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스크랩] 영의 구조와 기능

참빛7 2010. 3. 27. 16:15

영의 구조와 기능 (김태원 목사님 글)

 

저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82년 강남중앙침례교회 양수리 수양관에서 목회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5년 환난 뒤에 말씀 시대, 말씀의 종이 되어 이 마지막 시대 영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15년 동안 7번 개척해서 성도 없는 교회, 실패하는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루에 7시간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98년,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을 내가 믿는 순간 영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율법과 복음의 비밀, 십자가와 피의 비밀, 예수의 비밀, 천상의 비밀,

영의 세계의 비밀, 성막의 비밀, 창조의 비밀, 예언의 비밀, 계시의 비밀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롬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러나 제가 깨달은 것은 내가 죽고, 내가 마음 비우고, 내가 거지 되고, 내가 나그네 되자는

입니다. 나는 교회 부흥, 성장, 성도 수, 교회 건물, 물질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실패자가 되면 될 수록 영의 세계는 더 깊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종이 한 가지 소망하는 것, 종말의 시대, 말씀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입니다.

육이 아무리 성공하고 편해도 생명의 말씀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와 그 피와 말씀을 형식으로 알지 말고 실체를 체험해야 됩니다. 

 


영의 구조 - 영격을 가지고 있음

 

고린도전서 2장 10~16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의 구조에 대하여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과연 영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제가 기도할 때 영의 구조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전에 TV에 가시고기라는 제목의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그 가시고기는 어미가 죽을 때 자식한테 뜯어 먹히고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도 가시고기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먹은 것이며, 예수님의 실체인 말씀을 먹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고기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나’ 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제 어미 가시고기는 뼈밖에 없기 때문에 새끼 가시고기는 어미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가시고기가 하나 모르는 것은 자식에게 향하는 어미 가시고기의 사랑입니다.

새끼 가시고기는 자기가 다 자란 것 같지만 자기가 어미가 되어서 또 새끼한테 자기 몸을

다 주어봐야 자기 몸을 희생한 어미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가 말씀을 전해보면, 말씀을 조금만 알면 사람들은 이것을 다 아는 것처럼,

자기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 말씀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깊이와 넓이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넓고 깊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이만하면 됐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아는 길은 영원히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말씀은 영의 세계와 우리의 영의 구조입니다.

말씀의 넓이를 알 수 없듯이 우리의 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영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영을 보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의 영의 구조는 보이지 않고, 알수 없습니다.


만약 영의 구조를 알 수 있고 영을 잡을 수 있다면 우리 앞선 신학자들이 다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을 자세히 설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이란 것은 직접 알 수 없지만 우리의 혼에 비추고 육에 비추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은 혼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육으로 부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혼도 육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혼과 육은 닮은꼴입니다. 우리의 혼에는 인격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를 봤을 때 혼에 인격이란 것이 있듯이, 영에도 영격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혼의 인격은 지성과 감성과 또 의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면서 우리의 실체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영격은 누구의 속성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영의 구조-지성소의 모습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이었더라” (민 7:89).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 모세가 어디에 들어갑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간 곳은 지성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와 성막 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막에서 성소는 우리의 혼에 해당되고 성막 뜰은 우리의 육체에 해당되며 지성소는 우리의 영에 해당됩니다. 성막이 성막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듯이 우리는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에 보니까 이 안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이 법궤가 있는 지성소의 구조와 우리 영의 구조는 같은 구조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법궤를 다른 말로 증거궤라고 합니다. 또 법궤를 언약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덮어져 있습니다.


법궤, 증거궤, 언약궤, 속죄소가 있는 곳이 지성소라면 우리의 영도 법궤의 의미와 증거궤의 의미와 언약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말씀의 법궤가 있는 곳이고 예수의 언약이 살아 있는 곳이며 우리가 예수 믿는 증거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살아있는지는 우리의 영 안에 말씀의 법궤가 존재하고 있는가를 살피면 됩니다.


