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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기 3세기 로마제국 하에서의 박해아 순교

참빛7 2013. 9. 1. 09:51

초기 3세기 로마제국 하에서의 박해아 순교

 

이상규 교수(고신대)

 

 

 

   “순교자의 피는 실로 교회의 기초이다. 죽음으로서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1)라고 했던 2세기의 라틴교부 테루투리아누스의 관찰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기 보다 예언적 진술이었다.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자 순교의 역사였고, 그 피의 터 위에 복음은 확장되었다. 그래서 순교의 역사는 교회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증거, 곧 선교와 순교는 분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경험이지만, 어원적으로도 그러하다. 즉 증인(witness)을 뜻하는 마루투스(μάρτυς)는 동시에 순교(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데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그 사회의 공인된 종교가 되기 전까지는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는 ‘낮선 것’이었고, 이 세상의 기치와는 상합할 수 없는 ‘전도된 가치’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당시의 헬라-로마의 사회나 문화전통으로 볼 때 그것은 ‘야만인의 철학’(barbaros philosophia)이었다.2 따라서 기독교 복음은 그 시대의 가치, 사상, 윤리와 동행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박해와 순교의 길이었다. 그래서 선교는 순교와 통한다.3)
  이 글에서는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까지 곧 4세기 초까지의 로마제국 하에서의 기독교 박해와 순교에 대하여 정리해 두고자 한다. 또 이런 박해의 상황에서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였으며, 박해 하에서 일어난 수다한 순교에 대해 고대사학자 혹은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부기하였다.

1. 초기 3세기 동안의 정치적 환경

  초기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불리한 조건하에 있었다.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간주되었고, 기독교인은 사회의 암적 존재로 간주되었기에 선교는 곧 순교의 길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체계화된 조직이 없었고, 집회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정치적인 집단으로 오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라이얀(Traijan, 98-117) 과 같은 진보적인 황제조차도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에게 보낸 글에서 화제를 대비한 소방대를 조직이 아무리 순수한 비정치적인 목적이라 할지라도 열다섯 이상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지시했을 정도였다.4)
  또 교회공동체는 정상적인 재산의 취득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교회당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다. 교회공동체의 집회소로 독립된 건물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회가 탄생한 이래 230여 년간 독립된 집회소로서의 예배당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초기 3세기 동안의 교회공동체는 가정 교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로마 제국에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새로운 연구5)는 이 분야 연구에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결실은 박해는 분명한 법률, 곧 성문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 플리니가 트라이얀 황제에게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처벌 여부를 질문한 사실이 기독교도들에 대한 처벌 규정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적어도 2세기 초까지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오해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도들이 탄압받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별된 생활방식이었다. 이 점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서(Apology)에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 단어 ‘하기오스’(hagios)는 흔히 성도들(saints)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다르다’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로마인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고, 로마황제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부인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이자 ‘인류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황제 숭배의 거부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기에 기독교는 공인받지 못한 ‘불법의 종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구별된 삶의 방식은 황제숭배의 거부나 이교신전에의 불 참배 등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에서도 그 상이점들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인들은 군인이나 공직에 취임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황제 숭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 관람이나 검투사의 혈투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할 수 없는 비윤리적 관행이었다. 테루툴리아누스는 신자들은 군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가르쳤을 정도였다. 이교의 신들의 신화가 담긴 교과서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반 사회적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고, 이런 점들이 박해의 부수적 요인이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 남여들의 회집, 거룩한 입맞춤 등은 성적 문란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성찬식은 식인의식(cannibalism)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들 또한 박해의 부수적 요인이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제 도시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2. 로마제국 하에서의 박해와 순교

  이제 구체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순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6) 기독교회의 첫 순교자는 스데반이었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순교는 베드로나 요한의 투옥과 함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의 박해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첫 30여 년간은 “나사렛 이단”(행 24:5)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의 박해는 받았으나 로마제국의 물리적인 박해는 없었다. 그러다가 A.D. 64년을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는 ‘우리의 주 그리고 신’(dominus et deus noster)이라고 불리던 황제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에서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313년(동부 323년)까지 계속 되었다. 물론 간헐적인 자유의 기간이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64년 네로황제 박해로부터 250년 데시우스(Decius)황제까지, 둘째 시기는 데시우스 황제로부터 313년 콘스탄틴의 박해 종식까지가 그것이다.

