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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철저한 자아의 죽음, 49일간 딴 세상의 통곡/ 토미 테니의 글과 본인의 간증

참빛7 2011. 3. 26. 03:21

 

철저한 자아의 죽음, 49일간 딴 세상의 통곡/ 토미 테니의 글과 본인의 간증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거 알겠는데
난 지금 아주 가까이 와 있는데 통하는 길이 반드시 있을거야
아, 저기, 그런데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음... 피 묻은 험한 길...
어디 보자, 길 이름이 무엇인가 아, '회개'라, 이 길이 맞나?
하나님의 얼굴을 영광을 대면하는 길이,
길동무에게 물어봐야 되겠는데,
모세여, 모세여, 말해 주시오 그대가 가본 길이 아닙니까? 말해 주시오"


195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 성경학교 학생 50명이
49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국가를 위해 중보기도 했다
주님 앞에서 날마다 울부짖었다
한 학생이 벽돌담에 머리를 대고 울었는데
네 시간이 지나자 담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섯 시간이 지나 그는 자기 눈물로 생긴 웅덩이 가운데 서 있었다
딴 세상의 통곡......
학생들은 단순히 자신의 죄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소위 '대리회개'를 한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죄까지 회개한 것이다
중보기도를 계속한 지 50일째 되던 날,
그곳에 주님의 영광이 강타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이 임했다
"그만 울어라, 유다지파의 사자가 아르헨티나 군주를 이겼다"
18개월 후
18만 석 규모의 축구경기장에서 벌어진 전도 치유집회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구름 떼처럼 모여들게 했다
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경기장들도 이 무리를 다 수용하지 못했다
195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일었던 대부흥은
남미로 퍼져 나갔고
마침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토미 테니의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에서
  '완전히 죽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의 요약이다
  여기서 한가지 느낌 점은
  김옥경 목사님의 '이문동 부흥'이나 '아르헨티나에 있었던 부흥'에서 보듯이
  한 달 이상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집단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갈망이 그들을 그처럼 통곡의 강가로 인도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직장이나 거리 관계로 이런 집회나 지교회의 기도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할 경우
  컴퓨터 앞에서라도 집회와 유사한 중보기도를 할 수는 없을까?
  장소에 상관없이 중보기도를 날마다 자신의 현 위치에서 하다가
  집회에 참석했을 때 주님의 영광에 강타당할 수는 없을까?


  나는 현실성이 없는 간증보다는 현실성이 있는 간증을 원한다
  자신이 딴 세상에서 천국을 본 만큼 충분히 현실의 어떤 사건을 움직힐 힘이 주님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주님의 심장을 부비며 열리는 현실의 열매,
  천국만을 보았고 현실에 연결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그 간증은 문제가 있다
  요즘은 북한 간첩들도 기독교의 신비 체험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인터넷으로 간증을 조작하는 수가 있기에 선별과정에서 조심해야 한다
  또한 간증은 과장이 없어야 한다 '보았으면 보았다 보지 못했으면 보지 못했다'라고 정확히 말하고


  통곡이든 안 통곡이든 기도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진실로 해야 한다
  때로는 집단 기도에서 집단 무의식에 의해 왕왕 주님께 초점을 잃은 수도 있기에
  차라리 골방의 기도가 더 진실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서로간에 장 단점이 있으므로 자주 중보기도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
  골방에서 기도하기보다는 중보집회에서 통곡의 강가로 떠내려가기를 소원하나니 골방 끝에서 우는 신부가 되기보다는 중보 회중 가운데에서 주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신부가 되고 싶으리
  기도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다 


  저도 이번 부산 집회와 인천 집회를 통해 방언 찬양의 은사가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중보기도를 할 때 즉흥적인 방언 찬양 흘러나와
  회중의 통곡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생명 강가로 흘러갔다
  나의 즉흥적인 방언 찬양이 회중의 통곡의 흐름을 휘어잡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서 거룩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들의 통곡과 맞추어 장조가 아닌 단조로서 계속 부르고 싶은
  갈급함에 불타올랐다 그때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의 선율은 그분의 얼굴과 십자가 사이를 맴돌았다


  즉흥적인 방언 찬양의 은사는 조금 특이한 은사라고 본다
  이 은사는 중보기도를 인도할 때에 필요하다
  주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방언 찬양의 길이도 좀 수선하고 방언 기도의 허리 부분도 좀 줄여야하겠지만
  만약에 기회가 온다면 그것은 결코 나의 의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아직은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또한 중보기도 인도는 그때 그때의 회중의 흐름에 맞는 기도 인도가 필요하다
  현제 중보기도의 인도가 방언, 그냥 기도, 즉흥 방언 찬양의 3가지가 하나의 하모니로 어울릴 수만 있다면 회중 한 가운데에 주님의 강한 영광이 강타할지 누가 알겠는가
  즉흥 방언 찬양으로 인도자는 '도'의 음정에서 '미'나 '솔'의 음정으로 또는 그 이상까지 자유자제로 음정의 변화를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천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터미널 안 서점을 지날 때
  '너는 저 서점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사야 할 것이다'라는 포근하고 환한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정말 성경책이 없었다
  새벽 5시 인천 성전을 나오면서 그곳에 성경책을 빠뜨리고 나왔던 것이다
  섬광처럼 스치는 주님의 터치,
  어떻게 주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 서점을 스칠 때에 다시 성경책을 사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을까? 그렇지 않아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으로 나의 초점이 주님에게 가 있었는데, 언제나
  공짜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안심이 되었다 음...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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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님이 주인된 교회를 꿈꾸며
글쓴이 : 조슈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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