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돌궐(突厥,551년-747년) 또는 괵튀르크(Göktürk)는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다. 돌궐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이며, ‘주서(周書)’ 이역(異域) 돌궐(突厥) 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며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557년의 영토는 6,000,000km²이다. 괵튀르크는 하늘의 튀르크 혹은 천상의 튀르크라는 의미이다.
[편집] 개요
당시 강자로 군림하던 유목 제국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만주 지방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세력 확장을 펼쳤다. 그러나 동, 서로 분열되어 동돌궐은 당에 복속하게 되었고, 서돌궐은 이슬람화 되었는데 그 중 오구즈 투르크멘 부족이 셀주크 제국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1299년 튀르크 족은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와의 대외 관계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다가 수의 통일 후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인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 돌궐은 당의 고구려 원정에 동참하며 다시 한번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편집] 기원
[편집] 중국과의 관계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중국이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589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을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북방의 강자 유연을 멸망시킨 새로운 패자 돌궐은, 중국과 대립관계가 된다.
7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을때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어서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써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은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고, 돌궐의 키엘리 카안(頡利 可汗, Kieli Kağan, Hieli Kağan, İliğ Kağan)은 당나라에 신속하면서 당과 돌궐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한다.
중국과 돌궐의 관계를 보면 주도권 관계가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분열되면 중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중국에 복속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중원 왕조는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다.
[편집] 같이 보기
<투르크 족>
터키인은 터키에 거주하는 투르크계 민족이며 자신은 "조상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자칭한다.
[편집] 터키인의 분포
[편집] 터키인의 역사
[편집] 터키인의 언어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터키어를 사용한다. 터키 동부 지방에는 쿠르드인들과 함께 쿠르드어를 쓰는 터키인들도 있다. 남동부, 시리아 국경 지방에는 가끔 아랍어를 사용하는 터키인들도 살고 있다.
[편집] 터키인이 믿는 종교
98%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며 시아파를 믿는 사람도 있다. 나머지 2%는 개신교 이다.
[편집] 바깥 고리
<타타르족>
인구 | 약 700만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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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 |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터키 몰도바 |
언어 | 러시아어, 타타르어 |
종교 | 수니 이슬람교, 그리스정교 |
관련민족 | 튀르크족 |
타타르 족(Татарлар/Tatarlar 따따르라르)은 터키계 민족이며 타타르스탄의 주민이다.
타타르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를 믿으며, 타타르어를 쓴다.
[편집] 유럽의 타타르족
[편집] 볼가 타타르족
[편집] 까잔 타타르족
카잔 타타르족들은 타타르스탄의 주요 민족이다. 일부는 우파시, 사마라, 심비르스크, 뱌트카, 사라토프, 탐보프, 펜자, 니주니노브고로트, 페름, 오렌부르크에, 1만5,000명은 랴잔과 리투아니아(빌니우스), 흐로드나, 폴로츠크, 폴로니아에, 2,000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한다. (일부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랄과 시베리아 서부에 거주하기도 한다.)
[편집] 노끄랏 타타르족
카잔타타르족들이 살고 있는 키로프에 거주한다.
[편집] 페름 타타르족
카잔타타르족들이 살고있는 페름에 거주한다. 일부는 코미에 살고있다.
[편집] 께래셴 타타르족
일부 카잔 타타르족들은 16세기때 이반 4세에 의해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대부분의 케라셴 타타르족들은 타타르스탄에 거주한다.
[편집] 나가이백 타타르족
타타르족들은 일부가 코사크족들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믿는다. 나가이박족들은 우랄 산맥에 거주한다. 17세기 - 18세기때부터 러시아인들에 의해서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편집] 띱때르 타타르족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다. 일부 팁타르 타타르족들은 러시아어나 바슈키르어를 쓴다.
[편집] 미섀르 타타르족
[편집] 까싐 타타르족
[편집] 아스트라한 타타르족
1911년 브리태니커의 자료에 따르면, 아스트라한 타타르족들은 1만명이고, 과거에는 강력했던 아스트라한 한국을 이루었고 칼미크족들과 유사했다.
[편집] 각국의 볼가 타타르족
볼가 타타르족은 현재 800 명 정도가 있다.
[편집]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크리미안 타타르족
[편집] 크리미안 타타르족
[편집] 우크라이나 타타르족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타타르족들이다. 타타르어를 쓰나 이들의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상용어로 쓴다. 이슬람교도이고 우크라이나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대부분이 돼지고기를 먹는다.
[편집] 몰도바 타타르족
[편집] 벨라루스 타타르족
벨라루스 중부에 거주하는 타타르족들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원나라때 벨라루스로 건너갔거나, 19세기 러시아의 영향과 20세기중반 소련의 영향으로 일부 타타르족들이 벨라루스에 가서 정착한 민족들을 말한다.
모습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타타르족들과 거의 비슷하고, 풍습도 거의 비슷하다.
[편집] 폴란드 타타르족
일부 타타르족들은 폴란드에 살고 있고 폴란드어를 쓰고 있었으나 폴란드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폴란드 타타르족들의 조상들은 대부분 크리미안 타타르족들이나 노가이족들이 군인으로 채용된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폴란드로 이주한 후손들이다. 일부는 립카 타타르족들이 리투아니아 공국시절부터 정주한 민족이다. 지금까지도 카잔 타타르족들의 조상들이다 (16세기-17세기중반).
이유는 대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으므로 일부분이 폴란드어를 쓰는 등 폴란드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폴란드 타타르족들은 대부분이 가톨릭신자이고 대부분이 그들의 언어를 잊었다. 지금도 그들은 성이 폴란드식으로 끝난다(Ryzwanowicz(리즈바노비치), Jakubowicz(야쿠보비치)등). 2002년 폴란드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500명의 타타르족들이 국적을 신고했다.
[편집] 일본의 타타르족
- 이 부분의 본문은 재일터키인입니다.
[편집] 시베리아 타타르족
인구 20만명의 민족으로, 타타르족의 일부에 속해 있다. 타타르어의 방언인 시베리아 타타르어를 사용한다. 투르크계 민족과 우그리아계 민족에 가깝지만, 조상은 초기 킵차크족에서 갈라졌다.
[편집] 중국의 타타르족
타타르족(塔塔尔族)은 중화인민공화국의 56개의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의 타타르족들은 조상이 볼가타타르족들이고 대부분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한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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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에 대한 연구 -대수맥님 글>
[유라시아 초원벨트]는 북쪽으로 중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산림지대를 포함하여 몽골과 만주 지방의 북변北邊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 제국] 이래 흉노匈奴와 돌궐突厥을 비롯한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 북방 유목민족들의 생존을 위한 분명한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초원草原 및 구릉지대丘陵地帶와 그 아래로 넓게 펼쳐진 사막 등 이미 고대 한족韓族의 위대한 역사가歷史家들조차 인정했듯이『걸음마보타 말 타기를 먼저 접할 수밖에 없었던』북방민족들에게는
주어진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매우 구체적으로 생활방식을 진화進化시킨 독특한 문화로서 매우 생생하게도 인류 문명사 발전과정에 굵고 분명한 발자국을 남겨 놓았음을 이젠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세력집단들이 마치 그 당시 막 외계外界에서 진입한 존재처럼 아니면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데에서 갑자기 나타나 서아시아나 유럽 그리고 한족漢族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던 [유령군단]이었을까? 필자筆者가 오히려 당황스럽다.
혹은 이들의 출현과 활동이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각기 전혀 다른 전통을 지닌 [단막극의 주인공]이었을까? 이런 거대하고 꾸준한 드라마가 한낱 의미 없이 서로 단절된 <에피소드>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현실적인 북방문명 발전의 중심에 언제나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로 묶으며 펼쳐진 광대한 초원벨트를 단 한 번도 장악하지 못한 적이 없었던 [유목제국의 병사들과 위대한 제왕帝王들의 발자취]가 있었다.
되풀이되었던 정복과 지배력의 원천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거칠고 광대한 초원 벨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신속한 교통로로 탈바꿈시켜 생활화한 [기마군단騎馬軍團의 기동력]과 전투력 증강...군사작전의 효율성에 가장 알맞도록 자연스럽게 진화시켜 융합된 [전사戰士 집단의 예측 불가능한 이동성]이었다.
[흉노匈奴-유연柔然-돌궐突厥-거란契丹-여진女眞-몽골蒙古-타타르韃靼]와 이어진 북방민족의 반복적인 융성과 소멸이라는 과정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위와 같은 매우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흐름이며 이와 같은 지속적이고 역사적인 반복과정이야 말로
불과 300년 전에서야 [대포와 소총]이라는 신무기의 위력에 군사적 우위의 끈을 잃고 몰락한 [북방민족의 일관된 행동양식]이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억압과 공포의 기억에 사로잡힌 저들에게 후일까지 [타타르-달단韃靼]으로 인식되어야만 했으며 그런 가운데 애써 감추려고 하였던 역사 속의 진실에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한마디 더]
북방北方 초원草原의 역사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동방東方의 원주지原住地에서 세력부침에 따라 그동안에 누려왔던 우위優位를 잃어버린 북방민족은 [언제나 서부지역으로 내몰리는 전통적인 경향성]을 갖는다(월지月氏-흉노匈奴-유연柔然-돌궐突厥-거란契丹 등).
그리고 [북방 기마문화권騎馬文化圈과 남방 및 유럽 정주문명권定住文明圈]이라는 양兩 세계를 가르는 천연적인 장애로 작용했던 사막지대와 산맥을 [1] 관통하거나 우회迂回하던 두 줄기 교통로 [2]는 정주문명인定住文明人으로서는 교역交易과 문명 교류의 접촉지대였지만 북방민족으로서는 군사적 진입進入과 정복을 위한 진군進軍 루트였다.
[1] 트랜스 옥시아나Trans Oxiana의 키질Kizil 쿰Kum 사막*아무다리아 남쪽의 카라Kara 쿰Kum 사막*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Takramakan 사막*롭Lop 노르Nor에서 흥안령興安嶺 산맥 사이의 고비사막 등과 천산산맥天山山脈*알타이산맥*히말라야 산맥이 있다.
[2] 돈황敦煌-하미-투르판-카라샤르-쿠차-카쉬가르-페르가나-트랜스 옥시아나로 이어지는 북방로北方路와 돈황敦煌-호탄-야르칸트-파미르 협곡-박트리아Bactria로 연결되는 남방루트이다.
이 가운데 특히 [북방로北方路]는 발하쉬 호湖 부근을 거친 다음 알타이와 천산산맥天山山脈 북쪽 기슭이 서로 만나는 타르바가타이Tarbagahtai와 추구착Chughuchak 쪽으로 흐르는 이밀Imil 강 유역과 율두즈Yulduz*일리Ili*이식쿨 부근 방면으로 틈새가 벌어진 지역을 통과하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카지흐와 러시아 초원草原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몽골과 함께 유럽 정복의 선봉先鋒으로 동원된 [타타르]의 가장 서방 지역 정착지로 알려진 [타타르 공화국]이 왜 거기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흉노匈奴의 선례先例에 따라 타르바가타이*알라Ala 타우Tau*무자르트Muzart 고개를 넘어 러시아 초원草原을 거쳐 헝가리 초지草地를 휩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훈Hun과 6C 경 돌궐의 압박을 받은 몽골계 아바르Abar가 7C 무렵은 하자르Khazar가 11C엔 페체넥Pecheneg이 12C에 이르면 쿠만Quman 등 같은 [투르크인]들이 통과하였다. 이어 마지막을 13C의 [칭기즈칸]이 장식하고 있다.