  기독교가 첫 30년간 정치적 박해를 받지 않았던 것은 로마 제국의 유대인 정책 때문이었다. 곧 기독교는 유대 교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이들 또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았던 것이다. 유대인들도 기독교도를 한 이단적 분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유대교는 기독교를 탄압하였고, 로마 제국은 이것을 유대교 내부의 문제로 인식했다(행 18:14-15). 그러나 바울의 이방인 전도로 이방인 사이에서 기독교 개종자가 증가함에 따라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하였고,7)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열기를 띠어 감에 따라 기독교 신자들(특히 이방인)은 자기들과 유대인들의 독립운동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그 결과로 로마 당국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종교임을 인식하게 것이다.8) 네로 시대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바로 이런 새로운 자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2.1 1세기

  그러나 직접적으로 박해의 시원이 된 것은 64년 6월 18일 로마시에서 발생한 대 화제사건이었다. 화제는 키루쿠수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남동쪽 구역에서 발생하여 강한 바람을 타고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화제로 당시 로마의 14구역 중 3개 지역이 전소되었고, 7개 지역은 부분적으로 불탔다.9) 이 화제가 황제의 의도적 방화였다는 의심을 사게 되자 네로(Nero, 54-68)는 화제를 모면한 로마시의 두 구역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임을 착안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워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국민적 신임을 잃고 있던 그는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함으로서 다수의 이교도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정치적인 조처였다. 비록 네로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도적 방화라는 의혹을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집단이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네로가 판단해 볼 때 당시 이교도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음이 분명하다. 당시 그리스도인 집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황제의 신격화나 황제 숭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異敎)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으므로 반사회적 집단으로 매도되기도 했고, 눈에 보이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64년 이후부터는 비밀집단으로 정치적 결사체로 오인받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네로는 기독교인을 탄압함으로서 이교도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네로의 부인 파파야(Pappaea)가 유대교에 동정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대교의 이단이자 신흥 종교 세력인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정치적 효과를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10)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방화의 혐의를 받았으나, 곧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거부와 이교적 제전(祭典)에 동조 하지 않음으로 반사회적 집단으로 오해되었고, 곧 기독교 신자란 단순한 이유(propter nomen ipsum, 벧전4:16)만으로도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고백은 생존의 투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물리적 탄압, 구속, 체포, 처형, 재산몰수, 공민권 박탈 등이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최초의 기독교 박해로서 첫 순교자가 발생한 곳은 티버(Tiber) 강 너머에 있는 네로의 정원이었다고 한다.11) 타키투스와 동시대사람이었던 쥬베널(Juvenal)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그는 산체로 불살랐다고 기록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와 이로 인한 순교를 가장 먼저 언급한 기독교권의 기록으로는 사르디스(Sardis)의 감독(약 70년 경)이었던 멜리토(Melito)였다. 그가 안토니우스(Antoninus)에게 보낸 이 편지글의 일부가 다행스럽게도 유세비우스에 의해 보존되었다.12) 유세비우스 자신 또한 네로는 “신적 종교를 대적한 첫 황제였다”고 지적했다.13)
  유세비우스는 성경 밖의 인물로서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였다고 말한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팔레스틴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Palestine) 제1장에서 그를 “순교자들 중의 첫 사람”이라고 불렀다.14) 황제숭배를 거부하여 집정관 앞에 끌려온 그는 황제이름으로 제의(祭儀, libations)를 행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즉각 처형되었다고 한다. 곧 팔레스틴의 다른 감독이 체포되었다. 그는 피부를 가르듯이 수없이 많은 채찍으로 맞고, 고문당하여 손마디가 어긋나기까지 했으나 그는 꿋꿋이 참았다고 요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핍박자의 의도는 한 개인에 대한 고문만이 아니라 지도자를 배교케 함으로서 기독교운동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요세비우스는 그의 책 2장에서는 안디옥에서 체포된 또 다른 순교자 로마누스(Romanus)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심문관이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두려워하기 보다는 당당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받아드렸고, 그를 나무에 묶고, 그 주변에 나무 단을 쌓아 두었을 때, “이제 나를 태울 불은 어디 있느냐”고 했을 만큼 당당했다고 한다. 그는 다시 고문을 당했다. 혀가 짤리기까지 더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으나 고난 중에도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었다고 했다.15)

2.2  2세기

1세기의 네로, 도미티안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에 이어 2세기의 익나티우스, 폴리갑, 저스틴 등의 순교는 보다 극적이었다.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Ignatius of Anthioch)의 순교는 교회사 초기의 일이다. 그의 체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없으나 시리아에서 체포되어 110년 경 10여명의 로마군인의 호송아래 로마로 압송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노령의 나이로 처형당했다.16) 이 때 그의 나이가 70세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안디옥에서 소아시아 지방을 거쳐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 7통의 편지를 남겼는데17) 이 편지는 당시의 교회적 상황과 박해의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서로 남아 있다. 익나티우스는 자기의 인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궁극적인 희생, 곧 순교를 통하여 진정한 제자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는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18) 즉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imitation)은 순교이며, 이것이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μαθητής 등 많은 제자도(弟子徒)와 관련된 용어(discipleship terminology)가 사용되고 있다.19)