 

영의 구조-삼위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 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여기에 보니까 삼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단수로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라는 말 속에는 성부의 모습, 성자의 모습, 성령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3위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한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시듯이 우리의 존재도 육체의 나와 혼의 나와 영의 나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혼.육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육과 혼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존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성령을 통하거나 지성소의 영적 의미를 통하여서 자신의 영의 세계를 보아야 됩니다.


지성소의 구조와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아야 되고 또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 영의 세계와 우리 영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의 혼은 성부 하나님의 모습으로 우리의 영은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기능-영의 지적 기능

 

- 혼의 지각에 하나님의 계시가 임함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1,12).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은 증거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의 세계, 하늘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의 세계를 보여주고 알려준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한 영의 세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기준과 토대에 의해서 역사합니까?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4).


바울은 누구보다 많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미쳤다 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학문은 혼적인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1,1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는 사람의 지식이나 의지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영의 세계를 안 것이 아니라 혼의 세계 지식을 가득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노력하고 배우면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뒤에는 그 모든 노력이나 세상 지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혼의 지성이 없는 사람에게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시해서 모든 것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진 혼의 지성 위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지금까지 이 계시가 없으면 바울은 혼의 세계에서만 사고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영의 세계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왔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에게 있던 혼적인 지식과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계시가 합쳐져서 나타나고 역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영적인 지성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영적인 지성을 가지고 영의 세계를 말하고 또 성경을 기록합니다.


영적인 지성에서 나온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혼의 말이 아니라 영의 말과 언어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토대 위에서 역사하시고 또 계시하십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적인 지성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할 때는, 천사가 아마 도포 입고 갓 쓴 선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계시해 줄 것입니다. 또 아프리카 토인한테는 우리 선비의 모습이 아니라 추장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계시할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극단적인 경우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그 사람이 가진 혼의 지성에 기초해서 역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 이상한 곳, 이상한 세계에서 꿈을 꾸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나타나는 장소가 어릴 때부터 뛰놀던 고향 집이나 마을,

그리고 친구들이 나타납니다. 어릴 때부터 살던 오막살이집이 꿈속의 무대가 됩니다.

또 낮 시간에 재미나게 본 공상 영화의 한 장면이 꿈 속 무대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꿈속의 사건조차도 그 사람의 혼이 경험한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겨울, 금식 할 때 꿈을 꾸면 밥을 훔쳐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면

꼭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놓으신 팥죽을 훔쳐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 팥죽 먹기를 싫어했는데 금식하면서 훔쳐 먹는 팥죽은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혼의 세계에서 꿈도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문화에 기초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에도 우리가 가진 혼의 지성의 토대 위에 계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할 때 그 지성은 혼의 지성이 아니라 영의 지적인 기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지적 기능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기 전 혼의 지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 하나님의 뜻의 계시 -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8~11).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훼방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고린도 성중에 내 백성이 많으므로 잠잠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과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앞으로 될 일을 바울에게 보여주고 말해줍니다.


이는 바울의 영이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깨닫고 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은

영의 세계의 일과 말을 접수하고 혼의 세계의 일과 말을 혼이 판단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혼적인 사람이면 혼적인 세계의 일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적인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이 모든 영적인 계시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영이 지적인 기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뜻이 접수 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계시가 도달하는 도착점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이 하는 영의 지적인 기능입니다.


만약 영이 살아있지 못하고 영의 기능이 중단된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우리 속에 도달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과 예수를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영의 기능이 중단되고 정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자기 자신을 알게 함 -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1).


자기를 안다는 것은 어디에서 안다는 것입니까? 사람의 사정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혼으로 자기를 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전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고 했는데, 여기서  앎의 수준은 혼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앎을 추구했음에도 인생과 삶, 죽음과 생명에 대한 의문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영이 깨어나야만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영이 살아야 하고, 영의 지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또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게 되며,

지금 어떤 영의 세력에 포위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깨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살면서도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내가 왜 돈을 벌어야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의 지적인 기능이 우리 속에서 깨어나야 만이 자기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듣기 전에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똑똑한 줄 알았는데 말씀 듣고 영이 깨어나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거나 아내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보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영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정, 우리의 깊은 속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듣고 영이 살고 영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하며, 얼마나 더러우며, 얼마나 거짓되며 위선적인지를