초원草原의 역사는 곧 이동의 역사이며 뛰어난 기동력으로 인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관할영역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민족異民族의 눈에 비쳐진 <투르크-몽골계>인 [타타르]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인식해야 인류 역사 속에 녹아 있는 만주滿洲에서 중앙아시아 변경邊境에 걸친 드넓은 행동반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힘의 우열경쟁에서 밀린 [타타르]가 초원 벨트의 서변西邊과 동부로 밀리는 동안 [세력을 얻은 지배 씨족들이] 제국帝國의 중심부인 북몽골의 오르콘 강 상류上流에 위치한 [카라발가순Qurabalghasun과 카라코룸Qaraqorum]에서 [흉노匈奴-선비鮮卑-유연柔然-돌궐突厥-위구르-거란契丹-몽골]로서 굵은 족적足跡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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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이들 세력집단들의 중심지가 한결같이 [가라계 어군語群]을 공유共有하고 있다. [단군조선 제국]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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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本論 시작】
이 대목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앞으로 핵심 논제論題가 될 [타타르]에 대한 사전적辭典的 정의正義와 일반적으로 각종 자료 등에서 규정되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觀念를 살펴본 다음 본문本文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아마 대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는 듯하다.
□ 사전적辭典的 정의正義
1. 몽골 족 가운데 한 부족部族 또는 몽골 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러시아 내의 투르크계 여러 종족種族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일반적인 인식
[타타르Tatar] 혹은 [달단韃靼] [Tartar]라고도 쓴다. 볼가 강 중류와 그 지류인 카마 강을 따라 동東으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종족種族이다. 투르크어를 쓰며 인구人口는 약 500만 명이다. 유럽권 러시아의 동부 및 남동부와 시베리아 남부에도 살고 있다.
옛날에는 [타타르]라는 명칭名稱이 다양하게 쓰여서 몽골족과 투르크계 민족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스텝과 사막에 사는 유목 민족을 총칭總稱하거나, 크림타타르*시베리아타타르*카잔타타르*카시모프타타르 등처럼 몽골제국(13C~14C) 때의 여러 민족과 나라를 가리켰다.
10C에 러시아 남부의 스텝에서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이 유입되어 타타르족을 구성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고대 불가리아(지금의 불가리아와는 다르다)가 현재의 타타르스탄 영토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몽골 제국이 건설되면서 그밖에 다른 민족이 추가되었으며 19C에는 추바슈*모르드바족의 일부를 비롯한 인근 부족들이 타타르족에 흡수되었다.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가 이끈 15만 명의 제2차 서정군西征軍은 일격이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을 초토화焦土化시키고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수도首都로 한 [킵차크 칸국 AD 1243년~AD 1480년]을 세워 러시아를 지배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타타르의 멍에』라고 그 굴욕을 표현했다.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몽골의 한 부족명인 달단(韃靼-달달達達)의 음사音寫였으나 러시아에 그 이름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타르타로스』와 연관시켜 몽골인들에 대한 비칭卑稱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한 유목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칭通稱으로 되어버렸는데 당시 서구西歐에도 이 이름이 전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경내境內에는 [타타르]라는 이름을 가진 몽골족 후예後裔들이 살고 있다.
[필자筆者 견해見解]
앞서 언급한 전제前提와 위와 같은 인식들을 머리 속에 담았을 때 [유라시아 역사 발전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이들 유목제국遊牧帝國들이 서부西部와 남변南邊의 정착농경사회定着農耕社會에 대하여 꾸준하고 반복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기마집단騎馬集團을 주축으로 하여 수시로 농경문명권의 변방邊防을 거쳐 중심부까지 출현하면서 그들만의 방식 즉 한바탕의 약탈과 공납貢納을 번갈아가며 되풀이하는 것이 17C까지 이어진 일반적인 그들만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반복되는 역사 과정 속에서 현명하게도 [타타르인]들은 이러한 [초원의 방식]에 가장 충실하게 그리고 때로는 매우 익숙하게 길들여지는 가운데 유목문명의 마지막 시기까지 점차 나름대로의 발자취를 넓혀갔다.
결국 어느 시기에 이르러 강력한 개성을 가진 지도자에 의해 주목받을만한 세력으로 부각하는 단계에 이르자 위력적으로 변경邊境 지역에 진입하여 충분한 통치능력을 과시하면서 떳떳하게 [아시아 초원의 연장선상인 유럽의 초지草地]에서 [타타르]의 이름을 심어 놓았다.
바로 이런 관점과 역사적인 진화과정에서 벌어진 [초원제국의 흥망사興亡史]를 염두에 두지 않고 농경정착 문명의 잣대로 [유라시아 평원의 파수꾼]들을 획일적인 지역적 개념 속에 가두어 평가하는 건 매우 옳지 않다.
그 극단적인 생활양식의 한 측면에서 [타타르인]들의 삶이 엄연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 기본적인 인식 전환에 의해서만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命題들이 비로소 정확한 의미와 결론을 가지고 비로소 제 자리를 찾게 된다.
1) 현재 러시아 중남부지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교통로 상에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 [타타르] 민족 거주 지역들은 왜 존재 하고 있는가?
2) 서방 세계에서 이들 유목민족들에게 구태여 [타타르]라는 일반적인 족명族名을 부여한 관념적인 인식태도는 어디에서 기원起源하는가?
3) [타타르인]들이 동북만주東北滿洲에서도 청淸 시대까지 부침을 거듭하면서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4) 시베리아 지역 원주민原住民인 부리야트족에 [타타르인]들의 흔적이 존재하는 이유와 유라시아 동북단東北端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동로 가운데 중요한 거점이었던 사할린 섬과 본토 사이의 해협이 [타타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경위는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함축含蓄하고 있는가?
5) 몽골제국의 해체 과정에서도 몽골리아 지역에 [타타르-달단韃靼]란 명칭이 끈질기게 살아 있었던 까닭은 과연 어째서 인가?
6)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유난히 원조元朝의 몰락과 명조明朝의 발흥 기간에 [달단韃靼]이란 종족種族이 부각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筆者의 생각으로는 유라시아 초원 벨트에서 흥망성쇠를 이룬 제국들(흉노匈奴-선비鮮卑-유연柔然-돌궐突厥-위구르-거란契丹-몽골 등)이 분명한 족적足跡을 남기고 있을 때 [타타르]는 그 일부로서 흡수되거나 열세劣勢에 놓였던 변방부족邊方部族으로서 제대로 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존재했다가
몽골의 융성 시기에 주변부족의 통합 과정에서 편입되어 서방세계 공략의 일익一翼을 담당하여 강력하게 인식되어 갔으며 몽골제국조차 몰락하면서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겼던 부족들(흉노匈奴-유연柔然-돌궐突厥 등)이 점차 소멸하거나 분해되는 와중에 결국 유라시아 초원의 [투르크-몽골계] 민족에 대한 범칭凡稱으로 일반화되거나 몽골부족의 전화轉化된 표현 양식으로 굳어진 듯하다.
1. 서방西方의 역사가들에게 [타타르]라 불린 유라시아 초원草原의 유목집단은 사서史書에서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가) [타타르]의 기원起源과 관련하여 한 가지 놓치지 않고 깊이 연구해야할 과제가 있다. 흉노匈奴의 발흥發興 과정에서 최초로 타격을 받고 본향本鄕에서 밀려난 [월지月支]의 족원族原에 관한 의문이다. 분명히 한자화漢字化된 종족이름임이 분명할진대 [원래는 동방계열의 고유 명칭]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주목할 부분은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로도 나타나며 [월月]은 곧 [달*다루*다라]로 풀어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월씨月氏]는 [달씨]이다. 하늘의 아들로 땅을 지배하며 해와 달을 받들어 제사하는(일월숭배日月崇拜) 동방계 특유의 언어군言語群에 속해있음이 분명해진다.
※ 흉노匈奴가 반드시 아침에 해에 고告하고 저녁에는 달을 맞는 제의祭儀를 한다는 사실과 동호東胡가『동방東方 즉 새벽을 가장 처음 맞는 밝은 민족』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상기하라. 아울러 고구려나 부여 모두 [해씨]를 칭하면서 일월지자日月之子로 자칭自稱하고 있다. 이는 기마민족이 초원을 달리면서 가장 먼저 뜨는 해와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달을 맞이하는 일상日常에서 비롯된 관념체계이다.
흉노匈奴에게 쫒겨 서방西方으로 밀린 [월씨月氏]의 원주지原住地는 감숙甘肅과 티베트 지방으로 [1] 그 후에도 일부가 여전히 남아 소월지小月氏로서 강족羌族과 섞여 살았다(한서漢書).
[1] 처음 이들 지역을 언급한 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는 분명하게 [타구리Thagouri*토가라Thogara 등]으로 기록했다. 나중에 활동 범위가 장액張掖 방면으로 연결되었음은 그곳을 역시 토가라Thogara로 불렀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필자筆者의 앞으로 서술과정에 대한 결론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이다.
나) AD 155년에 이르러 흉노匈奴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힘의 공백이 된 서부 유라시아 초원의 [동몽골 지역]에서 몽골계 선비鮮卑가 일어나 북흉노北匈奴를 격파했다. 마침내 <하미>와 <바르쿨>을 서변西邊으로 몽골리아를 지배한 선비鮮卑에 밀려 남흉노南匈奴는 만리장성 안에 한漢의 번병藩屛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흉노南匈奴는 호주천呼廚泉 선우單于 무렵 산서성山西省 평양平陽에 자리 잡고 먼 할머니가 한漢의 공주였음을 내세워 유씨劉氏로 칭한다. AD 304년 태원太原에 확고히 정착한 후손 유연劉淵은 진晋으로부터 오부선우五部單于로 임명됨을 발판으로 삼아 스스로 북한(北漢-전조前趙)의 황제로 올라섰다.
그러나 동진東晋을 몰락시킨 유총劉聰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운 흉노계匈奴系 갈족羯族 석륵石勒이 하북성河北省 남쪽인 양국(襄國-현現 순덕順德)까지 진입하여 이윽고 AD 329년에 전조前趙를 멸하고 후조後趙를 세우는데 흔히 월지月氏가 있던 감숙甘肅 지역에서 다시 자립한 [타타르인]으로 설명되어진다(L.Wieger Textes historiques Ⅱ 943p).
※ 갈족羯族은 흉노제국匈奴帝國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 부족이다. 막남漠南에서 타 부족들과 혼거混居하면서 습속이 흉노匈奴와 동일하였고 오랫동안 같이 움직이는 가운데 산서山西 지역까지 들어와 흉노匈奴의 별족別族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언어가 월지月氏*소그드(Sogdian 속특粟特)와 같고 원래 거주지역도 겹친다는 점이 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다) AD 425년부터 AD 449년까지 투르크계 탁발씨拓跋氏의 북위北魏는 막북漠北 전 지역을 지배하면서 배후를 위협하던 [몽골-선비계鮮卑系] 유연(柔然-연연蠕蠕)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가로지르는 세 차례의 공격적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쳐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와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
북위北魏의 현명한 공략에 대한 유연柔然의 공포감은 그들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만들었는데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후 동방에서 유연柔然의 호전적인 움직임이 사라진 반면 [AD 6C에서 AD 8C 아바르-AD 9C 레베드]의 서방 진출과 연관되어 등장한 <헝가리 문화>와 매우 흡사하며 동일한 문명적 중심을 밀접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N. Fettich Die Reiternomadenkurter von Minussinsk - Metallkunst der Landnehmenden Ungarn 202p).
※ 이 시기 매우 분명하게도 유연柔然은 동부에서의 열세劣勢와는 달리 서방의 중남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 [1] 에 대한 강력한 우위優位를 같은 몽골계이었던 에프탈Ephthal 훈Hun을 통해 펼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월지月氏의 이동지역이기도 했다(Marquart*Pelliot).