  폴리갑(Polycarp)의 순교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년 2월 23일로 투정되는 날 폴리갑은 서머나 전체 시민의 10-20%에 달하는 약 2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머나의 스타디움에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20) 폴리갑이 순교할 당시였던 155년까지도 플리니(Pliny)에게 보낸 트라얀(Trajan, 98-117) 황제의 지시는 유효하였다. 즉 기독교 신자들을 구태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발되어 로마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처벌 하였다. 처음 폴리갑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도피하였다. 그러나 은신처가 발견되어 발각 되었을 때는 체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아 피신을 거부하였다. 폴리갑은 재판정에서 고문과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개심하도록 충고를 받았으나 이 불의하고 잔인한 세상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거절하였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 번도 저 버린 일이 없다.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응답하였다. 재판관이 그를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적이지만 지옥의 불은 영원하다.”고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소위 로마의 혈전(Roman blood games)21)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행사기간 중에 처형되었는데, 이 행사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맹수들의 싸움, 검투사들의 결투, 그리고 범죄자들의 처단 등으로 진행되는 이 행사를 지금은 ‘로마의 혈전’이라고 말하지만 2세기 당시 로마에서는 그것은 단순한 게임이자 스포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행사는 관중들에게 눈요기꺼리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다. 제국의 고위 관리, 정치지도자, 해 지역 요인과 특권층이 같이 모여 상호 상견례를 나누며, 얼굴을 맞대는 기회이기도 하고, 제국의 권위와 힘, 정의와 영광을 드높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 행사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행사였다. 바로 이 날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격한 싸움과 죽음 이후에 폴리갑은 화형을 당했다. 유세비우스나 피오니우스(Pionius)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폴리갑의 순교기」(Martyrdom of Polycarp)에 의하면 폴리갑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을 때 서머나 스타디움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빗발쳤고, 사자에게 먹혀 죽게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때는 맹수의 싸움은 끝난 후였으므로 그를 산체로 불로 태우라고 요구했다.22) 즉, 폴리갑은 오전의 맹수들의 싸움과, 오후의 검투사들의 결투, 곧 제국의 군사적 힘과 용감성과 인내심을 시위하는 그 혈전 사이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로마의 법과 질서의 구현이었다.23) 이로서 로마제국은 기독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제국의 법을 위반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시위하였고, 기독교라는 종파가 어떤 것인지 거의 알지 못했던 서머나인들에게 기독교란 비밀스런 종파가 불법적인 반로마적 미신(anti-Roman superstition)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황에서 선교는 순교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박해자는 마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였다. 161년 황제가 된 그는 네로나 도미티안과는 달리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스토익 철학자로서 자신의 수양을 위해 「명상록」(Meditation)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그의 스승 프론토(Fronto)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었기에 미신을 버리지 못했다. 점술가들의 권고를 받아드려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갖가지 재난들, 곧 야만족의 침입, 홍수, 기근, 전염병 등이 창궐했는데 특히 166년에는 이러한 재난이 겹쳐 역사가들은 그 해를 액년(厄年, annus calamitosus)이라고 불렀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로마의 재난은 기독교인들이 제국의 신들을 분노케 한 결과로 보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이 주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무모한 고집(obstinacy), 혹은 변태적인 오만으로 보고 이를 더욱 증오하였다.24) 이 시기의 기독교 탄압은 이 전 시기보다 심각했다. 배교하지 않는 이들은 처형을 당했다. 14살짜리 소년 폰티쿠스(Ponticus), 리용의 감독이었던 90세의 포티누스(Pothinus)도 이때 처형을 당했다. 과부였던 펠리시타스(Felicitas)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는 세월의 격리감에도 불구하고 눈물겹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2세기 당시 유명한 변증가였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도 이 때, 곧 165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당시 버가모(Pergamum), 아프리카 지방에서도 순교자들이 있었고, 특히 고울 지방에는 177년 48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었다고 했다.25)

2. 3 3세기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사망하였고 콤모두스(Commodus)가 황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황제의 근위대장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서 그의 때로부터 로마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는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린 일은 없으나, 내적으로는 반란이 있었고 외적으로는 야만족의 침입이 있었으므로 황제와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년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가 황제가 되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나, 202년 곧 3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태는 변화하였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행위를 형벌로 다스려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다시 고통스런 박해가 시작되었다. 국내의 군부의 반란, 내란의 위험이 있자 황제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모든 국민들에게 소위 ‘정복되지 않는 태양’(Sol inbictus)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였다. 누구든지 태양이 지존(至尊)의 신임을 인정하는 종교혼합정책을 추구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이유였다. 이 때 이레니우스가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고, 오리겐(Origen)의 아버지를 비롯한 일단의 신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살당했다.
  203년경에는 몬타누스파에 속했던 퍼페투아(Perpetua)와 펠리시타스(Felycitas)등 5명이 순교하였다. 이들에 관한 순교 기록은 아마도 터툴리안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기」(Martyrdom of Saints Perpetua and Felicitas)에 잘 나타나 있다. 퍼페투아는 상류층 여인으로써 임신 중 체포되어 체포된 후 8일 만에 출산하였고, 펠리시타스 등 다른 4사람은 노예였다.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26)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일 후 잠시 동안 박해가 중단되었다. 211년에는 카라칼라(Caracalla)가 황제가 되었고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제한된 박해가 있었다. 그 후 엘라가바루스(Elagabalus, 218-222)와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222-235)는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유사한 혼합주의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약 반세기 동안 평화를 누렸다.