영의 기능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고백할 때 그 말은 의도적으로 한 말이 아니며 형식적으로 꾸며서 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자기를 보니까 자기 실체가 적나라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바울의 고백은 실체의 체험에서 나타나는 고백이며, 자기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보이고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 주님 앞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죄송스럽습니까? 그 빛나는 영광의 세계에 나 같이 더러운 놈이 들어가면

그 영광스럽고 깨끗한 천국이 더러워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억지로 끌어들여서 천국의 영광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자신의 의도로 들어가서는 안 될 곳으로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믿음 없는 자의 고백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신앙의 회의에서 나온 고백입니까?

바울과 우리가 왜 이런 느낌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합니까?

바로 내 추함을 알기 때문이고, 내 부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같이 추하고 부정하고

나같이 더러운 존재와 그곳은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고백합니다.


주님 혹시라도 나 같은 놈이 천국 들어가서 그곳이 오염되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 저는 너무나 큰 죄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추하고 더럽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영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는 더욱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영의 직관 -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9~12).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또 깨닫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모든 것이 폐하여 집니다. 이것을 바울은 영적으로 장성해지는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온전히 알게 되는 상태는 영적인 직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생은 12+8을 손과 발을 동원해서 계산해 냅니다. 그러나 중학생, 대학생은 12+8은 20이라는 사실을 자기의 혼의 직관으로 계산해 냅니다. 한 마디로 숫자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영의 직관은 영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알게 되는 단계입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0,31).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이야기합니다. 점점 이야기가 깊어지다 보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고 사실적이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게 됩니다.

두 자제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있도록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너무나 생동적이고 흥미 진지한 내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한 사실이 너무나 또렷하고 분명하게 예수님을 통하여

들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축사하는 순간에 두 제자의 영안이 열렸습니다.

예수의 모습이 열려지고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는 영의 직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야만 모든 것을 확실히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내가 자주 사용하고 읽던 책은 눈을 감고서도 그 책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또 어떤 색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은 평소에 그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기 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와 하늘과 영의 세계에 대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것이 영의 간접 경험입니다. 그러나 영의 직관이 오게 되면 직접 영의 세계를 느끼고 체험하고 알게 됩니다.

바울은 13년 전에 삼층천에 올라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듣고 이르지 못할 세계를 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영안이 열리면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영의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이 영적인 경험을 영의 직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단계를 거쳐서 영의 직관의 단계까지 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아니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기도가 이제 깊어지면 묵상기도가 됩니다.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은 묵상기도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도의 단계를 뛰어 올라가다 보면 묵상기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묵상기도의 단계는 내 혼과 영 속에서 영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묵상기도의 세계는 한 마디 말이 없지만 우리의 영혼육의 문제나 소망이 자연스럽게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이 묵상기도는 말씀과 동시에 펼쳐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 없이는 묵상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와 삶과 영의 상태가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또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묵상기도의 세계는 한 마디 말이 없지만 주님과 통하고 영의 세계와 통해버립니다.


남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여보, 당신 할 수 없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OO씨, 사랑해, 우리 일평생 잘 살아 봅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손을 뿌리치며 “싫어요, 빨리 가야 되요” 합니다. 그래도 남자는 끈질기게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 합니다. 처음은 커피 한 잔 마시고, 손 한 번 잡고, 한 번 포옹하고 헤어집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런 말 안 합니다. 그냥 손만 만져도 마음이 통합니다. 손만 꽉 잡고 있어도 사랑의 느낌이 오고 서로의 마음이 교차됩니다. 커피 한 잔 먹으면서 아무 말 안 해도 가슴이 짜릿짜릿하고 통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단계가 묵상 기도의 단계입니다.


한 마디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이 통합니다. 서로의 눈빛을 보고도 사랑이 오가는 단계가 이 기도의 단계입니다. 이 묵상기도의 단계가 지나면 관상 기도가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주님을 직접 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주님 앞에서 대화하고 질문하고 또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느끼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처리해야 될 문제가 있으면 천사가 그대로 실천하고 이루는 단계의 기도가 관상 기도입니다.