[1] 카라샤르 서북인 [율두즈 강 상류-일리 분지-발하쉬호-추강-탈라스 강 초원-아랄 해를 낀 사르디니아 지역-사마르칸드인 트란스 옥시아나-발흐-박트리아-토하리스탄]이 최대 강역이다(AD 5C 후반까지).
[에프탈 훈]을 AD 520년 경 <칸>의 야영지野營地를 방문한 구법승求法僧 송운宋雲의 기행문(Chavannes 역譯 송운宋雲의 여행기 402p와 417p)과 북사北史도 매우 순수한 유목부족으로 기록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 그 북부에서는 이미 AD 374년부터 또 다른 투르크계 <훈족>의 일파가 중남부러시아를 공략하고 있었는데 로마와 게르만 민족들에게 미치는 공포가 극에 다다랐을 시기는 AD 451년부터 카스피 해海 북부 지역을 포함한 모든 초원의 지배자로 일어선 <아틸라>의 등장과 매우 관련이 깊다.
■■▶ 그들은 도시에 살지 않고 조정朝廷은 이동용 천막에 있다. 주거는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한 곳을 겨울이면 따뜻한 데를 찾아 여행한다. 왕을 위한 거대한 모전천막을 세우는데 40자 정도이고 내부 벽은 모직 카펫으로 되어있다. <송운宋雲의 여행기>
라) AD 552년 틀림없는 투르크계 돌궐(突厥-부민土門 카칸)에게 유연(柔然-아나괴 카칸)이 격파당하면서 몽골리아를 지배하자 유연柔然의 서방을 지켜주던 [에프탈 훈]도 사라져버렸다. 부민Bumin의 동생 이스테미(실점밀室點密)가 준가리아Jungaria를 중심으로 세운 서돌궐腺厥을 바탕으로 AD 565년 페르시아(사산조)와 연합하여 정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달아난 [에프탈 훈]과 합친 유연柔然의 일부가 헝가리 지역에서 새로운 몽골계 칸국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며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 바로 [아바르Abar]이다(비잔티움 사가史家 테오필락투스Theophylactus 시모카테스*Herrmann). 그는 <앗틸라>를 따르던 유목부족이었던 쿠트라구르와 우투르구르라는 <훈족>들을 패배시킨 다음 포용하여 전력戰力을 가다듬었다.
볼가에서 다뉴브를 거쳐 오스트리아 초원까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다음 AD 565년에 뒤를 이은 계산이 빠르고 영민한 군주가 아주 특별하게도 <바얀Bayan 칸>이라는 몽골계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펠리오Pelliot).
이렇게 돌궐突厥을 피해 달아난 유연柔然과 에프탈 훈의 성공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서돌궐腺厥의 타르두(달두達頭) 카칸이 AD 575-AD 576년 사이에 비잔티움의 사신 <발렌티노스>를 쿠차 북방의 율두즈 강 상류에서 접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 서로 조약을 맺은 사실에 관해 질책한 말이 이 같은 정황들을 매우 잘 설명해준다.
이와 관련해 헝가리에서 나온 <아바르>의 발굴 유물과 오르도스에서 출토된 흉노匈奴*유연柔然*돌궐突厥 시대의 청동제 발굴품 사이에 보이는 긴밀한 연속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며 아바르 예술은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최후의 양식과 놀라울 만큼 친연성親緣性을 보이고 있다(난도르 페티히Pettich).
■■▶ 우아르 후니(혹은 바르 호니테Varchonites-아바르와 훈을 가리키는 말이다)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 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들처럼 우리의 말의 발굽으로 짓뭉개버릴 것이다. <메난드로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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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설명되어지듯이 서방으로 간 [타타르]와는 다르게 몽골리아 중부와 동부에서 [토쿠즈Toquz 오구즈Oghuz]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타타르인]들이 후일 다시 유라시아 전역에서 혼합되어가는 정황을 볼 수 있다. 즉 10C 페르시아의 지리서인 <Hudud al-Alam>에 [토쿠즈Toquz 구즈Ghuz 혹은 구즈Ghuz]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토쿠즈Toquz 구즈Ghuz는 현재 <세르메치에>의 발하쉬 호湖 남방(일리Ili*테케즈Tekes*샤린Charin*무자르트Muzart)에 [튀르기쉬 투르크]로서 거주하고 있으며(Minorsky Hudud al-Alam 263p-279p와 지도 279p)
[구즈Ghuz]도 현재 카자흐인들이 차지한 발하쉬 호湖의 서부와 아랄 해의 북부(인 사리 수 초원*투르가이*엠바)에 자리 잡았다(Hudud al-Alam 311p와 지도 307p). 이들은 11C 초까지 남 러시아의 [Uzes=Ouzoi]와 페르시아의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현재의 [투르크멘]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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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몽골리아>에서 패권을 상실하고 타림분지 북방(호초 즉 투르판*베쉬발릭 즉 짐사*카라샤르*쿠차) 등에 정착한 [위구르 투르크인]들은 AD 999년에 이르러 이란계 <사산조-압둘 말릭 2세 Abd al-Malik>를 무너뜨리면서
아프카니스탄과 후라산을 중심으로 트란스 옥시아나를 차지한 [가즈나 조朝 투르크의 마흐무드Mahmud]와 추 강과 일리 강의 페르가나*카쉬가리아의 초원을 장악한 [카라한 조朝 투르크의 아르슬란 일릭 나스르 Arslan Ilig Nasr 왕국王國]을 세운다.
카라한조의 왕가(王家-틀림없이 칸Kahn의 칭호를 쓰고 있다)는 이 무렵 카쉬카르를 장악한 세 부족(야그마Yaghma*카를룩 투르크*토쿠즈Toquz 오구즈Oghuz)가운데 이윽고 발라사군 지역(이식쿨의 서쪽)을 흡수하여 부족을 통합한 [토쿠즈Toquz 오구즈Oghuz]의 일파一派였음을 동서양 사료를 모두 대조한 <바르톨드Barthold>가 분명히 밝혀주었다.
아울러 펠리오Peliot는 AD 1008년 발흐 근처의 샤르히안Sharkhiyan에서 가즈나조의 마흐무드Mahmud에 패한 카라한조의 아르슬란 일릭 나스르 Arslan Ilig Nasr에서 <Ilig>가 왕王을 의미하는 위구르어임을 증명했다.
바) 11C에 이르러 카스피 해海를 바라보는 페르시아와 소아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셀주크 투르크]는 발하쉬 호湖 북방 초원에서 성장한 오구즈Oghuz 구즈ghuzz(비잔틴 역사가들은 우조이Ouzoi)로서 [타타르계] 투르크멘Turkmenes으로 알려진다(페르시아어 지리서 세계경역지世界境域志Hudud al-Alam*Barthold).
왕조王朝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오구즈 집단]의 보잘 것 없는 수령인 <토그릴 벡>이 결국 아랍 칼리프 조朝의 공식적인 군주(君主-동방과 서방의 왕王)로서 그들의 구원자이며 보호자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 당시의 기진맥진한 서아시아의 혼란 속에서도 용맹한 오구즈 집단을 거느리고 매우 잔인하고 극도로 냉정하며 단호하게 정복사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소아시아]의 과거 비잔티움 영역과 아나톨리아 초원지역 [1] 에는 AD 1080년 침공이후 독립적으로 존재한 또 하나의 [구즈 집단]들이 있었다(술레이만 이븐 쿠툴미시*투투쉬*말릭Malik 샤Shah*오카일Oqayl 조朝*파티마Fatima 조朝). 바로 여기에서 후일 터키의 역사가 개화開花된다. 이에 관하여는 <바르톨드Barthold>가 아주 잘 정리해주고 있다.
[1] 이 초원지대는 고도高度와 기후 면에서도 그들의 고향과도 같은 친연성親緣性을 가져다주었다. 이 지역에 [타타Tatta 호湖]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매우 의미심장하다(스트라보Strabo).
■■▶ [구즈 혹은 투르크멘]은 더러 독립적이 부랑배들처럼 아니면 수령들의 지휘를 받으며 중국령 투르키스탄에서 이집트의 변경과 비잔티움의 변방 사이에 위치한 모든 지역을 가로질러 다녔다...셀죽의 술탄들은 방랑하는 자기 형제들(규율이 없는 구즈 집단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잘 가꾸어진 이란의 영지를 약탈하지 못하도록 그들로 하여금 소아시아에 있는 변경 지역에 자리 잡도록 하였다. <바르톨드Barthold 구즈Ghuzz 178p>
<참조> 블로그 역사이야기 수록
- 흉노, 훈, 아틸타
- 몽골=>원=>북원=> 티무르 왕조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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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앙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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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도시 | 이스탄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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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터키어 | ||||
정부 형태 | 공화정 | ||||
대통령 총리 |
압둘라 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
독립 • 공화국 선언 |
케말 파샤가 건국함 1923년 10월 29일 | ||||
면적 | 783,562 ㎢ (37위) | ||||
• 내수면 비율 | 1.3 % | ||||
인구 | |||||
• 2008년 어림 | 71,517,100명 | ||||
• 인구 밀도 | 93명/㎢ (102위) | ||||
GDP (PPP) | 2008년 어림값 | ||||
• 전체 | $9,152억 | ||||
• 일인당 | $13,138 | ||||
HDI | 0.798 (76위, 2006년 조사) | ||||
통화 | 터키 리라 (ISO 4217: TRY ) | ||||
시간대 | EET (UTC+3) | ||||
• 여름 시간 | CEST (UTC+2) | ||||
ISO 3166-1 | 792 | ||||
ISO 3166-1 alpha-2 |
TR | ||||
ISO 3166-1 alpha-3 |
TUR | ||||
인터넷 도메인 | .tr | ||||
국제 전화 | +90 | ||||
터키 리라는 2005년 화폐 개혁으로 인해 신 터키 리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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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공화국(터키어: Türkiye Cumhuriyeti 튀르키예 줌후리예티[*]), 줄여서 터키(터키어: Türkiye 튀르키예[*], 문화어: 뛰르끼예)는 서남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동부 트라크야에 걸친 나라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다.
터키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히체반),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터키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1]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2][3]
인종상 터키인이 국민 대다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는 쿠르드인이 있다. 터키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이며, 공용어는 터키어이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이다.[4] 이 나라는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인 입헌 공화국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현대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터키는 유럽 이사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 WEOG, G20와 같은 국제 기구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와 점차 통합하고 있다. 터키는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준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고, 2005년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하였다.
터키는 또 이슬람 회의 기구(OIC)와 경제 협력 기구(ECO)에 가입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위시한 동양과도 문화, 정치, 경제, 산업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는 터키를 선진국으로 분류하며,[5] 세계의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들은 지역 강국으로 여기고 있다.[6][7]
[편집] 어원
'터키'의 터키어 표기인 '튀르키예'(Türkiye)에서 '튀르크'(Türk)는 고대 튀르크어에서 '강한'을 뜻하는데 보통 터키인과 투르크 제족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8]
후대의 변형인 '투-킨(tu-kin)'은 중국인들이 기원전 177년에 중앙 아시아 알타이 산맥 남쪽에 살던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이었다.[9]
또 '튀르키예'의 접미사인 '-iye'는 '주인' 또는 '~와 관계된'을 뜻하며,
아랍어 접미사 '-iyya'에서 파생되었는데, 중세 라틴어 접미사 '-ia'와 관련되어 'Turchia'라고 쓰이며, 중세 그리스어 접미사 '–ία'가 붙어 'Τουρκία'라고 썼다. '튀르크' 또는 '튀뤼크'(Türük)가 지명으로 쓰인 최초의 기록은 중앙 아시아 돌궐(괴크 튀르크)의 오르혼 비문(서기 8세기경)에 등장한다.