249년에는 데시우스(Decius, 249-251)가 황제가 되었다. 데시우스는 다뉴브강 유역인 북부출신이었는데, 그곳은 기독교가 별로 전파되지 않는 곳이었다. 데시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로마의 옛 명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데시우스가 황제에 취임할 당시는 야만족의 침입,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안이 있었으므로 이것은 옛날의 신들을 저 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즉 로마가 섬기던 옛 신들의 원한을 산 결과로 보아 옛 신들을 다시 섬긴다면 로마의 영화도 되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데시우스의 종교정책의 기반이었다. 따라서 옛 신들에 대한 숭배 거부는 반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제국 안에는 하나의 종교만을 허용하고 이로서 국가 안보를 도모한다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을 처벌할 뿐 만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멸절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기독신자들의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래서 250년에는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이전 시대와는 달랐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대신 이들을 협박, 고문, 회유하여 변절케 하고 이교(paganism)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데시우스의 종교 정책에 관한 칙령이 현존하지 않으나 제국 전 영역에서 로마 옛 신들에 대한 숭배를 의무화한 것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숭배를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는 자에게는 증명서(libelli, certificate of exemption from persecution)를 발부하였는데, 이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범죄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순응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이를 거부하므로 투옥되었고, 회유와 탄압으로 변절자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후일 변절자 문제에 관한 치푸리안과(Cyprian)과 노바티안(Novatian)간의 논쟁이 있었다. 혹자는 위조 증명서를 매입하기도 했다는 기록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직면했던 고난을 헤아리게 해 준다.
  이 시기에는 기독신자를 처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 수는 많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국부적이거나 간헐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들은 대부분 순교하였는데,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고백자’(Confessor)라고 불렀고, 신들과 황제에게 제물을 바친 자들을 ‘배교자’(Apostat, lapsed)라고 불렀다. 데시우스는 251년 야만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함으로서 박해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2.4 4세기 초

  그러나 4세기에 접어들면서 최후이자 가장 비극적인 박해가 발생하였다.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284년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을 포함한 4명의 황제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은 제국내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을 막고 권력이양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디로클레티안 자신이, 서방에서는 막시미안(Maximian)이 통치했는데 이들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라는 뜻)로 불리였고, 그 휘하에 ‘시저’(Caesar, 副帝, 보좌황제)라고 불리는 두 황제를 두었는데, 디오클레티안 아래에는 갈레리우스(Galerius)가 막시미안 아래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nus Chlorus)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사람은 갈레리우스였다. 이방신(異邦神, Cybele) 숭배자였던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박해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295년에 제기 되었는데 몇몇 기독신자가 군 입대를 거부하거나 병역을 이탈하려 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 때 갈레리우스는 신자들의 병역에 대한 태도를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하고 디오클레티안에게 군부에서 기독신자 축출을 종용하였다. 디오클레티안은 기독신자들의 축출만을 명했으나 어떤 지역에서는 배교가 강요되었고 상당한 신자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안을 설복하여 303년 2월 23일자로 신자들을 모든 관직, 공직에서 축출하고 기독교 관계 건물과 서적의 파괴를 명하는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도록 하였다. 이 때로부터 10년 간 박해는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궁에 두 차례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기독신자들의 소행으로 보아 기독교에 대한 보다 강력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경전은 불살라졌고 신자들은 처형되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박해가 비교적 덜 했다. 당시 제국 내에는 반란의 기미가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안은 기독신자들이 반란을 꾀 한다고 보아 초대 교회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혹심한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극한 고문과 잔인한 처형이 뒤 따랐다. 심지어는 성경의 모든 사본을 불살라 버리려 했다. 어떤 성직자는 성경을 넘겨주기도 했다.
  서방지역에서는 동방지역에 비해 박해가 심하지 않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어는 신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채석장에 보내기도 했고 이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갈레리우스는 중병에 걸렸고, 이것이 기독교 탄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던 신자들의 말을 들었음인지(?) 311년 4월 30일 칙령을 내려 기독교 탄압을 중단하였다. 갈레리우스는 5일 후 사망하였다. 기독교 역사가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갈레리우스의 회개가 너무 늦었다고 흥미롭게 기록했다. 이런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가져올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 예비 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콘스탄틴의 개종이었다. 서방지역의 실권자였던 콘스탄틴은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이것으로 정복하리라”(In hoe signo vinces)는 글과 함께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황실 역사가이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책을 썼던 유세비우스의 기록이지만 이 일로 이교숭배자였던 기독교로 개종하였고,27) 서방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313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에 지나지 않았고, 귀족이나 군인신분의 신자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왔다.28) 물론 동방지역에서는 기독교가 10여년 더 불법의 종교로 있었으나 이제 박해의 시기는 지나갔다. 4세기를 거쳐 가면서 이제 기독교는 소위 국가종교로서, 소위 콘스탄틴적 기독교(Constantinian Christianity)로 변질되어 나그네 공동체가 안주공동체로 현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이런 역사의 질곡에서 순교의 행진은 잠시 멈추게 되지만, 곧 중세의 그늘에서 바른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또 다른 ‘선한 싸움’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을 얻기 이전까지 로마제국 하에서 복음을 위해 순교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이 점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1천명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추정한다.29) 그러나 이들의 굳건한 믿음과 확신, 불굴의 투쟁과 신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힘과 용기와 격려가 되었고, 이교도들에게도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 확신에 찬 죽음은 또 하나의 증거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3. 변증과 변호