이 관상 기도는 주님의 뜨거운 호흡과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는 산 영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현실 세계를 파악하고 또 사람을 보고 대화하듯이 모든 영의 세계를 만나고 대화하는 기도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기도할 때 영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보고 듣고 아는 것이 관상 기도입니다. 이 관상 기도는 모든 비밀이 보이고 깨달아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영의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영의 지적 기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경험한 사건이나 사실을 영의 세계에서는 보이고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2000년 뒤에 세상 현상과 종말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또 바울이 본 3층천의 영의 세계를 누가 올라가 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입을 다물고 사도 요한이 침묵했다면 우리는 3층천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또 종말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영의 지적인 기능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선지자들이 영의 직관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준 사건과 말을 분명히 깨닫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관상 기도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기도 시간에 말씀이 기억되면 그 상황이 보이고 또 어떤 상황이 생각되면 그에 맞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러한 영의 체험이 계속되면 그 다음에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가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를 직접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의 직관이 곧 관상 기도의 세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영의 기능-영의 정적 기능


영의 지적인 기능이 영의 세계를 더욱 자세히 알게 한다면 영의 정적 기능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영의 정적 기능은 영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의 정적 기능이 발달할수록 영의 세계의 존재와 변화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영의 정적 기능은 혼의 감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정적 기능은 혼의 감정에 영의 지적 기능 즉 하나님의 계시가 더하여질 때 나타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가 와도 그 사람 본래의 정적 기능이 없으면 영의 정적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혼적으로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데 거기에 영의 지적 기능, 즉 말씀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와 더불어서 영의 정적 기능이 발달하게 됩니다.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혼의 지성이 풍성할 때 혼의 감정도 풍성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많아질수록 영의 감정도 예민해지고 풍성해지게 됩니다. 


- 십자가 사건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오순절 후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해서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구약의 성경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은, 처음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적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반박하지 못하도록 논리정연하게 말씀에 입각해서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존재와 사건에 대한 설교를 자연스럽게 십자가 사건에 연결시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 예수님을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 베드로의 십자가 사건의 설명은 이스라엘 백성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 사건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서 성령의 어떤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까? 베드로의 십자가 사건의 선언을 듣는 사람의 정적인 기능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정적 기능을 폭발시키는 대표적인 내용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전의 구조를 보면 성막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이 법궤를 다른 말로 증거궤라고 하고 또 그것을 다른 말로 언약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이 똑같은 하나의 궤를 가지고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법궤란 것은 하나님의 법을 담는 상자이며 또 다른 의미로 법궤는 하나님의 법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는 영의 지적 기능으로 성부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능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의 하나님이신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집니다.


그 속죄소 위에 뿌려지는 피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말씀의 하나님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위에 피가 뿌려지듯이 십자가 사건은 말씀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구약 율법에 약속된 한 인물 예수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인 우리가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서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우리 마음에 감동과 충격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여러 찬송 중에서도 십자가와 주님의 보혈에 대한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슬퍼지고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은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영의 정적 기능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영의 정적 기능이 소멸되면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 영의 교제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교제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영의 정적 기능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연락하게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영의 세계를 지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도 영의 정적 기능이 파괴되면 주님과 생동감 있고 정감 있는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다정다감하고 생동감 있는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영의 정적 기능이 발달되어야 합니다. 영의 정적 기능이 죽어 있으면 주님을 만나도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관계가 되기 쉽습니다.

부부간에도 감정이 무딘 남자를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남자와는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이혼하게 되는 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성격 차이 때문입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지식과 지성을 갖추었다고 해도 감정이 죽은 사람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의 정적 기능을 갖지 않는다면 주님과 교제는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영의 정적 기능이 살아 있으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아기자기한 관계,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영의 정적 기능이 발달하면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주님과 더불어 의논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많이 지으면 이 영의 정적 기능은 감퇴하고 소멸됩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의 정적 기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의 정적 기능이 발달되면 삶에서 구원의 은혜와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삶 전체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범한 후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의 정적 기능은 조그마한 죄와 불신앙에도 쉽게 식어지고 소멸되기 때문에 영의 정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 영의 정적 기능을 발달시켜서 범사에 주님의 손길과 은혜와 섭리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의 정적 기능을 통하여 주님과 더욱 깊고 넓은 교제와 교통을 나누도록 해야겠습니다.