영어 'Turkey'는 중세 라틴어 '투르키아'에서 나온 말이다.(1369년경)[9]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국명이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에서 사용되는 '투얼치(중국어: 土耳其)' 역시 이 영어식 국명을 음역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터키어 국명을 그대로 옮겨 '뛰르끼예'로 표기한다.
[편집] 지리와 기후
터키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10] 아시아쪽 터키 영토(주로 아나톨리아로 구성)은 국토의 97%를 차지하며, 보스포로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준다)을 끼고 있는 유럽쪽 터키 영토는 국토의 3%에 불과하다.[11]
터키의 영토는 길이로는 1,600 km, 폭 800 km에 이르며,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다.[12] 호수를 포함해 터키의 육지 면적은 783,562 제곱킬로미터이며, 아시아 대륙에 속하는 영토는 755,688 제곱킬로미터이고, 유럽 대륙에 속한 영토는 23,764 제곱킬로미터이다.[13] 터키는 세계에서 37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프랑스 본토와 영국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는데, 서쪽에는 에게 해,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또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해가 있다.[14]
터키의 유럽 영토인 동부 트라크야는 그리스와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시아쪽 영토인 아나톨리아(소아시아)는 중앙에 고원 지대와 좁은 해안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로 북쪽에는 쾨로을루 산맥과 도우 산맥(폰토스 산맥)이, 남쪽에는 토로스 산맥(타우루스 산맥)이 뻗어 있다. 동부 터키은 산악 지형이 더욱 발달되어 있으며,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아라스 강 등 여러 강의 수원지이고, 반 호와 터키 최고봉 아라라트 산(높이 5,165m)이 있다.[14][15]
터키는 7개의 인구조사용 지역으로 나뉘는데, 마르마라 지역, 에게 해 지역, 흑해 지역,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남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지중해 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흑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북부 아나톨리아의 울퉁불퉁한 지형은 길고 좁은 띠 모양이다. 이 지역은 터키 총 면적의 1/6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아나톨리아 내륙 고원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지형이 험해진다.[14]
터키의 다양한 경관은 복잡한 지각 운동의 산물로, 오랜 세월동안 이 땅을 형성하였으며, 상당히 잦은 지진과 이따금 일어나는 화산 분출으로 지금도 그 영향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보스포로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늘날의 흑해를 형성한 터키의 단층선 때문에 생겨났다. 국토 북쪽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지진 단층선 때문에 1999년에 대지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16]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터키의 해안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 및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건조한 내륙 지역은 기후가 훨씬 혹독하다. 해안과 가까운 산맥 때문에 터키 내륙은 계절차가 대단히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고원의 겨울은 특히나 춥다. 동부의 산악 지방에서는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며, 연중 120일간 지표에 눈이 남기도 한다. 서부의 겨울 기온은 평균 영하 1도이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기온은 보통 낮에 30도 이상이다. 연중 강수량은 평균 400mm로,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건조한 지역은 코니아 평야와 말라티아 평야로, 이 곳의 연중 강우량은 대개 300mm 이하이다. 가장 습윤한 달은 5월이며, 가장 건조한 달은 7월과 8월이다.[17]
[편집] 역사
- 이 부분의 본문은 터키의 역사입니다.
[편집] 고대
- 이 부분의 본문은 아나톨리아의 역사입니다.
오늘날의 터키 영토 대부분을 이루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지구상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차탈회위크(신석기 3기), 차외뉘(신석기 1기에서 신석가 3기), 네발리 코리(신석기 2기), 하클리아르(신석기 3기), 괴베클리 테페(신석기 2기), 메르신 등 초기 신석기 시대 거주지는 지구상 최초의 인류들이 살던 거주지로 여겨진다.[18]
트로이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철기 시대까지 취락이 지속되었다.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인도-유럽어, 셈어, 카르트벨리어를 비롯하여 기원이 불확실한 여러 언어를 썼다. 사실 고대 인도-유럽어인 히타이트어와 루위아어를 놓고 어떤 학자들은 아나톨리아가 인도-유럽어를 확산시킨 중심지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9]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제국은 히타이트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다음은 인도-유럽 계통의 프뤼기아인들이 패권을 잡았으나, 기원전 7세기에 킴메르인의 침략으로 멸망한다.[20]
프뤼기아의 가장 강력했던 후계국가는 뤼디아, 카리아, 뤼키아였다. 뤼디아인과 뤼키아인은 인도-유럽어에 기원을 둔 언어를 구사했는데, 두 언어는 히타이트와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非인도-유럽어의 요소를 받아들였다.[출처 필요]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21]
헬레니즘 시대에 아나톨리아는 비튀니아, 카파도키아, 페르가몬, 폰토스 등 여러 헬레니즘계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324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뷔잔티온을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이스탄불이 된다.)라고 개명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이 도시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23]
[편집] 튀르크인과 오스만 제국
<셀주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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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크 샤 1세의 사후 셀주크 튀르크의 최대 판도 (1092년경) | |||
수도 | 니샤푸르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술탄제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성립 | 1037년 | ||
해체 | 1194년 | ||
초대 술탄 | 투으룰 1세 (1037–1063) | ||
최후 술탄 | 토그릴 일 (1174-1194) | ||
성립 이전 | 카라한 왕조 | ||
해체 이후 | 룸 술탄국 | ||
셀주크 제국(터키어: Selçuklular 셀추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 또는 셀주크 튀르크(요/금/원나라 시대)는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 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를 말한다.
셀주크 왕조라고 하기도 한다.
셀주크 튀르크는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로 발흥하여 중동에서 튀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고 제1차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터키, 투르크메니스탄의 튀르크인들의 문화적 조상으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문화의 보호자였다.
[편집] 초기역사
10세기경 셀주크라는 수장이 지휘하는 유목민의 일단이 볼가강을 넘어 흑해연안의 스텝지역으로 건너왔다.
셀주크 가문은 오구즈 튀르크멘 부족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은 곧 남하하여 이란 북부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페르시아에 동화되었으며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조의 용병으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셀주크인들은 처음에 사만 왕조와 동맹을 맺고 카라한 왕조, 가즈나 왕조와 맞서 싸웠으나 사만 왕조가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스스로 독립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편집] 셀주크 제국의 발전
셀주크의 손자인 차그리 베그와 투으룰 1세는 가즈나 왕조의 마무드 지원을 받았으나 1037년 가즈니를 공격하여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1055년 토그릴은 부와이 왕조에게서 승리하여 바그다드를 정복했기 때문에 셀주크는 수니파 칼리프 주도하에 이슬람의 통일을 회복시킨 존재로 여겨졌다.
1063년 차그리가 토그릴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하는 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차그리 베이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 때에 이르러 셀주크의 세력을 더욱 강대해져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시리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1064년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복속하였고
106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였다. 1071년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대군을 섬멸하고 비잔티움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써 셀주크인들은 소아시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뒤를 이은 말리크 샤 1세에는 제국의 영토가 더욱 확장 되었다. 이슬람의 침입이전 이란의 영토이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복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중국과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라이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바그다드에 학교를 세우고 군대제도를 개선하였다. 그의 치세에 셀주크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어 1087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 부터 "동방과 서방의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당시 와지르 니잠 알물크는 제국내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이슬람 문화에 크나큰 유산을 남겼다. 일종의 이슬람의 신학 대학인 마드라사 조직이 형성되어 행정관료들과 신학자들에게 통일된 교육훈련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니잠 알물크는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아사신에 의해 살해당했다.
[편집] 제국의 분할과 십자군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죽자 제국은 그의 형제와 네명의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분할되었다.
소아시아는 룸 술탄국을 창설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계승되었고
시리아는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스 1세에게 게승되었다가 다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되었다.
페르시아는 그의 네 아들들의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한 셀주크의 분열을 틈타 1095년 군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이 침공해 왔다.
킬리지 아르슬란은 군중 십자군을 이겼으나 1차 십자군을 얕잡아보아 니케아에서 패배,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비록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1118년 말리크의 셋째 아들인 아흐메드 산자르가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나 바그다드에서는 그의 형 마무드 2세가 스스로 술탄을 차처하였다. 1131년 아흐메드 산자르는 형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아흐메드 산자르는 각지에서 일어난 카라한과 반란에 대처하여야 했고 제2차 십자군의 침입에도 맞서야 했다.
1153년 오구즈 튀르크가 반란을 일으켰고 산자르는 축출되었다. 이후 그의 계승자들이 셀주크를 다시 통합하려고 하였으나 십자군 국가들과 비잔티움의 공세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다.
3년 후인 1157년, 산자르가 죽자 제국의 분열을 더욱 가속되었고 아타베그들은 독립했다.
[편집] 제국의 몰락
1194년 이란의 마지막 셀주크 술탄이 전사하고 1200년경 셀주크족의 권력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위대한 술탄 살라딘의 지도 아래 시리아가 셀주크의 세력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루지아도 아르메니아와 함께 셀주크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도 점차 힘을 키워서 독립해 버렸고 결국 예전 셀주크 제국에서 남아있는 곳은 소아시아의 룸 술탄국과 주변뿐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셀주크는 더욱 몰락하여 결국 몽골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했을때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몇몇 에미레이트로 분할되었다. 그중에 하나인 오스만 튀르크가 나중에 다시 대 제국을 세우게 된다.
[편집] 역대 군주
- 투으룰 1세 (1038년 - 1063년)
- 알프 아르슬란 (1063년 - 1072년)
- 말리크 샤 1세 (1072년 - 1092년)
- 마흐무드 1세 (1092년 - 1094년)
- 바르키야루크 (1094년 - 1105년)
- 말리크 샤 2세 (1105년)
- 무함마드 타파르 (1105년 - 1118년)
- 아흐메드 산자르 (1118년 - 1157년)
[편집] 함께 보기
...................<오스만 제국> 14세기-20세기
존속 기간: 1299 - 19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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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دولت ابد مدت Devlet-i Ebed-müddet (불멸의 제국) | |||||
국가: 알라여, 우리의 오스만 제국을 지켜주소서!! | |||||
수도 | 쇠위트(1299년~1326년) 부르사(1326년~1365년) 에디르네(1365년~1453년)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1453년~1922년) 41°01′N 28°58′E / 41.01°N 28.97°E / 41.01; 28.97 | ||||
공용어 | 오스만 터키어 | ||||
정부 형태 | 입헌군주제1 메흐메트 6세 (1918년~1922년) 아흐메트 테브픽 파샤 (1920년~1922년) | ||||
국교 | 이슬람교 | ||||
정부수립 • 성립 • 해체 |
1299년 1922년 11월 17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12,000,000 km² 1.3% | ||||
인구 • 1914년 어림 |
18,520,000명 | ||||
통화 | 리라 | ||||
1입헌군주제는 1876년~1878년, 1909년~1922년까지 시행되었다. |
오스만 제국(오스만 터키어: دَوْلَتِ عَلِیَّهِ عُثمَانِیَّه Devlet-i Aliyye-i Osmâniyye, 터키어: Osmanlı İmparatorluğu)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 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그 영토는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여
20세기 초반에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이 당시 식민지 지역의 종교는 이슬람교에 인해 억눌리기도 했다.
