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스크랩] 삼청산 성모바위와 고대 동방기독교 경교역사

참빛7 2014. 2. 21. 15:49

삼청산에서 발견한 성모바위 내눈에만 그리보이는지 모르지만 안개낀 삼청산에서 정신없이 사진기셔터를 누르다 뒤를 돌아다보자 인자하게 미소 지으시는 성모바위가 날 반겨주셨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서구에서 건너온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컴프랙스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배척하거나 무시하기도 하며 마찰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동양에서의 고대 기독교 경교역사를 조사해보았다. 지금까지 중국대륙의 역사는 도교.불교만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중국대륙에 동일시대에 전파 번창한 기독교역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마다 충만하여 집집마다 큰 복이 번성하였다 라고 고대 동방기독교는 전하고있다

고대 로마나 유럽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번창하던 경교의 역사기록인것이다. 파사교(페르시아교회)-대진교(로마교회)-야리가온(복된자)-밀교로 이어지는 고대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조상들의 열악한 환경속의 신앙생활을 생각하게하며 현재의 편안한 신앙생활이 가능한 우리들을 반성게한다.

 고대 동방기독교 경교의 관련역사

아시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Nestorius학파 일명 경교(Nestorianism)의 역사에 관한여 돌아보면 400년경 광개토대왕이후 동북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 장수왕시절 428년 콘스탄티노폴 Constantinople 대주교이던 네스트로리우스 Nestrorius(381-451)는 당대 경쟁자인 카릴로스 Cril 의 제소로 430년 로마대회에서 종교관적 해석이 그리스도의 이인격설과 마리아의 신모설을 (성모마리아는 에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지만 신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비성모설을 주장) 반대한다는 이유로 대립하게되자 교황 게레스티누스는 그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431년 동로마 황제 태오도시우스2세 서로마 발랜티니아누스 교황의 특사를 맟이하여 Nestorius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주교단과 교황 첼레스티노1세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않고 에페소스 주교 엠논의 지지를받는 Nestorius의 반대파인 카릴로스가 그들이 도착전에 에패소스 공의회(Council oF Ephesos)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Nestorius의 교설은 이단으로 확정되고 그의 해임과 추방이 결정되었다. 에패소스 공의회는 사도신앙을 거듭 확인하여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 양성론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로마권력과 부를 가진 카릴로스 Cril의 아랙산드리아 Alexandria 교구세력에 중도입장인 아티오 Antio 학파도 이후 묵인으로 동조하였다 489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로마황제로부터 Nestorius학파는 로마 영토밖으로 이단으로 파문 추방되었다. 현재도 동방기독교는 이란에 밀교형태의 소수종교로 남아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 Constantinople 을 중심으로 그의 교설이 어느정도 인정되었으나 이미 로마교회와 단절되었으며 Nestorius학파는 시리아는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페르시아 에뎃사시에 작은 신학교를 세우고 동방의 전도사들을 양성했다. 당시 로마재국과 대립하던 패르시아(이란) 사산왕조는 로마교회에서 파면된 Nestorius학파 신인해줌으로 그 세력은 더욱 확장하여 498년Sauma 주교는 동방교회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Nestorius학파는 페르시아의 전통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마찰과 이슬람문명과의 충돌로 인도 및 중앙아시아로 그 거점을 옮겨가게 된다.

 서안 비림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형

 중국의 경교역사를 보면 618년 수나라가 2차례에 걸쳐 무리한 고구려침략으로 멸망하고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남만과 토번, 중앙아시아 등지를 평정하나 북방의 돌궐족과 잦은 충돌로 635년 당태종은 동돌궐을 위무하기 위하여 서방에서 건너온 Nestorianism 파기경교(패르시아 기독교) 선교사 아라본(Alopen)등 12명을 후하게 맟이하고 장안성(서안)에 파사사를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패르시아종교로 오인하여 파사교로 불렀으나 이후 로마가 원류임을 알고 (대진국=로마) 로마교회라는 의미로 대진교 대진사로 바뀌어 불럿다.

 

아라본선교사는 대진사에서 유일신이 천지를 창조함을 강조하는 경교성서를 번역하고 전도하였고 이후 광명한 종교라 하여 경교라 불리었다. 당태종은 동돌궐과 기독교문화의 도입으로 동돌궐과 친교이후 서돌궐을 침략하여 복속하고 동돌궐마저 굴복하게 한뒤 마지막으로 서편의 최강자마져 꺽어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을 이루기 위해 645년 당태종은 친히 30만정병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략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와 사망한다. 668년 고구려는 영웅인 대막리지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으로 자멸한다. 당고종은 아라본선교사에게 진국대법주라는 관직을 주고 10도와 385주에 경교사원을 설치하게 하였며 고대 기독교는 번창한다.