 

영의 기능-영의 의지적 기능


- 혼의 의지와 영의 지식과 영감 -

영의 의지적 기능도 혼의 의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혼의 의지에 영의 지성과 영의 감정이 더해진 것이 영의 의지적 기능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되고 또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의지는 영의 정적 기능과 지적 기능이 발달되면 될 수록 영의 의지는 강하게 나타납니다. 정신적인 미숙아는 지적인 기능이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이 정신 장애인들은 정상적인 지식과 지성을 가진 사람들보다 어떤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훨씬 약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과 대상에 대해 아는 것 즉 정보가 많을수록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많아집니다. 또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깊을수록 그 대상과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영의 의지적 기능은 영의 지성과 감성과 함께 활동하고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영의 의지가 강화되기 위해서는 영의 지성인 말씀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져야 하며 또 하나님과 영의 세계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깊게 해야 할 것입니다. 


- 믿음의 행위와 표현 -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33~35).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이야기 듣습니다.

이것은 영의 지적 기능이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역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떡을 떼시면서 축복하시는데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처음에는 영의 지적 기능이 역사하기 시작했고,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영의 정적 기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은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성령의 의지적 기능이 발동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령의 의지적 결단이 나타날 때에는 그 내면 속에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 말씀에 대한 믿음, 구원에 대한 믿음이 제자들의 발걸음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한 것입니다.

성부시대는 구약시대로 대표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지적 기능이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예수를 알리고 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구약에서 제물로 죽어간 짐승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를 알려주려고 했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베들레헴에 오실 예수를 소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시대인 성자 시대는 성령의 정적 기능이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십자가로 나타나고, 죄인과 함께하시는주님의 겸손하심이 외로운 들꽃처럼 이스라엘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고난과 삶을 생각하면 우리의 심정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울고 웃고 하는 기쁨과 감격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성자의 사역으로 대표하는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미가 자유의 기쁨, 속죄의 기쁨,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시대는 의지적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믿는 자들이 자기의 믿음에 따라 봉사하고 헌신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의지적 역사로 나타나는 믿음의 표현이 바로 성령의 열매요 삶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향기 그리고 빛이 없다면 성령의 역사는 중단된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온전히 역사하고 있는가는, 믿음의 증거 즉 성령의 역사가 삶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의지적 기능에 의해서 좌우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의지적 기능이 강하게 역사할 때 우리의 삶과 모든 결정은 영적인 것이 될 것이고 또 그것은 믿음의 행위로 나타날 것입니다.


- 은사의 역사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6~7).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적 은사를 불 일 듯하기 위해서 안수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바울 자신에게 안수함으로 그 기도와 간구가 디모데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안수와 기도 속에는 엄청난 바울의 영적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의지적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500여명의 제자와 성도들이 주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 중에 120여명만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이 120명의 성도와 주님의 승천과 성령의 임재 약속을 알고도 떠나버린 380명의 차이는 의지에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의 약속을 믿고 또 경험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강력한 영적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임재와 은사는 그것을 향한 의지력이 강하게 있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바라지 않고 또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 은사는 절대로 나타나지도 않고 역사하지도 않습니다.


영의 지적 기능이 성부 하나님의 기능이라면, 영의 정적 기능은 성자의 하나님의 기능이고, 영의 의지적 기능은 성령 하나님의 기능입니다. 또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대표하는 것은 은사입니다.


이 두 경우를 비교해 볼 때 성령의 대표적 기능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받기를 간구할 때 그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입니다. 또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의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와 지혜, 지식, 분별, 예언, 방언, 통변, 믿음, 신유, 능력의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의지적 기능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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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지막 때의 진리(眞理)
글쓴이 : 아이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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