  이재 우리의 관심사는 초기 3세기 동안 선교와 순교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했던 길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증거 하면서도 자신들이 당한 수난과 환란, 그리고 핍박을 어떻게 이겨나갔을까?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들은 칼을 택하기 보다는 펜을 택했다. 그들은 격렬한 비난과 박해 중에서도 무력으로 대항하거나 싸우지 않고 비폭력과 무저항의 평화주의(pacifism)의 길을 택했고, 도리어 끝까지 참는 인내를 택했다.30) 라틴어로 문필활동을 했던 라티교부들은 이 인내를 파티엔티아(patientia)라고 불렀다. 영어의 페이션스(patience)가 이 라틴어에서 기원하였지만 이 어의를 충분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취했던 인내는 우리 말 성경에서는 “길이 참음”으로 번역했는데 확고부동한 의지로 참고 이겨내는 것을 파티엔티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들에게나 무고한 도전자들, 그리고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펜을 택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하드리안 황제 때로부터 2세기 말까지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흔히 변증가 혹은 호교론자(護敎論者)라고 불린 이들 가운데 최초의 사람은 하드리안 황제에게 변증문을 썼던 꾸아두라투스(Quadratus)였다.31)
  2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변증가는 저스틴(Justin, 125-163)이었다. 사마리아 출신 헬라 철학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위대한 변증가가 되었고 후일 순교자의 길을 갔기에 그를 가리켜 교회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이라고 부른다. 그는 철학자이며 초기 변증가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유리피데스, 크세노폰, 플라톤 등의 헬라 문필가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때 헬라철학에 대한 그의 식견과 박식함을 엿볼 수 있다. 유세비우스가 저스틴에 대하여 “이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그는 철학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였고, 또 자신의 저술을 통해 신앙을 위해 싸웠다.”고 한 평가32)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그의 두 양아들에게 쓴 3종류의 변증서가 있는데, 「제 1변증서」(The First Apology, 대변증서), 「제2변증서」(The Second Apology, 소변증서),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ipho)가 그것이다. 그 외에도 「이단에 대하여」, 「말시온에 대하여」가 있으나 현존치 않고 있다. 155년경에 저술된 「제1변증서」는 변증적 목적 외에도 2세기 당시의 성례전 시행(sacramental practice)에 대한 정보를 주는 귀중한 문서이다.33)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는 가장 긴 작품으로서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의 신앙을 설명할 목적으로 쓴 글이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아닌 트리포와의 담론 형식의 이 글에서 저스틴은 구약을 인용하여 우의적(寓意的), 혹은 유형론적(類型論的) 해석을 시도하였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즉 저스틴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기독교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박해하는 것은 부당하며, 국가는 불확실한 근거로 기독교인을 처벌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163년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쓴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한 글은 2세기 말 카르타고의 테루툴리아누스(Tertullianus)에 의해 기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로마 총독에게 바쳐진 글이었다. 이들 변증가들의 요지는 기독교는 오해되고 있으며, 기도교인들에 대한 혐의나 단죄는 오해에 기인하여 무죄이며, 기독교 신앙이 반 사회적이거나 비밀 결사가 아니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 변증문서가 진정으로 황제나 원로원 혹은 총독들에게 보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목적이 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최근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이 문서가 황제나 고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주도록 청원하는 글이 아니라, 선교적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34) 다시 말하면 변증 작품은 이방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보여주는 문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변증가들의 변증서가 실제로 황제에게 전달되고 황제가 이 문서를 보았다는 증거가 없고, 또 설사 전달되었다 해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변증서들은 당시 교회의 자기 확립과 신앙수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인 할 수 없다.

4. 남은 문제들- 순교, 어떻게 볼 것인가?

