이요한(본명 이복칠) 계열, 박옥수 계열 등 3개 파로 분류할 수 있고, 윤방무(Peter Yoon), 서달석 등 유사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인사와 무리들이 다수 있다.

 

1) 유병언, 권신찬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오대양 사건과 ㈜세모, 녹색회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병언과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모든 구원파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권신찬(1923~1986)은 예장 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네델란드 자칭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길기수: Case Glass)의 영향으로 1961년 11월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아 목사면직을 받은 인물이다.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장인사위의 관계를 맺었다. 유병언은 박옥수와 함께 1960년대 초 외국인 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6개월간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으나 1963년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구축, 1969년부터 1981년까지는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71년 서울 약수동 성동교회에서 구원파의 교리에 미혹된 선교사 3명과 한국인 목사 2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1981년 11월부터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거듭남, 죄사함, 복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에 미혹된 미국국제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현 극동방송을 설립한 선교단체)는 유병언을 극동방송 부국장에 임명했고, 그의 장인 권신찬을 방송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권신찬은 1969년부터 1974년 극동방송국에서 쫓겨나기까지 <은혜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기존교회의 “예배행위, 십일조 헌금, 장로집사 제도, 새벽기도,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등을 종교로 규정하고 “종교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교했다. 정통교단은 그의 이단사상에 항의하여 극동방송 청취거부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팀선교회는 1974년 구원파 소속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였다.

 

권신찬은 사위 유병언을 “하나님의 입”이라며 신격화하였고, 교인들은 유병언을 ‘모세’에, 권신찬을 ‘아론’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병언은 교제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며 1974년 ‘삼우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인수,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하면서 교인들로부터 “사장”으로 추앙받았다. 1980년대에는 ㈜세모라는 이름으로 스쿠알렌, 컴퓨터, 조선, 유람선 등의 사업에 전념하였다. 오대양 사건과 연관되어 4년을 복역하고 나온 후에는 유 회장으로 통하고 있다.

유병언은 “우리는 천국의 스파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유병언은 자신을 ‘자선사업가, 새마을 운동가, 환경보호운동가, 권투프로모터’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위장술에 뛰어난 유병언은 1982년 자연보호운동을 기치로 내세우며 한국녹색회(회장 정윤재)라는 단체를 만들어 2002년부터는 경북 청송군 현서면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여 집단촌을 형성하여 환경친화적인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이른바 ‘청녹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송군민들은 “한국녹색회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송 외에도 유병언은 안성과 제주도에 농장을 운영하면서 폐쇄적인 집단생활을 유도하고 있다.

현재 유병언은 매주 토요일 안성농장에 있는 선교센터에서 주로 종말론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아들 유혁기에게 설교연습을 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건강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장세척 기기를 팔고 교인들에게 “인샤워, 인클린”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 이요한(이복칠)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은 중학교 졸업 후 6.25 동란 중 대구임시신학교에서 권신찬에게서 사사받은 것이 교육배경의 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파 초창기인 1960년대 중반부터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71년에 권신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전남 목포에서 ‘평신도복음전도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며 정통교회를 비판하고 시한부종말론을 설교하였다.

1974년말 유병언은 부도위기에 놓인 삼우트레이딩을 매입하여, 교인들의 헌금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이요한은 1983년 교회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사업으로부터 “복음을 수호한다”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요한은 유인물을 통해 유병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으며 귄신찬은 유병언을 옹호하고 나섬으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유병언 측에서는 이요한을 집단 구타해 대전에서 5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요한은 “교회와 사업은 분리되어야한다”는 성명을 내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설립하였다. 1995년에는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에 1천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여 서울중앙교회라는 간판아래 활동하고 있다. 


정통교회와 달리 일정한 예배형식이 없고 집회식으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씩 성경을 강해한다. 저녁에는 예배대신 교제를 나누면서 각 부서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 모여 교육도 받고 서로의 얘기를 나눈다. 1년에 4차례 “성경강연회”를 가지며 1년에 한 번은 공주에 있는 갈릴리수양관에서 전체수양회를 갖는다.

 

예배형식과 기도 등 정통교회를 흉내 내고 있으나 십일조와 기타 연보, 기도, 예배를 율법과 종교로 간주하던 그의 스승 권신찬의 근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 100여개의 지 교회를 두고 있으며 4만 명의 추종자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요한 계열은 금전적으로 무리해서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탈자들이 전하고 있는데, 수십억 공사를 하고 “은행융자의 원금은 갚지 않아도 된다. 주님 재림 때까지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자만 갚으면 된다”는 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고 한다.

정기간행물로 월간지 <생명의 빛>이 발행되고 있으며, 포교를 위해 진리의말씀출판사와 영생의말씀사를 운영하고 있다.

 

3)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기쁜소식선교회: IYF) 

박옥수는 경북 선산군에서 1944년 6월 출생하여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후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의 금오산 집회에서 감화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1962년 10월 7일, 내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진 것이 믿어진 그날,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눈처럼 희어졌다고 믿어진 그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저에게는 그날이 1962년 10월 7일 새벽이었습니다”라고 박옥수는 고백하고 있다.

그 후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합천 산골에서 훈련을 받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1968년 전역 후 김천에서 전도하기 시작, 딕욕 선교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대구 계명대 앞에서 중앙교회라는 간판아래 활동하다가 1980년대 말에 활동무대를 대전으로 옮겨 한밭중앙교회를 담임하다가 2005년 서울 서초동 양재동에 있는 기쁜소식강남교회를 중심으로 IYF와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4ㆍ19 혁명 직후 딕욕 선교사는 대구로 와서 YWCA홀을 빌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도집회를 하면서 삼덕동에 있는 일식집 하나를 빌려 선교학교를 시작했는데 박옥수는 이 선교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 딕욕이 한국을 떠나면서 박옥수가 선교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고 한다.

1983년 기쁜소식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는데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 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세력과시를 하며 성경강연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쁜 소식>이라는 정기간행물이 있지만 MBC·SBS와 같은 방송은 물론 조선·중앙·동아일보와 같은 일간신문을 통해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있으며, 월간중앙·월간동아 등에서는 박옥수 목사를 영향력 있는 기독교지도자인 것처럼 대담기사를 게재한 적도 있다.

 

박옥수는 최근 국제청소년연합(IYF)이라는 묘한 단체를 만들어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침투하고 있다. 전 세계 35국에 지부와 회원을 두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영어말하기대회, 창조과학세미나, 영어교육, 컴퓨터교육, 연극교육, 자원봉사자모집, 사진전시회 등으로 교묘히 위장하여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2001년 초 사단법인으로 등록이 되었고, 특히 이들이 매년 주최하는 “IYF세계대회”는 MBC·조선일보·YTN 등 일반 주요 매스컴에 소개된 바 있다.

 

출처 : 경제
글쓴이 : skybluelov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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