[편집] 국명
서양인이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투르크 내지는 투르크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영어식으로 Ottoman Turks, Turkish Empire라고 표기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이 표현을 그대로 따와 오스만 투르크, 투르크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많이 불렀지만,
현재는 오스만 제국 또는 오스만 왕조라는 표기가 일반적이고 오스만 투르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파디샤, 술탄)의 출신은 튀르크 계열로 궁정의 언어도 오스만 터키어로 불리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의 어휘를 많이 차용한 터키어였지만,
지배 계층은 민족·종교에 관련 없이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튀르크 민족의 국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 내의 사람들은 멸망 때까지 자국을 ‘오스만 가의 숭고한 국가’, ‘오스만 국가’ 등으로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 민족의 국가로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국의 실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오스만 튀르크라는 호칭은 부적절하고, 오스만 제국을 터키라고 부른 것은 외부로부터의 통칭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인 터키 공화국은 정식 국호에 처음으로 ‘터키(터키어: 튀르키에)’를 채용했지만, 오스만 제국을 가리킬 때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뜻의 Osmanlı İmparatorluğu(오스만르 임파라토를루우)나 오스만 국가라는 뜻의 Osmanlı Devleti(오스만르 데블레티)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편집] 역사
오스만 제국은 후세의 역사 전승에 대해 시조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며,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1922년이 해체 연도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오스만 왕조 초기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사료가 부족하고, 사실과 전설이 혼연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편집] 건국과 확장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이 오스만 제국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목민 집단이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일반적으로는 오스만을 지도자로 하는 무슬림 가지(성역에 종사하는 전사)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들 오스만 집단은 주변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영주 및 군사 집단과 싸우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나가,
나중에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오스만 군후국(Osmanlı Beyliği)을 건국하였다.
1326년경 오스만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오르한 1세는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 부르사 점령을 시작으로, 마르마라 해를 넘어 유럽 대륙에 다다를 때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부르사는 곧 오스만 군후국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최초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1346년, 오르한 1세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의 동맹을 계기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에 진출,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개시했다. 오르한 1세의 아들 무라트 1세는 즉위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도나우 강 유역을 잇는 중요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의 에디르네)를 점령,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은 것과 동시에 상비포병군 예니체리를 창설하는 등 국가제도를 정돈하였으며 1389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필두로 한 발칸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무라트 1세의 아들 바예지드 1세는 1396년에 불가리아 북부에서 니코폴리스 전투를 벌여, 이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 한 십자군을 격파, 오히려 영토를 더 크게 넓혔다.
그러나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몽골 北元)에게 패배하였으며, 국내에는 왕자들 간에 후계 싸움이 일어나 제국의 확대는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메흐메트 1세는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그 아들 무라트 2세는 다시 자국을 침공한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안정된 통치를 펼쳤다.
이렇게 국력이 다시 상승하자 1453년, 무라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였다(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다시 태어났다.
하기아 소피아도 첨탑 네 개가 첨가되면서 모스크로 개축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말까지 지상에서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바다에서는 흑해 북해안과 에게 해의 섬들까지 세력을 뻗쳐 흑해와 에게 해를 오스만의 내해로 만들기에 이른다.
이러한 제국을 1512년에 계승한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아랍인 거주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게다가 그동안 맘루크 왕조의 비호 아래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파의 칭호를 양보받아 칼리파를 겸하게 되면서 술탄-칼리파제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19세기에 위조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 내에서의 오스만 제국이 그 중심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
제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재위 1520 년 - 1566년) 때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능히 다른 나라를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영역은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확장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위하면서 우선 베오그라드 정복으로 헝가리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 무슬림에 대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을 쫓아내면서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1526년에는 모하치 전투를 통해 헝가리군을 격파, 헝가리의 땅 대부분을 점령한다. 한편, 동쪽으로는 사파비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까지 손에 넣었으며, 남쪽으로는 예멘에 출병하여 아덴을 정복하였다.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은 쉴레이만은 152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에 걸쳐 포위하였다. 비록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오스만군이 서유럽 내 깊숙이까지 들어와 위협한 이 사건은 당시 서구 국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를 대파시켜, 지중해 거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
쉴레이만의 치세는 이처럼 훌륭한 군사적 성공 외에도 건국 이래 오스만 제국이 형성해 온 국가제도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제도상의 파탄이 없었던 훌륭한 이상의 시대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쉴레이만의 치세는 국가제도의 전환기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였다. 쉴레이만 이후, 전쟁터에서 군주가 앞장서서 출정하는 일도 없어졌으며, 정치조차도 거의 재상이 처리하게 된다.
또, 군사구조를 전환하면서 대포로 무장한 포병인 예니체리를 핵심으로 한 상비군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그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하여 유지비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에 따라 기병인 시파히층은 몰락해 갔다. 종래 이러한 변화는 쉴레이만이 죽고 난 후, 제국의 쇠퇴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가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크게 전환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고
지중해 무역이 쇠퇴해지고 대서양이 크게 번성하자 오스만제국의 무역이득이 줄어들어 내정이 어려워지게 되고 스페인의 강대국이 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지위가 낮아지게 됐다.
[편집] 국내정치의 혼란과 쇠퇴
쉴레이만이 죽은 지 5년 후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는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에게 패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제국보다 열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며, 그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였으며 또 지중해의 해상권이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제국 함대는 패전한 지 반년 만에 동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1573년에 키프로스 섬을, 다음해에는 튀니스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힘이 약해졌다. 1699년 헝가리를 잃고, 다음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군주로부터의 민주혁명과 각 민족별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흐름 선상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는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30년에는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제국 내외로부터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고, 결국 유럽측으로부터 빈사상태인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8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포병)를 폐지하고 외무성과 내무성, 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유럽에 유학생을 대거 파견해 인재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칙령을 공포한 이후 전면적인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행정에서부터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탄지마트(Tanzimat, تنظيمات)가 그것이다. 탄지마트 정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의 전환을 진행시켜 나갔다.
1853년에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 크림 전쟁이 일어났지만, 영국 등의 가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당시, 영국 등의 지지를 획득할 필요성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1856년에 개혁칙령을 발포하여 비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겠노라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제2단계에 들어간 탄지마트는 종교법(샤리아)와 서양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새로운 법전 제정, 근대 교육학교 개설, 근대적 토지사유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 시행 등 개혁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 무역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가 되어갔다. 그 결과, 유럽 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만다.
탄지마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로 끝나자 제국에는 새로운 개혁이 요구되었다. 1876년,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의 지도 아래 ‘아시아 최초의 성문헌법’인 제국헌법(통칭 미드하트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의 법치국가이며, 제국 의회 설치와 오스만의 신민으로서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완전한 평등을 누린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헌법을 발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패하여 실패로 끝났다.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군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서쪽의 산 스테파노까지 진군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전제체제의 부활을 바랐던 압뒬하미트 2세는 러시아와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강화하는 한편,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미드하트 헌법을 폐지하였다.
이날 이후, 좌파는 국외추방 또는 사형을 각오해야 했고, 압뒬하미트 2세는 ‘피의 황제’로 불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정 파산 이후 제국 경제를 장악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한 자본 투하가 진행되어,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해갔다. 또한 서구의 공업제품과 경합하지 않은 섬유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차츰 민족자본이 자라기 시작하고, 전제정치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이 확대됨으로써, 훗날의 헌정 부활 이후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의 등장을 준비했다.
1908년에 압뒬하미트 2세는 청년 투르크 당에 의해 폐위되고 1918년 어느 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청년 투르크 당은 메흐메트 5세를 황제로 모시고 마드하트 헌법을 부활하고 개정하였으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의 평등’이 ‘터키인으로 한정한 평등’으로 바뀌고 아랍인들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의 원인이다. 이 결과 알바니아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편집] 제1차 세계대전
이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 동맹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후, 그리스한테 침공을 받아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되는데,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2년경부터 케말 파샤(장군)의 지휘아래 그리스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에서 도주하는 그리스군을 이스탄불에서 또 대파함으로서 그리스 영토 일부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등 그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現 터키 공화국의 영토로 고정되었다.
[편집] 멸망
메흐메트 6세(재위 1918-1922)가 폐위됨으로써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편집] 정치
중앙의 경우, 정치적 권력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고 있었으며, 대재상(사드라잠) 이하 재상(와즈르)들이 군주를 보좌하였으며,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대재상 이하 재상들과 군정장관, 재무대신, 시종장, 서기관장 등으로 구성되는 최고회의(디완)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 17세기에 군주가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대재상이 군주의 대행자로서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정치권력이 궁정 내 최고회의장에서 대재상이 거처하는 공저로 옮겨갔다.
중앙정부의 관료기구는 군인관료(카프쿨루)와 법관관료(울라마), 서기관료(캐티프)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있다. 군인관료 가운데 능력이 특출한 자는 궁정에서 술탄의 시중을 드는 시동이나 경비병을 거쳐 예니체리 군단장이나 현지사 내지는 주지사에 채용되어 종반에는 중앙정부의 재상이나 대재상이 되었다. 법관관료에게는 군 행정을 맡아 재판을 하는 카드 외에도 메드레세(종교학교)의 교수 등의 공직을 맡고 있었다.
그 밖에도 환관도 중용하여 환관 출신의 주지사나 재상의 수가 적지 않다는 점도 오스만의 인적 다양함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부터는 개혁 정책에 따라 서구의 제도를 모방한 기구로 바뀌어갔다. 예를 들자면, 서기관장은 외무대신으로 개편되었고 최고회의는 내각회의로 바뀌었으며 대재상은 사실상 내각을 책임지는 수상(총리)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법이 대거 도입되어 세곡 법정이 개설되었음에도, 이슬람 국가로서의 전통적인 제도나 풍습 등은 후반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이슬람은 나라의 근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적인 제도는 제국이 멸망한 후 터키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추진된 급속한 세속화 개혁에 따라 소멸되어갔다.
[편집] 행정
제국의 영토는 직할지, 자치구, 속국으로 구성된다.
속국의 경우 군주 임명권을 제국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을 뿐, 그외 다른 것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자율에 맡기고 있었다. 크리미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헤자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자치구는 중앙정부로부터 총독이 파견되는 것 이외는 현지의 유력자에게 정치를 맡겼으며 잉여금을 중앙정부에 상납하였다. 이집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직할지는 주(대도시), 현(변경 중소도시), 군(마을)으로 나뉘었다. 각 군마다 군사-행정 재판관인 카드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현과 주에는 각각 산자크베이(현지사), 베이레르베이(주지사)가 배속되어 관할구역 내의 군사에 대한 통괄권을 행사했다.
[편집] 군대체제
군대조직은 크게 지방의 티마르(군사봉토)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징세권을 행사하던 지방 상비군인 시파히와 중앙 상비군인 카프쿨루로 분류되었다.
카프쿨루의 인원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제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 자제들을 징집하는 것으로 충당하였다. 카프쿨루 군단은 수행임무에 따라 7대 단위 부대(아제미, 예니체리, 제베지, 톱추, 토파라바즈, 훔바라즈, 라음즈)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최정예인 예니체리는 화기가 등장하던 16세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유럽은 상비군을 갖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편집] 제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의 국가형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유럽의 역사학자들이 전형적인 동방의 전제제국으로 간주하는 반면,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은 이슬람 전통에 근거하는 세계 제국으로 칭송해왔다. 또 19세기 말 이후에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이 강조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기원은 터키계의 유목민 국가에 있다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20세기 전반에는 유럽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비교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룸(로마 제국의 황제)을 자칭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임명권을 통해서 동방정교회를 지배했었다는 것이 동로마의 황제교황주의의 연속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나면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보는 설도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의 국가체제가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무라트 1세의 무렵부터로 추정되고 있다. 제국이 확대함에 따라 정비되어 온 체제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면서, 군주를 정점으로 중앙집권제를 실현하였다. 이것을 ‘고전 오스만 체제’라고 부른다.