   초기 기독교의 선교와 확장, 그리고 로마제국 하에서의 박해와 순교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왔고, 후기 기독교회의 삶과 신앙에 규범적 원리나 모범으로 논의되었다. 로마제국하의 이교적, 불관용적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고유한 가치를 지키려고 자기희생과 순교의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의 사회과학자들은 순교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그 의미를 약화시킴으로서 순교의 동기나 목적을 오도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해석의 대표적인 경우가 순교에 대한 병리심리학적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격렬한 수난에 직면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순교를 마조키즘(Masochism)에 뿌리를 둔 인내였다고 해석한다.35) 이것은 처절한 박해와 순교의 길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병리심리학적 증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들은 순교자들은 고통을 사랑했고, 고통당함으로서 도리어 성적인 쾌락을 맛보았기에 박해자들을 문제시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라고까지 주장한다.36)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의 셜리 케이스(Shirley J. Case) 지도 하에서 학위논문을 쓴 도날드 리들(Donald W. Riddle)는 그의 책, 「순교자들」(The Martyrs: A Study in Social Control)에서 “병적인 순교에의 열망의 한 요소는 고통에 대한 비정상적인 향유”이며 이것은 “마조키즘의 현저한 증거”라고 불경스런 주장을 하고 있다.37) 이들 사회과학자들은 어떻게 이성적인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 실제를 위해 그 고통스러운 박해와 수난, 그리고 처절한 죽음에 용기 있게 응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소위 ‘과학적’이라는 이름 하에 순교자들의 진정한 동기를 곡해하고 있다.  
  도즈(E. R. Dodds)와 노크(A. D. Nock)는 순교는 당시 넓게 퍼져 있던 일종의 ‘죽음에의 동경’(a death wish) 풍조에 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8) 도즈는 “이 세기들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죽음을 사랑했다”고 했고,39) 게이저(Gager)는 이 견해에 동조하면서 이교도였던 세네카가 그의 편지글에서 “많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 그것은 죽음에의 그리움(libido moriendi)이었다”고 한 사실을 덧붙였다.
  리들(D. W. Riddle)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저서에서 순교의 현상을 상호 대립적인 집단에 대한 충성간의 갈등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장래의 신앙고백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고 주장했다. 즉 장차 올 시대에서 구체적인 보상들을 약속하고, 신앙을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제재의 위협을 가하고, 투옥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동체적 지원과 존경을 표하고, 순교자들의 신앙을 신앙의 영웅으로 영광화시키고, 로마의 행정관들에게 대답할 내용을 미리 연습케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 때문에 자발적 순교(voluntary martyrdom)의 현상이 일상화되어 교권당국에 의해 제지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고 게이저는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이여 말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과 연구의 한계를 스스로 노출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케롤라인 오시에크(Carolyn Osiek)가 지적하였지만 사회과학 이론들은 현대의 산물이며,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1세기 사람들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1세기 사람들과 동일한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또 신약성경과 고대 기독교 관련 문서들이 오늘의 사회학자들이 추구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40)

