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전쟁
- 국내좌익세력들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끈임없는 왜곡중에 친일과 군사독재자 그리고 지역감정이 있습니다.. 아래는 친일왜곡 군사쿠데타와 독재논란 및 지역감정유래에 대해 설명한 글들입니다. --박정희 친일왜곡의 진상 및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 좌익세력들이 인터넷에 퍼뜨리는 박통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좌익과 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뿐만 아니라 언론도 친일이고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느냐?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재물 영달을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그 자체가 친일이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합니다. 나폴레옹전기를 통해서 군대 군인을 동경하게 된 박정희는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김종신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 즉 나폴레옹에 대한 소년시절의 동경에서 비롯되어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대통령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식산은행금융조합서기,훈도야말로 식민지지배의 최일선에서 첨병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이런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 및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불분명하며 어쨌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군대지휘관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으면 임무를 잘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광복후 일본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의 내연녀였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
출처 : Daum 신지식
글쓴이 : 박ka사탕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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