[편집] 사회
오스만 제국은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왕조의 전통을 이었으나, 몽골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도 받아 이슬람적이면서도 동시에 투르크적인 국가를 건설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거느림에 따라 여러민족들과 여러 종교들, 종파가 서로 공존하여 비이슬람적인 문화에 대해서도 너그러웠으며, 통치에 있어서도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총독이나 그 지방 세력자의 자치에 맡겼다.
오스만 제국이 비이슬람 문화에 대해서도 너그러웠다는 사례를 하나들자면, 쉴레이만 대제 때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이스탄불에서 무슬림에 의한 반유대교도 폭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상비군을 파견하여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교도와의 상호공존을 위해 같은 무슬림을 진압한 것이다. 이는 중세 후반부터 근세 초기에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민중의 반유대 폭동을 진압하지 못한 것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
오스만 제국은 다언어 사회였던 것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공식적으로는 투르크 언어가 사용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각각의 지방 집단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 공문서에는 투르크어가 사용되었으나 투르크족이 아닌 민중에게 전달될 때에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달되는 일들이 흔했다. 때로는 칙령이나 칙어도 그리스 언어 등으로 쓰이기도 했었다.
제국 내의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아랍어가 공용어나 마찬가지로 쓰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 이외에 제2, 제3의 언어를 배워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흔했다. 다언어사회에 대한 사례를 한가지 들자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투르크어 이외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집] 문화
오스만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창적인 이슬람적인 투르크 문화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미술에서는 비잔티움 양식을 도입한 이슬람 사원이 건축되었고, 문학에서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잇는 궁정문학이 발달했었다. 그외에도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도 발달했었다.
[편집] 역대 군주
-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입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역대 군주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서양의 Prince에 해당하는 술탄으로 지칭되었고, 메흐메트 2세이후로는 황제라는 의미의 Padishah, Shahanshah, Sultan-es-selatin(Sultan of Sultans), 및 로마황제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메흐메트 2세 이후 제정(帝政)이 된 후에 기존의 술탄, 여술탄의 칭호는 황자, 황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역대 군주를 가리켜 술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관용적으로 용납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편집] 참조
오스만 제국 시대의 술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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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기 (1299년–1453년) | 오스만 1세 · 오르한 1세 · 무라트 1세 · 바예지드 1세 · 메흐메트 1세 · 무라트 2세 · 메흐메트 2세 |
성장기 (1453년–1683년) | 바예지드 2세 · 셀림 1세 · 쉴레이만 1세 (대제) · 셀림 2세 · 무라트 3세 · 메흐메트 3세 · 아흐메트 1세 · 무스타파 1세 · 오스만 2세 · 무라트 4세 · 이브라힘 1세 · 메흐메트 4세 |
정체기 (1683년–1827년) | 쉴레이만 2세 · 아흐메트 2세 · 무스타파 2세 · 아흐메트 3세 · 마흐무트 1세 · 오스만 3세 · 무스타파 3세 · 압뒬하미트 1세 · 셀림 3세 · 무스타파 4세 · 마흐무트 2세 |
쇠퇴기 (1828년–1908년) | 압뒬메지트 1세 · 압뒬라지즈 · 무라트 5세 · 압뒬하미트 2세 |
멸망기 (1908년–1923년) | 메흐메트 5세 · 메흐메트 6세 |
크느크(Kınık) 오우즈 튀르크족은 10세기경 무슬림 세계의 변방이었던 카스피 해와 아랄 해 북쪽인 오우즈 연맹의 얍구 칸국 살던 사람들로, 셀주크 가문은 이들의 분파였다.[24]
11세기에 셀주크 일파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아나톨리아 동부로 이주하였으며,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말라즈기르트)에서 승리하면서 이 땅은 오우즈 튀르크족의 새 터전이 되었다.
셀주크의 승리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술탄국이 부상하여, 중앙 아시아 일부와 이란, 아나톨리아, 서남 아시아를 아우르던 셀주크 제국의 개별 분파로 성장하였다.[25]
1243년에 셀주크 군대는 몽골인들에게 패배하고, 제국의 패권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1세가 지배하던 일개 튀르크 공국이 200년이 넘는 세월간 발전하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레반트를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26]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대에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였다.
16~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으며,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점차 진출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종종 충돌하였다.[27]
이에 맞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지키고자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베네치아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고대 해상로를 독점한 오스만 제국은 인도양에서 포르투갈과 자주 대립하였으며, 1488년 희망봉의 발견 이래 점차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서 동맹국편으로 참전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세계 대전 당시 막대한 인명 희생을 부른 아르메니아 학살도 이때 일어났다.[28]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정전 협정으로 승전국인 연합국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분리시키려 하였다.[26]
[편집] 공화정 시대
- 이 부분의 본문은 터키 공화국의 역사, 아타튀르크의 개혁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연합군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하면서 터키의 민족 운동이 촉발되었다.[3]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주도로 세브르 조약 규정을 철회시키기 위한 터키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29]
1922년 9월 18일, 점령군은 퇴각하였으며, 새로운 터키의 나라가 건국되었다. 11월 1일에 새로이 열린 의회는 공식적으로 술탄국의 폐지하여, 623년간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에서 신생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그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923년 10월 29일에 새 수도 앙카라에서 터키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하였다.[3]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옛 오스만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속 공화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3] '가족명에 관한 법'에 따라,
1934년에 터키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아버지 터키인, 즉 '국부')라는 명예 성명을 부여하였다.[2]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대부분 터키는 중립을 취하였으나, 1945년 2월 23일에 의례적인 의미로 연합군측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국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30] 소비에트 연방이 터키 해협에 군사 기지를 요구하는 가운데 옆 나라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내전을 벌이면서 위기 상황이 조성되자, 1947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게 된다. 이 독트린에서 미국은 터키와 그리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음을 밝혔으며, 그 결과 미국이 대규모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31]
터키는 한국 전쟁에서 국제 연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십여 년간 내전이 벌어졌고, 1974년 7월에 그리스인들의 군사 정변으로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이 실각하고 니코스 삼프손이 독재 정권을 세우자, 터키는 1974년에 키프로스 공화국을 침공하였다. 9년 뒤에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나라는 오직 터키의 승인만 받은 나라이다.[32]
1945년에 일당제 시대가 종식된 이후, 다당제 시대에는 수십여 년간 긴장을 초래하였으며, 1960년대에 1980년대 사이에 정치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면서 1960년, 1971년, 1980년에 군사 정변이 일어났으며, 1997년 터키 군부 협정도 하였다.[33] 한편 1980년대부터 터키 경제가 자유화되어 이 나라의 경관이 바뀌게 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높은 성장과 위기가 잇따랐다.[34]
[편집] 정치
- 이 부분의 본문은 터키의 정치입니다.
터키는 의회 제도를 채택한 대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성립한 이래 터키는 강력한 세속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35] 터키 헌법은 이 나라 법의 근간이다. 헌법에서 정부의 주요 원칙을 밝혔으며, 터키를 단일 중앙 국가로 규정하였다.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며 주로 의례적인 역할을 맡는다. 대통령은 임기가 5년으로 간선제로 선출된다. 현직 대통령은 압둘라 귈로, 아흐메트 네즈데트 세제르의 뒤를 이어 2007년 8월 28일에 의회 결선 투표로 선출되었다.[36] 행정권은 총리와 내각이 행사하며,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터키 대국민의회의 몫이다. 사법부는 행정부 및 입법부와 독립되어 있으며, 헌법 재판소에서는 터키의 법률이 헌법에 일치하는지를 결정한다. 행정 법원은 행정 소송의 마지막 심급 재판소이며, 대법원은 그 밖에 다른 소송을 맡는다.[37]
총리는 의회에서 정부의 신임을 묻는 투표를 통해 선출되며, 대개 원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선출된다. 터키의 현직 총리는 전직 이스탄불 시장 출신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으로, 여당인 정의개발당은 보수 정당으로 2001년 경제 위기 직후에 열린 2002년 터키 총선거에서 34%의 득표율로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38] 2007년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46.6%를 득표하여, 원내 과반을 지킬 수 있었다.[39] 총리와 내각 국무위원은 의회 의원이 될 수 없으나, 대부분은 의원 출신이다. 2007년에 국가 세속주의와 입법부의 사법 기능을 놓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선에서는 과거에 이슬람 정당에 소속된 바 있던 압둘라 귈이 당선되어 논란이 있었으며,[40] 정부에서 대학교 내 두건 착용 금지를 철회하려는 개혁안을 놓고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기도 하였다.[41]
1933년부터 터키는 남녀 양성의 보통선거를 규정하고 있으며, 18세 이상의 모든 터키 시민은 투표권이 있다. 2004년 기준으로 터키에는 50개의 정당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념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다.[42] 헌법 재판소는 반(反)세속주의나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에 공적 자금 지원을 박탈하거나 아예 해산시킬 수 있다.[43][44]
터키 의회는 5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가 4년인 이들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81개의 행정 주를 대표하여 85개 선거구에서 선출된다. (이스탄불은 선거구가 셋으로 분리되며, 앙카라와 이즈미르는 각각 둘로 분리되는데, 이 도시들은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의회에 절대 다수당이 없고 군소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최소 10%의 득표를 얻은 정당만 원내 대표자를 배출할 권리가 있다.[42] 이 제한선 때문에 2007년 선거에서 세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였다. (2002년에는 두 정당만 진입)[45][46] 그러나 입후보자의 원내 교섭 단체 구성을 통해 현재 일곱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소속 후보자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최소 10%의 표를 얻어야 의원에 선출될 수 있다.[42]
[편집] 행정 구역
- 이 부분의 본문은 터키의 행정 구역입니다.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다. 터키 영토는 행정구역상 81개 주로 나뉜다. 주는 인구조사를 목적으로 7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는 행정 조직을 이루지는 않는다. 각 주는 구역으로 세분되는데, 총 923개의 구역이 있다.
주의 이름은 보통 주도의 이름에서 따오는데, 하타이 주(주도: 안타크야), 코자엘리 주(주도: 이즈미트), 사카르야 주(주도: 아다파자르)처럼 예외인 경우도 있다. 인구가 많은 주는 이스탄불 주(1,200만 이상), 앙카라 주(440만 이상), 이즈미르 주(370만 이상), 부르사 주(240만 이상), 아다나 주(200만 이상), 콘야 주(190만 이상)이다.
국내 최대 도시이자 공화국 성립 이전에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터키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지이다.[12] 터키 인구의 70.5%가 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47] 인구 백만을 넘기지 못하는 주가 18개가 있고, 백만에서 50만 사이의 주도 21개나 있다. 인구 10만 이하의 주는 2개가 있다.