고신대 교수


1) Herbert B. Workman,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1906; rpt.: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143.
2) barbaros philosophia의 개념과 개념사에 대해서는 Guy G. Stroumsa, Barbarian Philosophy (Tübingen: Mohr Siebeck, 1999) 57ff를 참고할 것.
3) 스데반의 순교에서부터 초,중세, 그리고 16세기, 선교운동이 시작된 18세기 이후의 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 등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순교의 행렬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서부 아프리카는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져 왔고, 짐 엘리어트(Jim Elliot)를 비롯한 아우카 작전에 참가했던 5젊은이의 죽음은 1950년대 세계기독교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특히 회교국가와 공산권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심각했다. 최근의 경우, 사우디 아라비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종교경찰 무타와인은 외국인 거주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이 이슬람범을 철저하게 엄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므로 선교사들의 활동은 중요한 표적이 되어왔다. 1995년 12월 2일 무타와인이 한 가정 집회를 급습하고 크리스마스 기도회로 모인 54명의 기독신자를 체포했는데 이중 지도적 인물 7사람은 가혹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이들이 석방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들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난 50여 년간의 북한에서의 기독교 탄압과 순교는 보다 심각하다. 북한에서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북한 당국으로부터 우호메달까지 받았던 노베르트 폴로첸은 2000년 12월 북한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은 생화학전 실험을 위한 인체실험으로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 기독교인의 고난과 순교의 자취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지난 5월 필리핀 남부에서 이슬람 반군 단체인 ‘아부 사이야프’(Abu Sayyaf)에 인질로 납치되어 있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 마틴과 그레시어 번햄(Burnham)의 순교는 가장 최근의 일이다.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으나 폴 마샬(Paul Marshall)의 「그들의 피가 부르짖는다」(Their Blood Cries Out)는 우리 시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이 시대 순교자들에 대한 소중한 기록으로 선교의 험난한 길을 예시하고 있다.
4) Epistles of Pliny, X, 33, 34. 112년 트라이얀 황제는 비두니아(Bithynia) 지방 총독으로 플리니를 파견했는데, 그는 그의 삼촌이었던 역사가 플리니와 구별하기 위해 젊은 플리니(Pliny the younger)로 불린다. 그는 매사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황제의 지시를 따르는 전형적인 공무원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비두니아 지방 대도시에서의 화재사건 이후 일종의 의용소방대 조직을 건의했다. 황제는 이 조직이 정치적인 성격을 뛸 위험이 있다고 보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각 가정에서 물동이와 펌푸를 준비해 두게 하고, 소화 작업을 개인의 의무로 간주했다. 마이클 그린(김경진), 「초대교회의 전도」 (생명의 말씀사, 1984), 18; F. F. 부르스(서영일역), 「초대교회 역사」(CLC, 1992), 212-3 참고.
5) 기독교박해에 대한 최근의 중요한 연구로는 G. E. M. de ste Croix,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Studies in Ancient Society, ed. by M. I. Finley (London and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4), 210-249이 있다. de ste Croix의 논문에 대한 논평인 A. N. Sherwin-White,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An Amenment?”(앞의 책, 250-5)와  Sherwin-White의 논평에 대한 de ste Croix재 응답인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A Rejoinder”(256-262), 그리고 W. H. C. Frend, “The Failure of the Persecutions in the Roman Empire”(263-287)는 이 분야에 대한 귀중한 문헌이다.
6) 초기 3세기 동안의 박해, 특히 그 배경사에 대한 중요한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usebius, History of the Church, viii, 9, Frend, W.H.C., The Early church and Martyrdom and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Oxford, 1965), Musurillo, H., The Acts of the Christian Martyrs (Oxford, 1972), Pietersma, A., The Acts of Phileas (Geneva, 1984), Ste Croix, G.E.M de,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Past and Present 26 (1963), 6-38, repented in Finley, M.I., Studies in Ancient Society.          
7) F. F. 브루스, 「신약에 나타난 복음의 변증」 (생명의 말씀사, 1981), 89.
8) Toynbee는 로마정부가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안 때가 AD 64년이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AD 64, .... the Roman Imperial Government became aware that Christianity was something more than a new sect of Judaism." Anold Toynbee, Hellenism, the History of Civilization (Oxford Univ. Press, 1959), 213.  
9) Salmon, Edward T., A History of the Roman World, From 30 BC to AD 138 (London: Methuen & Co., 1075), 181.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Annales, 15:38-41에서 이 때의 화재사건의 피해상황에 대해 기록했다.
10) 호주의 저명한 로마사가이자 1세기 기독교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작을 출판한 에드윈 저지(Edwin Judge)교수는 이 점을 유의하고 있다.
11) Walter W. Hyde, Paganism to Christianity in the Roman Empire (NY: Octagon Books, 1970), 169.
12) H. E., 4:26, 9.
13) H. E., 2:25, 30.
14)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163.
15) Ibid., 163-4.
16) 익나티우스의 체포와 처형의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상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세비우스의 견해(Eusebius, Hist. Eccl. 3.21-22)에 따라 트라이얀 황제 치하인 98-117년 어간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10년 설이 유력하다. Lightfoot, Harmer, and Holms, The Apostolic Fathers, 82. 이보다 후기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Klaus-Gunther Essig, "Mutmassungen ϋber den Anlass des Martyriums von Ignatius von Antiochien," VC 40 (1986), 105-117.
17) 익나티우스가 남긴 7통의 편지들은, 서머나에서 기록한 마그네시아(Magnesia), 트랄레스(Tralles), 에베소 그리고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와 드로아에서 기록한 서머나(Smyrna), 빌라델비아 (Philadelpia)교회와 폴리갑에게 쓴 편지이다.
18) Ignatius, Eph., 1.2.4. Rom., 4.2.4, 등에서 이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순교지향적인 열망과 추구에 대해 비판적 해석이 시도되었고, 그를 “신경질환적”(neurotic)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Lightfoot, Harmer, and Holms, The Apostolic Fathers, 81.
