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Logos) 화육 기독론의 새로운 이해
요한복음 17장 3절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참 구원을 받는 일 곧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는 일은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사망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길은 바로 온 우주와 만물을 있게 하신 참 하나님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아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구원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일 즉 관념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아는 일과 또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올바로 알려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일이란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올바른 신론과 기독론에 달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론과 기독론은 우리 기독교 신학의 중심 문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바로 아는 일은 구구단을 외우듯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난해한 일이어서, 오늘날까지도 탐구의 과제로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두 분 다 신비 지극한 영적 실재이며 동시에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달과 표현의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의 언어나 개념들로(여기에는 교리나 신조들도 포함된다) 파악하거나 기술하거나 표현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학의 어려움과 한계성이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의 기초이며 근거인 성경 말씀들을 통하여 계속 탁구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며 책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교회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기독론의 문제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해서, 그리고 그것도 조직신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성신학의 관점에서 말해보고자 한다.
고대 교회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두 갈래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따르는 예수 본받기 삶의 운동 곧 원시 교회(영성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진행되었고, 다른 하나는 성경말씀들 특히 50년대에 기록된 바울의 서신들이나 60년대 혹은 70년대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들 특히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이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3세기, 4세기, 5세기 까지 심각한 기독론 논쟁으로 번져나갔으며, 이로 인해서 많은 고결한 인격(영성)과 탁월한 지도력을 지닌 교회 지도자들이 이 기독론에 따른 이단시비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 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4절에 나오는 "로고스"(Logos)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그 "로고스"의 화육(incarnation)의 교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에서 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의 핵심인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monogenous)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요1:14)
여기서 가장 문제되는 표현의 핵심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것과 이 "말씀이 육신(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임했다는 말씀이다.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말씀(Logos)"은 곧 이 세상에 탄생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본래 하나님 혹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이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God became man)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장했던 "화육 기독론"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점은 사도 요한이 로고스 화육 기독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묘한)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로고스 기독론을 진술함에 있어서 만물의 창조사역에 수단(도구)으로 사용된 신적 존재인 로고스(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의 예수의 원형)와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해서, 로고스의 신성을 나타내는 "Theos"(하나님)란 단어 앞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낼 때 반드시 부치는 "정관사"(to Theos의 "to")를 부치지 않고 다만 정관사 없이 "Theos"라는 단어만을 상용함으로써 양자(아버지와 아들)를 구별하는 술기를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요한 보다 약 40여 년 전에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요한과는 아주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하고, 그의 복음사역 특히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신비(능력)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인정)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바울의 이러한 예수 이해는 안디옥 교회를 중심한 기독론의 핵심 점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양자설"(Adoptionism)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로써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인 “화육 기독론”과 함께 양대 기독론의 핵심을 이루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의 관심은 과거의 기독론 즉 교리적 논쟁 속의 예수에 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예수 그리스도 즉 사람들의 삶의 한 복판에 있는 예수 곧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그들을 섬기시는 생생한 "역사적 예수"에 더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영성신학적 관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인가? 영성신학적 견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와 모든 사람들(전 인류)을 구원(참 평화와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질(참모습)과 뜻(마음)을 온전히 전하고 알려주신 완전한 영적 스승 곧 참 진리의 사람, 참 사랑과 평화의 사람 그리고 완전한 지혜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참 구원자며 동시에 완전한 스승/현자(賢者)로 표현할 수 있다. 그 근거는 바로 그가 보여준 만인을 섬기는 겸손한 삶과 자기를 전적으로/완전히 포기한 증표인 십자가의 부활의 사건이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 지도자가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포기하고 또한 완전한 영적 존재(생명)로 부활하여 우리의 삶의 한 복판(내면속)으로 찾아오는 분이 있던가? 그리고 각 개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절대 평화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 실현의 길을 알려준 참 스승 곧 영적 지도자가 있던가?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지혜인 "로고스"의 화육자라고 표현한 말의 근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지혜가 아닌 초월적인 지혜 곧 "신적인 지혜"(divine wisdom)의 화신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신적 지혜의 사람 곧 완전한 지혜의 사람 즉 "완전한 현자"(賢者)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로고스"란 말은 "말씀"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진리, 이성, 도(道), 그리고 특히 초월적인 지혜 곧 신적 지혜인 "누스" 혹은 “그노시스”(gnosis)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인 로고스(logos)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전적인 로고스 화육 기독론은 실제로는(영성신학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가 육화된(사람이 된) "지혜 기독론"(Wisdom Christology)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단서를 구약의 <잠언서>에서 얻을 수 있다. 지혜의 사람 솔로몬 왕의 기록으로 알려진 주전 천년 경에 쓰여 진 잠언서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지혜"로써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로고스"란 말 때신 "지혜"란 말이 쓰여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잠언8:22-36>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 에라
.............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대저 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위의 잠언서 8장의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원리로 사용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지혜"(호크마/쏘피아/싸피엔치아)라는 점을 말씀하고 있다. 이 “지혜”란 말을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적용하면, "태초에 참 지혜가 계시니라, 이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이 지혜는 곧 하나님의 지혜 즉 초월적인 신령한 지혜이니라." “이 초월적인 신령한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을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아무렇게나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신비한 지혜를 통해서 질서정연하고 심히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우주만물 즉 창조세계(자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로 충만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화신(化身) 즉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한 분으로써 전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참 스승 곧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지혜자” 곧 “완전한 현자”(賢者)란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의 화신(화육자)인 "완전한 지혜자"(현자)로 이해할 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전통적인 화육 기독론이나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독생자)이란 전통적인 기독론 보다 지혜를 최고 가치로 존중하는 유불선(儒彿仙)과 같은 동양종교 전통 문화권인 우리 한국 사회에서 더 잘 이해되고 받아드리기 쉬운 친근한 기독론 그리하여 선교에 한 층 더 유리한 기독론이 될 수 있을 않을까?rkc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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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아몬트대 과정사상연구소 코리아 프로젝트 연구실장
출처..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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