[편집] 외교
터키는 국제 연합(UN, 1945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1961년), 이슬람 회의 기구(OIC, 1969년),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경제 협력 기구(ECO, 1985년), 흑해 경제 협력 기구(BSEC, 1992년), G20 공업화 국가(1999년)의 창립 회원국이다. 2008년 10월 17일, 터키는 2008년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선거에서 151표를 얻어 서유럽과 여타 지역을 대표하여 오스트리아(132표)와 더불어 UN 안보리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48] 터키의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지위는 2009년 1월 1일부터 발효하였다.[48] 터키는 1951년 ~ 1952년, 1954년 ~ 1955년, 1961년에도 안보리 이사국을 맡은 바 있다.[48]
터키는 전통적으로 서방 지향적인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터키 외교 정책에서 대유럽 관계는 늘 중요한 사안이었다. 터키는 1949년에 유럽 평의회에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연합의 전신)의 준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63년에 앙카라 협정으로 준회원국 지위를 얻었다. 수십 년간 정치 교섭 끝에 터키는 1987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 정식 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92년에는 서유럽 연합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1995년에는 유럽 연합과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으며 2005년 10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유럽 연합과 정식 가입 협상에 돌입하였다.[49]
터키가 큰 나라인데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이견이 큰 탓에 유럽 연합 가입 절차는 최소 15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50] 이와 관련한 논란 가운데는 1974년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둘러싸고 유럽 연합 회원국인 키프로스 공화국과 겪고 있는 분쟁도 있다. 1974년부터 터키는 사실상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키프로스 공화국을 이 섬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에 사실상 섬 북부를 통치하고 있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지지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터키만 이 나라를 승인하고 있다.[51]
1991년 8월 25일 벨라루스가 독립하자, 터키는 1991년 12월 16일 세계 최초로 벨라루스를 승인하였다. 이어서 양국은 1992년 5월 25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벨라루스는 앙카라에, 터키는 민스크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바에 포르투갈이 식민지화를 시도하자 자바의 이슬람교 술탄은 이에 저항하며,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청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해 거대한 배와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슬람 형제의 나라를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수도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52][53]
[편집] 대미 관계
터키 외교 관계의 다른 주요 사안은 미국과의 관계이다. 냉전기에 소비에트 연방이 자주 터키를 위협하면서 1952년에 터키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냉전기에 미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54] 냉전이 종식되고 국제 정치 환경이 변화하자 터키가 중동, 캅카스, 발칸 지역과 가깝다는 점이 터키의 전략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부상하였다.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와 가까운 곳에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인지를리크 공군 기지를 두고 있어서 미국의 대시리아 및 대이라크 군사 작전에 중요할 뿐 아니라, 세속 민주주의 국가이며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터키 정부는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 되었다.[54] 덕분에 터키는 미국에게서 정치, 경제, 외교상의 지원을 받으며,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도 도움이 된다.
[편집] 대한 관계
1980년대에 터키는 대한민국과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의 경제 강국과 자동차나 고속 열차같은 운송 장비의 공동 생산에서 전자 제품, 가전 제품, 건설 자재, 군사 설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점차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터키는 한국 전쟁 참전국으로서 경제가 성장한 한국과의 경제협력 증진을 희망하고 있다.
터키는 1949년 8월 13일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55],
1950년 7월에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터키는 한국전쟁 시,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로 파병하였다.
1950년 10월 17일, 터키 제1여단 5400여명 병력이 여단장 타신 야스지 준장의 지휘 아래 부산항에 상륙하였다. 터키군은 곧장 전장에 투입되어 평양 탈환 작전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터키군은 북두칠성을 방향 삼아 북으로 북으로 진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일곱별을 수놓은 부대 마크를 갖게 되었다. 휴전되기까지 3년 동안 터키군은 군우리(軍隅里) 베가스 고지, 군포(軍浦) 등 곳곳에서 유엔 깃발 아래 용감히 싸웠다. 특히 군우리 전투는 터키군의 격전이었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중공군 약 2개 사단에 포위당한 터키군 제1여단은 사흘밤 사흘낮을 필사적으로 싸워 간신히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터키군은 전사 717명, 포로 229명, 전상 5247명, 실종 167명을 기록했다. 이 같은 피해는 참전 유엔군 가운데 미군 다음으로 큰 것이었다. 휴전 후에도 터키 부대 1개 여단 병력이 계속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에 주둔, 서부 휴전선을 지켜왔다. 1957년 3월에는 대한민국과 공식적으로 수교하였으며, 같은 해 6월 한국 공관을 설치하였다. 1960년 7월 터키 군사혁명 정부 결정에 따라 1개 중대 병력으로 감축, 미군 제2사단 38연대 2대대에 배속되었다. 1966년 7월 7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 자리잡은 주한 터키군 제16중대는 16년에 걸친 한국 주둔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터키 부대 주변에는 사고도 더러 있었다. 1956년 터키 병사 1명이 마을 한국 여자를 범했다가 엄격한 군율로 교수형을 당하기 하였다.
또 1960년 여단 철수 때 몇몇 터키 군인들이 한국에 남겠다고 집단탈영, 수란을 피웠던 일도 있다. , 1966년 7월 유엔군 산하 터키 중대를 철수시켰다. 16년 동안 10개 여단 6개 중대가 교체 근무하기까지 한국을 다녀간 터키군은 모두 6만여명이다. [56]
1972년 서울 공관을 설치하였다.[출처 필요] 1977년 12월 대한민국은 통상 진흥 및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출처 필요] 1982년 12월 대통령 에브렌, 1991년 총리 아크불루트가 방한하였다. 양국은 1972년 사증 면제 협정[출처 필요], 1974년 문화 협정[출처 필요], 1977년 통상 진흥 및 경제 기술 협력 협정[출처 필요], 1979년 항공 협정[출처 필요], 1986년 이중 과세 방지 협정[출처 필요], 1994년 투자 보장 협정[출처 필요], 1997년 섬유 협정[출처 필요], 1999년 원자력 협력 협정[출처 필요] 등을 체결하였다.
한국의 현대로템은 1996년 아다나시 경전철을 터키에 처음 수출한 이후 10년 동안 품질과 납기 등 사업수행능력에서 현지의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2008년 7월에는 투바사스 디젤동차(84량)을 수주하는 등 현재까지 터키에만 7개 철도사업(총 806량, 16억 달러)을 수행하고 있다.[출처 필요] 2008년 11월, 현대로템은 터키 철도항만청에서 발주한 보스포러스 전동차 440량의 최종 공급자로 선정돼 현지에서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1조원(5억8000만 유로)에 이르러, 창사이래 최대규모의 전동차 수주 계약을 따냈다. [57]
또한 터키와 대한민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돈독한 동맹과 우정관계를 중요시 한다.
[편집]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터키와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 투르크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터키는 중앙 아시아까지도 경제 및 정치적 관계를 뻗어날 수 있게 되었다.[58] 중앙 아시아 국가와 터키의 관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터키의 제이한 항구 사이에 수십억 달러의 석유 및 천연 가스 파이프라인를 건설한 일이었다. 이는 바쿠-트빌리시-제이한 파이프라인으로 불리며, 터키가 서방의 에너지 공급로가 되어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제르 영토를 터키가 점령하면서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이 아직 폐쇄되어 있다.[59]
[편집] 군사
터키 군대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경 수비대와 해안 경비대는 평시에는 내무부에서 관할하며, 전시에는 육해군의 지휘를 받는데 이 때는 국내 법 집행과 군사 기능을 둘 다 수행한다.[60]
터키 군대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미국 군대 다음인 두 번째로 규모가 크며, 산하 다섯 군 조직에 복무하는 총 병력 수는 1,043,550명이다.[61] 결격 사유가 없는 모든 건강한 터키 남성 시민은 교육 수준이나 직업 위치에 따라 3주에서 15개월간 군대에 복무해야 한다. 터키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대체 군 복무 제도도 없다.[62]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와 유엔은 정기적으로 병역거부권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을 터키에 요구해왔다. 최근 터키 정부는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1개월정도의 구금 후 석방하는 등 심한 처벌을 삼가고 있는 추세이다.[63]
2009년 기준으로 터키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와 더불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핵 공유 정책에 참가하고 있다.[64] 인지를리크 공군 기지에 B61 핵 폭탄 90기가 있으며, 이 가운데 40기는 터키 공군용으로 할당되어 있다.[65]
1998년, 터키는 20년간 미화 1,600억 달러를 들여 전차, 전투기, 헬리콥터, 잠수함, 군함, 돌격소총 등 다양한 분야의 군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66] 터키는 합동 전폭기(JSF) 계획의 3등급 기여국이다.[67]
1950년대부터 터키는 국제 연합이나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소말리아나 구 유고슬라비아의 평화유지 활동을 하고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연합군을 지원하는 등 국제적인 군사 작전에 참여하였다. 터키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에 36,000명 규모의 군대를 배치하였으며, 2001년부터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 안정화 군대과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일부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하였다.[61][68]2006년에 터키 의회에서는 이스라엘-레바논 분쟁이 일어나면서 국제 연합 레바논 임시 주둔군(UNIFIL)의 일환으로 해군 순찰선과 700여명 병력의 지상군을 파병하였다.[69]
터키의 합동 참모 총장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료 회의는 의회에 대하여 국가 안보 및 국방을 위한 적절한 군사 준비를 책임진다. 그러나 선전 포고를 하거나 터키군을 외국에 배치하거나 또는 외국 군대를 터키에 주둔케 허가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의회의 몫이다.[60] 터키 군대의 실질적인 사령관은 2008년 8월 30일부터 재직 중인 합동참모총장 일케르 바쉬부으이다.[70]
[편집] 경제
터키는 구매력 평가 대비 국내총생산 세계 15위,[71] 명목 국내총생산 17위[72]를 기록하고 있다. 이 나라는 경제 개발 협력 기구(OECD)와 G20의 창립 회원국이다.