19) 다른 속사도교부들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익나티우스의 경우처럼 빈번하지 않다. 익나티우스는 ‘제자’(μαθητής)나 이와 관련된 용어(μαθητεύω, μαθητεία)를 그의 서신에서 14회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속사도 교부들의 서신 전부에서 이와 관련된 용어는 겨우 10회에 지나지 않는다. Michael J. Wilkins, "The Interplay of Ministry, Martyrdom and Discileship in Ignatius of Antioch," Worship, Theology and Ministry in the Early Church (Sheffield Academic Press, 1992), 299.
20)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문헌은, Leonard L. Thompson, "The Martyrdom of Polycarp: Death in the Roman Games," The Journal of Religion, vol. 82, No. 1 (Jan, 2002), 27-52를 참고할 것.
21) 로마의 혈전에 대한 자세한 문헌으로는 Paul Plass, The Game of Death in Ancient Rome (Univ. of Wiscansin Press, 1995)이 있다.
22) Martyrdom of Polycarp, 12.2-3.
23) Leonard L. Thompson, 34.
24) 마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Meditation)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을 고집불통의 사람들(obstinacy)로 언급하고 있다(XI:3). Walter W. Hyde, 172.
25) Eusebius, H. E., 4:16, 7-8.
26) 자세한 기록은 곤잘레스, 141-2를 참고 할 것.
27) 콘스탄틴의 개종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상존하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는가? 개종했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콘스탄틴은 자신을 ‘감독중의 감독’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임종전까지 세례받지 않았고, 개종 후에도 이교도들의 제전에 참석하였다는 점 등으로 그의 개종의 순전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 공인은 정치적 행위였다고 지적한다. 콘스탄틴의 개종의 동기는 흔히 3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첫째는 312년 밀비안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환상과 In hoc signo vinces환상을 보고 종교적 충격을 받고 개종했다는 주장이다. 이 사건 이후 전투에 임하여 대 승리를 거둔 것은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열정적으로 싸웠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을 뒷받침 해 준다고 주장한다(지동식 편역, 「로마제국과 기독교」, 한국신학연구소, 1980, 355). 둘째는 보다 순수한 종교적 동기로 보는 입장인데, 사르티스의 유나피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자신의 처자를 죽게 했는데, 이 일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고 있었고, 속죄의 필요성을 느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콘스탄틴은 항상 죄책감 속에 있었는데, 궁정출입을 하던 스페인(출신 로마인?) 사람이 황제에게 기독교를 믿으면 과거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T. D. Barnes, 417). 셋째는 정치적인 동기인데,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종교적 열정에서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정략적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유나피우스는 콘스탄틴의 사생활이 부도덕했고 도덕적으로 방종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일의 역사가 불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는 콘스탄틴의 전기를 쓴 유세비우스는 역사가로서 비판의식도 없이 무조건 찬사만 늘어놓았기 때문에 콘스탄틴의 참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콘스탄틴은 사실상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한번도 기독교도라고 가정하거나 뚜렷하게 주장한 일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자유로운 개인적 신념만을 뚜렷하게 밝혔다”고 했다(K. M. Setten, 108). 불크하르트는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했을 뿐 본질적으로 비종교적인 정치가였다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에 엘리스테어 키(Alistair Kee)도 동의한다. 그는 그의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Constantine versus Christ)에서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단지 제국을 위해 전략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했을 뿐이다.”고 했다(이승식 역,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한국신학연구소, 1988, 10-11).
28) Norman H. Baynes, Constantine the Great and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 Press, 1931), 4.
29) Stark, 164.
30)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 전통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이 있다. 특히 Martin Hengel, Victory over Violence (London: SPCK, 1970), G. H. C. Macgregor, The New Testament Basis of Pacifism (London: The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1958), Ronald Sider, Christ and Violence (Lion Pblishing, 1980),  Klaus Wengst, Pax Romana and the Peace of Jesus Christ (Phila: Fortress Press, 1986) 등을 보라,
31) 변증가란 이교나 유대교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신앙과 생활을 변호하는 글을 썼던 교부들로써 꾸아드라투스(Quadratus),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져스틴(Justin), 타티안(Tatian), 아데나고라스(Athengoras), 오리겐(Origen), 키프리안(Cyprian) 등이 있고, 미니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키프리안(Cyprian) 등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신앙을 변호하였다. 그 외에도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편지를 쓴 무명의 저자, 고위관리들에게 편지를 쓴 무명의 변증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무죄함을 변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 전도할 목적으로 기독교의 가치와 진리성, 고유성을 소개하고자 했다. 이 목적으로 이들 변증가들은 기독교도들을 향한 공격, 곧 무신론, 불법의 종교, 인육식(homophagia, ritual cannibalism), 근친상간, 사회적 암적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 변명할 뿐만 아니라, 이교의 부도덕성과  문제점들을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32) Eusebius, H.E., IV,13
33) James E. Bradley & Richard A. Muller, Church History (Eerdmans, 1995), 7.
34) James E. Bradley & Richard A. Muller, Church History (Eerdmans, 1995), 6.
35)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로는 Donald W. Riddle, Karl Menninger, Theodore  Reik, E. R. Dodds, Arthur D. Nock 등이다. Stark, 165-7.
36) Stark, 165.
37) Donald W. Riddle, The Martyrs: A Study in Social Control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31), 64.
38) Nock, Conversion (Oxford, 1933).
39) Christian and Pagan in an Age of Anxiety (NY, 1965), 135.
40) 캐롤라인 오시에크(김경진역), 「신약의 사회적 상황」(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14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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