인도고승  달마가 중국으로와 백마사를 창건하고 측천무후를 불교도로 개종시킨후 당태종의 며느리인 측천무후가 집권하여 분열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용문석굴의 불상을 만드는등 국가적인 지원으로 불교가 잠시 융성하고 경교에 대한 당황실의 지원도 잠시 주춤하지만 755년 당현종이 양귀비에 미쳐 나라를 10명의 병마절도사들에게 마끼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것을 구실로 3도병마절도사인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성을 함락시키는등 8년간의 전란중 757년 숙종때 경교도인 이사가 병마절도사 안사의난 진압에 큰공을 새웠으며 이후 대종때에도 이사가 토번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큰공헌을 하여 당황실로부터 더욱 보호를 받으며 크게 융성하였다. 781년 승려 경정이 경교비(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새웠고 백제계 일본천황인 성무천황때 당나라인 황보와 경교선교사 밀리스를 동반하여 천황을 알연하는등 기록이 전하며 신라 발해등 경교가 아시아전역에 전파되어 고대 동방기독교 경교는 그 절정으로 번창한다.

 

하지만 845년 중국의 고유종교인 도교신자인 당무종은 불교와 경교의 외세종교에 대한 견제인 종교금지정책인 회창금교정책으로 모든종교사원이 패쇄되었고 635년부터 210년역사의 경교도 사라져 밀교의 형태로 전해진다. 당시 탄압으로 경교승은 600-700명이 환속되었고 경교도는 40,000-70,000명이 개종하였다 879년 산동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인 황소의난으로 상대적으로 부유한 경교도인들 30,000명이 학살당하였으며 20만명정도 경교도는 붕괴되고 나머지 경교도인들도 도교나 불교로 유입되고 경교승려와 선교사들도 당나라 북부로 도망하여 유목민지역인 케레이트 나이만 웅그트족등을 개종시켜 전도하였고 후에 몽골에 흡수된다. 당나라의 피박속에 고대 경교는 대승불교에 편입되어 밀교형태로 전승되어진다.

신라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신라시대 고승으로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해초스님은 장안의 청룡사에서 수학하였는데 그 동문이 헤라스님이고 해라스님은 경교승이였으며 특히 해초스님이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인 돈황의 명사산 막고굴 유적지에는 경교 경전(경교삼위몽도찬)등 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무렵 일본 호법대사도 해초스님과 동문이였으며 함께 유학하며 해라승님에게 수학하였고 744년 도일하여 다카노산에 호법대사교회를 만들어 밀교형태로 일본 고대기독교를 이룬다. 그는 경교 Nestorianism의 성전의 도구를 일본으로 가져와 예배하였다.

실크로드 돈황 막고굴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신라 성덕왕때 승려 혜초가 인도 5국(五國) 부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이다.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을 여행하였다. 8세기 초에 씌여진 이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히며 또한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 4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13세기후반에 쓰여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록 의 동유기 그리고 14 세기 중반의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손꼽는데, 혜초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 밖에 해신 장보고대사를 소계한 일본 천태종 3대좌장인 앤님스님의 입당구법순래기등이 유명하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 (Paul Pelliot,1878~1945)가 간수성 돈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던 왕원록에게서 구매 7,000점의 유물 중에 섞여 있었으며,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나라 고승 현장 이외의 당나라 승려로 여겨지다가 당시의 일본 서본원사의 승려이자 돈황학자인 오타니가 신라승 혜초의 것임을 밝혀내었다. 이 막고굴에서 경교의 성서(경교삼위몽도찬)도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에서 발견되는 기도교관련 유물들은 경교승들과 함께 수학한 해초가 경교를 신라로 가지고 들어온 결과로 생각되어진다.

경주귀족묘에서 출토된 성모와 아기애수상

 

고대 경교(밀교)는 극동불교에 영향을 큰미쳐 십자가 및 만자형 십자가를 숭경하고 불교의 삼보사상 부처.불도.불전 (메시아=경전,신도=경중,경교회=경문)과 아미타불 Amiitabha .미륵불 사상을 낳았으며 그것은 유태교의 영향을 미친 Zoroaster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숭배의 원류가 영향을 끼친것이며 북경 근교에 당나라 경교사원인 십자사 비석이 남아있는데 몽골의 원나라때 십자사가 다시 중건되었다고 기록되어져있다.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의 발해국에서도 솔빈부의 아브리코스절의 십자가출토 되었고 말갈족인 여진족과 발해유민의 국가인 금나라는 1,115년 신라왕손인 김함보의 8대손인 완안부 추장 애신각라 아골타에 의해 건국되고 금나라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1,125년 멸망시키고 중국대륙으로 진출 중국대륙 중북부을 정령한다 1,153년 금나라 해릉왕 완안량(모후 발해계 대씨)은 수도를 중국대륙 요나라 연운16주 남경이던 북경으로 천도하고 발해귀족들이 대거 이주하여 집권한다. 금나라 세종(모후는 발해계 이씨) 1,177년 산서성역사출신 봉상부로병마도총관판관 마경상(습례길사)는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몽골초원 소수민족들에 밀교형태로 전해지던 경교를 인정하나 몽골과 전투중 사망하며 금나라 성군인 세종은 국경의 경교집단을 몽골과 대치하는 조건으로 인정함으로 산서성 북쪽의 투르크계 웅그트인들 지역에서 경교가 잠시 부흥하였고 그들은 이후 좀더 서양문물과 신앙에 자유로운 몽골편으로 기울면서 만리장성을 지키던 웅그트의 알라쿠시 디킨은 몽골의 징기스칸군에 이 지역을 통해 중국대륙으로 들어가는길을 열어줌으로서 1,234년 금나라는 징기스칸 몽골군의 침략으로 1,234년 멸망하고 1,271년 쿠빌라이칸은 중국대륙에 몽골족의 대원제국이 건국하고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현재도 중국은 위대한 금나라역사인 금사를 철처하게 감추고 은패하고 있다.