1923년에서 1983년까지 터키 공화정이 들어서고 60년간 터키는 대개 국가주의적 정책을 고수하여 정부 예산을 엄격하게 계획하고, 개인 부문 참여, 대외 무역, 외화 유통, 외국인 직접 투자에 정부가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1983년부터 투르구트 외잘 총리가 일련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경제 정책이 국가주의에서 탈피하여 개인 부문과 시장 경제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34] 자유화 개혁 덕분에 터키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1994년과 1999년(그 해 지진 발생 후),[73] 2001년에[74] 갑작스러운 침체와 금융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1981년에서 2003년 사이에 터키의 연간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평균 4%를 나타내었다.[75]
추가적인 재정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공공 부문 적자가 커진데다 광범위한 정치 부패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은행 부문이 허약해졌으며, 거시 경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76]
2001년 경제 위기와 당시 재정 장관 케말 데르비쉬가 주도한 개혁 이후로 인플레이션은 한자릿수로 떨어졌으며, 투자자 신뢰도와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였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은 2008년 터키의 물가상승률을 6%로 예측하였다.[77] 터키는 대외 무역과 투자에 대한 정부 통제를 줄이고,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여 점차 자국 시장을 개방하였는데, 여러 경제 부문을 개인과 외국인에게 넘겨 자유화하는 정책은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계속되었다.[78]
2002년에서 2007년까지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평균 7.4%를 나타내었는데,[79] 덕분에 터키는 같은 기간에 세계적으로도 빠른 경제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2008년에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4.5%로 떨어졌으며,[80] 2009년 초에 터키 경제는 세계 금융 위기의 영향을 받아 국제통화기금은 그 해의 침체율을 5.1%로 예측하였으며, 반면 터키 정부는 3.6%로 추산하였다.[81]
터키 경제는 더 이상 농촌 지역의 전통적인 농경이 주류가 아니며, 대부분 국토 서쪽 주에 집중된 주요 도시의 산업 단지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서비스 부문도 확대되면서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다. 2009년에 농업 부문은 국내 총생산의 8.8%에 머물렀으며, 산업 부문은 27.5%, 서비스 부문은 63.8%를 나타내었다.[80]
유럽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터키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08년 유럽 연합 평균치의 45%로 나타났다.[82]
관광 부문은 지난 20년 동안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터키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8년에 터키를 방문한 사람은 30,929,192명으로, 터키 재정 수입에 미화 219억 달러를 기여하였다.[83]
그 밖에 터키 경제에서 중요한 경제 부문은 은행업, 건설, 가전 제품, 전기, 섬유, 석유 정제, 석유 화학 제품, 식품, 광업, 철강, 기계 산업 및 자동차를 들 수 있다. 터키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2008년에 1,147,110대 차량을 생산하여 유럽에서 자동차 생산국 6위(영국보다는 낮고 이탈리아보다는 높은 순위), 세계 기준으로는 15위 생산국이었다.[84][85]또 터키는 조선업 선도국으로 2007년에 이 나라는 선박 수주량 기준으로 중국, 대한민국, 일본 다음으로 세계 4위를 기록하였으며, 호화 유람선 수주량 기준으로도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에 이어 4위였다.[86]
최근 몇 년 동안 터키의 고질적인 고물가가 통제를 받게 되어, 경제 개혁의 성과를 공고히하고 불안정한 경제의 영향을 없애고자 2005년 1월 1일부터 신 터키 리라화를 발행하였다.[87] 2009년 1월 1일부터 신 터키 리라가 본래 이름인 터키 리라로 개명되어 새 은행권과 동전이 도입되었다. 경제 개혁이 지속된 결과 2005년에 인플레이션은 8.2%로, 실업률도 10.3%로 떨어졌다.[88] 2004년, 총 가처분소득의 46.2%가 소득 최상위 20%에 몰려 있으며, 소득 최하위 20%에게는 총 가처분소득의 6%밖에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89]
터키는 2005년에 유럽 연합과 맺은 관세 동맹 덕분에 수출 예정 산업 생산이 증가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유럽 연합의 대터키 외국인 투자로 이익을 보고 있다.[90] 2007년에 수출액은 미화 1,1153억 달러에 이르렀다.[80] (주요 수출 상대국: 독일 11.2%, 영국 8%, 이탈리아 6.95%, 프랑스 5.6%, 에스파냐 4.3%, 미국 3.88%; 유럽 연합에 대한 총 수출 56.5%) 그러나 같은 해 수입액은 1,621억 달러로 수출액보다 더 많아[80] 무역 수지를 위협하였다. (주요 수입 상대국: 러시아 13.8%, 독일 10.3%, 중국 7.8%, 이탈리아 6%, 미국 4.8%, 프랑스 4.6%, 이란 3.9%, 영국 3.2%; 유럽 연합 총 수입 40.4%; 아시아 총 수입 27%)[91][92] 2008년 터키의 수출액은 1,418억 달러이며, 수입액은 2,048억 달러였다.[80]
터키의 외국인 직접 투자(FDI)는 낮은 수준을 보이다가 2007년에는 219억 달러를 투자받았으며, 이후에는 투자액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93] 민영화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터키가 유럽 연합과 가입 협상을 시작하면서 안정성을 얻었으며, 강력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고, 은행업과 소매업 및 통신 부문에서 구조 개혁을 단행하면서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78]
[편집] 교통
터키에 있어서 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여객·화물 모두 육상의 도로교통이다. 철도는 국철(TCDD)이 존재하고 10,940km의 노선을 보유, 운영하고 있으나, 극히 편수가 적어서 불편하다. 또한, 역사・노선・기타 설비도 정비가 불충분하여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다.
공화국 수립 이전인 1856년에 시작된 철도건설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자본에 의한 것이었으나 철도는 그후 전부 국유화되었다. 국토 전역에 미치는 철도는 물자수송의 주요수단이 되고 있다. 주요간선은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을 횡단하여 이스탄불에 이르는 바그다드 철도이다.
수도 앙카라와 지중해, 에게해, 흑해 연안의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는 잘 발달해 있으나 폰투스 산맥과 타우루스 산맥이 흑해와 지중해에 연해 있기 때문에 해안지방의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은 발달해 있지 않다.
예부터 해상 교통이 활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터키 최대의 항구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해 중간에 위치한다는 좋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물자의 거래가 성행한다. 에게 해안의 이즈미르, 지중해안의 이스켄데룬, 흑해안의 삼순과 트라브존도 주요항구이다. 근년에는 항공기의 발달로 국내항로가 정비되었는데 이스탄불은 국제항공상의 요지가 되어 있기도 하다. [94]
이스탄불-인천 노선은 1997년 항공로가 개설된 이후 터키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지정항공사로서 운항을 해오다 외환위기 등으로 수익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1998년 노선을 폐지했고, 유예기간을 거쳐 2003년 10월 운수권이 건교부에 귀속됐다. 2006년 현재 터키항공이 주 2회 정기편을, 대한항공은 건교부로부터 전세기 운항허가를 받아 주 3회 운항하고 있다. [95]
[편집] 사회
[편집] 인구 현황
200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터키 인구는 7,150만 명으로, 연간 인구 성장률은 1.31%이다. 평균 인구 밀도는 km²당 92명이다.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은 70.5%이다. 15~64세 연령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 총 인구의 66.5%를 점하며, 0~14세 연령 집단은 26.4%이고, 65세 이상의 연령대는 7.1%를 차지한다.[96][97] 기대 수명은 남성은 70.67세, 여성은 75.73세이며, 전체 평균은 73.14세이다.[80] 6~15세 사이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의무 무상 교육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문자해득률은 남성 95.3%, 여성 79.6%로, 전체 평균은 87.4%이다.[98] 여성의 문해율이 낮은 이유는 국토 남동부 주에 사는 아랍인과 쿠르드인의 전통 관습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99]
터키 헌법 제66항에서는 "시민권을 통해 터키 국토 내에 속하는 사람"을 "터키인"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법적인 의미의 "터키인"은 인종상의 정의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터키 국민 대다수가 터키 민족이다.
그 밖에 주요 민족 집단(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셀주크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미 널리 터키화되었다)으로는 압하스인, 아자르인, 알바니아인, 아랍인, 아시리아인, 보스니아 무슬림, 체르케스인, 헴신인, 쿠르드인, 라즈인, 롬족, 자자스인, 러시아인, 조지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고,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은 (로잔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인정된 소수 민족이다.
1923년 1월 30일에 체결된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상호 합의가 1920년대에 발효되어 거의 150만에 이르는 터키내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 그리스내 터키인 약 500,000 명이 터키로 서로 이주하였다.[100]
서유럽에 기원을 둔 소수 집단으로는 중세 시대부터 터키 땅(주로 이스탄불[101]과 이즈미르[102])에서 살던 레반트인(대부분 프랑스, 제노바, 베네치아 혈통이다)과, 19세기부터 터키에 살던 보스포로스 독일인과 이스탄불 폴란드인이 있다. 또 아프리카계 터키인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국토 서부 해안 도시에 살고 있으며, 주로 지역 주민과 통혼하여 섞여 산다.
국토 남동부 주에 주로 집중된 쿠르드인은 터키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터키계 민족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세 민족 이외에 다른 소수 민족은 특별한 지위가 없으며, 터키에서 '소수 민족'이란 용어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터키의 인구 조사에서는 인종 관련 수치를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터키의 정확한 민족 분포에 대해 믿을 만한 자료가 없다.[103]
[편집] 언어
터키어는 터키의 유일한 공용어이다. 터키어는 튀르크어군에 속하며 튀르크 어군의 방언 차이가 적은 관계로 다수의 튀르크어군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과의 차이가 적은 편이며 특히 아제르바이잔어와 사이가 가깝다.[출처 필요] 터키어는 2004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5000만 명이 사용하고 있으며 1928년부터 로마 문자로 표기되고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오스만 터키어는 1928년 이후 사멸되었고, 동남부 지역의 아랍계 주민을 제외하고는 아랍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출처 필요]
터키 국민의 언어 분포에 대해서도 신뢰할만한 자료가 없는데, 이유는 마찬가지로 터키의 인구 조사에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03] 그러나 공영 방송국인 터키 라디오 및 텔레비전 회사(TRT)에서는 지역 언어와 아랍어, 보스니아어, 체르케스어, 쿠르드어 방언으로 된 프로그램을 일 주일에 몇 시간 정도 방영하고 있다.[104]
쿠르드족이 밀집해 있는 동부 및 동남부 지역에선 쿠르드어가 일상어로 사용된다.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쿠르드어 말살 정책이 실시되어 쿠르드어 교육 및 서적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2005년부터 독소 조항이 삭제되어 현재 서너 종의 쿠르드어 교재가 시판되고 있다. 2009년 초에 쿠르드어로만 방영되는 TV 채널인 TRT 6이 개국하였다.[105] 그 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는 대도시의 호텔과 관광지 등지에서 사용되며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루마니아어, 불가리아어, 이디시어, 히브리어 등도 소수 사용한다.
[편집] 문화
터키는 오우즈 튀르크, 아나톨리아인, 오스만 제국(이 나라 자체도 그리스-로마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연장이다), 그리고 탄지마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화와 전통이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창출하였다.
원래 이러한 문화 혼합은 터키인들이 중앙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주할 때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106][107] 터키는 종교적인 옛 오스만 제국에서 강력한 정교 분리 정책을 견지한 근대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예술 표현의 방식 역시 다양해졌다. 공화정 초기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극장, 오페라 공연장, 건축 등 순수 예술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였다. 다양한 역사적 요소는 터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터키 문화는 "근대" 서구식 국가가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 종교와 역사적 가치를 지키고 있다.[106]
터키 음악과 문학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 혼합의 좋은 사례인데,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계 및 유럽 세계와 상호 작용하면서 오늘날 터키의 음악과 문학에 터키, 이슬람, 유럽이 섞였기 때문이다.[108] 터키 문학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대개 페르시아 문학과 아랍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스만 말기에 중 특히 탄지마트 이후에는 터키 민속 문화와 유럽 문예 전통이 점차 강해졌다. 가령 문화적 영향의 혼합은 "문화의 충돌과 뒤섞임의 새로운 상징"이라는 형태로 극화하여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의 책과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109]
터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 요소 역시 수백년간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친 여러 전통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비잔티움 건축과 후대의 오스만 건축의 수많은 건축물들이 터키 도처에 남아있으며, 여기에 지역과 이슬람 전통이 절묘하게 섞여있다. 시난은 오스만 건축의 위대한 고전기 건축가로 널리 평가받는다. 18세기부터 터키 건축은 점차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게 되어,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돌마바흐체 궁전이나 츠라안 궁전과 같은 건축물들이 수많은 현대식 마천루와 함께 하나의 도시 경관을 이루어 상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110]
[편집] 종교
터키는 공식 국가 종교가 없는 세속 국가로, 터키 헌법에서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111][112] 세계 무슬림 인구에 관한 2009년 자료에 따르면, 터키에서 7,360만 명의 주민, 즉 전체 인구의 98%가 무슬림이라고 한다.[113] 이들 무슬림 대다수는 순니파(85~90%)이며, 그외 주요 종파로 알레비파(10~15%), 시아파, 12이맘파의 분파가 700~1,100만 명 있다고 한다.[113]
최상위 이슬람 종교 기관은 종무원(터키어: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으로, 하나피 법학파의 이론을 해석하고, 터키에 등록된 모스크 75,000여 곳 활동을 관할하며, 지역과 주의 이맘을 고용하는 일을 맡고 있다.[114] 그러나 2007년 전국적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터키 시민의 96.8%가 종교를 가지고있으며, 무교와 무신론자는 3.2%로 나타났다.[115]
다른 종교를 믿는 소수 민족은 100,000 명 이하로,[116] 주로 기독교인데 대부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나 그리스 정교회(64,000명)이다. 유대교(주로 세파르딤, 26,000여명)를 믿는 종교인들도 있다.[117][118] 퓨 연구 센터의 2002년 보고서에서 터키인 65%가 "종교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였으며,[119]
2005년 유로바로미터 여론 조사에 따르면 터키 시민 95%가 "신은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응답하였다.[120]
사실상 이스탄불과 이즈미르, 마르마라 해 지방과 에게 해 지방 사람들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다. 무신론을 믿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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