신라 귀족묘에서 출토된 동십자가

 

몽골제국인 대원제국은 중국북서부와 실크로드의 웅그트등 소민족들에게 전파되어있던 경교를 Arkaun (한어-야리가온=몽골어 아르카훈) 복음을 섬기는자라고 하며 추종하는자가 많았으나 1275년 쿠빌라이칸의 원나라때 색목인을 우대하고 그들의 원류종교인 고대 동방기독교를 우대하였으며 북경 경교사원인 십자사의 수도사였던 귀마와 동승주사람 馬忽思가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바그다드에 들렀을때 당시 경교의 총주교인 아브라함 3세가 馬忽思를 북경주교로 임명하고 귀마를 순회감독으로 동방에 파견하였으나 중앙아시아의 전쟁으로 귀국이 지연되고 총주교 아브라함 3세가 급사하자 馬忽思가 총주교로 피선되어 아팔 아나아 3세로 봉해지고 1287년 귀마는 영국,프랑스과 교황을 방문하여 경교국가인 원나라를 소개하고 1289년 교황 니콜라이 4세는 프랜시스칸수도사인 이탈리아 사람 요한 몬테코르비노를 교황청사절로 임명하여 원나라로 보낸다 1294년 몬테코르비노는 북경에서 도착하여 원정부의 접대를 받았으며 태무르 울지추칸 원성종은 직접 그를 접견하고 원나라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수있도록 허락하였으며 천주교당을 열게 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정책을 좌지우지하던 환관들은 상당수가 고려인들이였으며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고려여인 기황후는 제2황후로 황자 아이유시리다리의 모후이며 1340년부터 1368년까지 원나라의 실권자이기도 하였다.

몽골초원 북원의 카라코람의 사원

 

1368년 주원장이 몽골족의 대원제국을 다시 몽골초원 북원의 카라코람으로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장악하자 경교역시 많이 쇄약하였으며 밀교형태로 대승불교안으로 편입되었다 명나라는 이후 서구의 로마캐톨릭과의 교류로 경교는 사라지게 되었고 1601년 명나라 북경교구의 애수교회신부회 마태오리치신부가 들어가 활동할때 천주실의에서 그는 중국인중 일부는 사성 십자가를 그리나 그 의미를 알지못한다라고 적었으며 1625년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마다 충만하여 집집마다 큰 복이 번성하엿다”(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라는 635년부터 781년까지 경교역사의 기록인 선교내력과 현황이 734자의 시리아어와 중국어로 적힌 경교비(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서안부 제령에서 발견함으로써 당시경교가 융성했음을 알수있으며 경교의 실체가 확인되게 되었다.

 

1907년 덴마크인 고고학자(도굴범) 홀이 실크로드 돈황의 막고굴에서 경교경전(경교삼위몽도찬)을 반출하려다 적발되어 원본은 현재 서안의 비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1928년 남만주의 안산에서도 고구려시대 경교도의 분묘와 7개의 와재 십자가와 동방박사 아기애수경배도가 조각된 바위등이 발견되었다 당시 경교는 신라에도 전파되어 1956년 경주 불교구사와 안압지에서 석재 동재 십자가 및 마리아관음상등이 출토되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중이고 해남 대흥사에서는 동십자가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들은 경교의 전래를 전해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기도한다 기독교동점사의 권위자인 고든여사는 우리나라의 경교전래를 밝히기위한 연구기념으로 1917년 금강산 장안사 부근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새웠는데 후에 김양선목사가 탁본하여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였다.

 

중국에서의 고대기독교 경교는 유일신과 천지창조를 중시하며 중국의 불교선교방식인 중국토착화에 충실하였으며 박해후 밀교형테로 불교로 편입되었고 경교는 극동의 대승불교 발전에 큰 영양을 주지만 외세의 강력한지원이 없던 경교는 선교에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워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근대 중국과 아시아에 기독교가 서구열강에 의하여 강제로 손쉽게 전파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심리적저항을 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바 기독교의 뿌리가 중국과 아시아에서도 불교처럼 오래되었다는 고증은 서구열강의 강제로로 인한 선교의 한계를 극복할수있는 좋은 사료가 될수있다고 사려된다. 다행인것은 우리민족은 잃어버린 고대기독교를 200여년전 다시 우리손으로 스스로 찿야 돌아온 세게에서 유일한 민족이란 점일것이다.

 

출처 : 삼청산
글쓴이 : 손오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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