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인 어질지 못한 인조(仁祖)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나의 관심을 끈 한 사람은 소현세자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천주교 신자가 되지만 7년간의 귀양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으나, 불과 6(?)개월이 못되어 33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는 소현세자. 그가 초기 천주교와 접촉하게 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의 의문의 죽음은 나에게 늘 궁금증을 더해 주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조선조 16대 왕이었던 인조(仁祖)의 장남이며 17대왕인 효종의 형이었다. 인조에게는 4명의 적자와 2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장남이 소현세자였고, 차남이 봉림대군인데 그가 효종이 된다. 3남은 인평대군, 4남은 용평대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릴 때 사망했다고 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인조는 1623년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전임 광해군은 정치적 안목이 있어 국익 차원에서 중립외교정책을 폈으나 인조는 시대에 역행하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내걸었다. 자신은 그것이 소위 역 발상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병자호란’이라고 불리는 청의 공격이었다. 후금족이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1636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은지 14일 만에 도성에 다다랐고, 조선은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렸으나 명나라는 국세가 쇠약해져 조선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인조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1637년 1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을 따라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고, 강경 척화파였던 윤집, 오달제, 홍익환 등은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50여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때부터 7년간 수행원 3백여 명과 함께 만주 심양의 심양관(瀋陽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1644년에는 북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 1591-1666)과 접촉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아가 천주교를 접하고, 특별히 서양의 과학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소현세자 개인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담 샬은 1628년 이래로 청국에서 선교하고 있었는데, 청의 세조의 신임을 받아 흠천감정(欽天鑑正)의 벼슬을 얻기도 했고, 서양력을 본 따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을 편찬하기도 했던 인물로서 학식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소현세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아담 샬로 볼 때도 조선의 세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전교를 위한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점에서 그는 해외에서 서양적인 것을 접한 첫 조선인이 된다. 소현세자는 비록 인질로 청나라에 머물게 되었지만 그는 외교관의 역할을 했고, 청의 입장을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조선의 국익을 고려하는 중재적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심양관은 주 중국 조선 대사관과 같은 역할을 했고, 소현세자는 대사였던 셈이다.
소현세자의 빈(嬪)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서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1627년 결혼했는데 소현세자가 15살 때였다. 결혼 10년 만에 그도 세자를 따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는데, 그녀도 소현세자 못지 않는 수완가였다. 심양관의 살림을 맡은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케 하고 그 수확물을 청의 진기한 물건과 교환하고 차액을 남기기도 했고, 조선의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이득을 남겨 심양관 살림을 꾸려갔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물면서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국제관계의 역학 구조, 조선의 생존전략 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하게 되고, 청이 주도하는 동 아시아 질서 속에 편입된 조선이 청나라를 이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대결한다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심양과 북경에 머물면서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간의 갈등 요인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만 소현세자는 본국으로부터는 오해를 받기 시작한다. 조선의 조야(朝野)는 물론이지만 인조마저도 그를 의심했다. 청과 조선을 중제하려는 세자가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주의자로 변한 것으로 의심했다.
사실 청나라는 소현세자의 외교적 능력과 인품을 신뢰하고 그를 칭송하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신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청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옹위할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인조는 이런 인식으로 정탐사신을 청에 파견하기도 했다. 실제로 몽고 치하의 고려 왕세자들의 경우에서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인조는 세자를 의심했고, 권력 주변의 눈치 빠른 계략가들은 인조의 불신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런 판국에서 인조에게 불신을 더해 준 것은 후궁이었다. 인조에게는 조소용이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큰 아들 숭선군을 낳고는 기세등등하였고,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소현세자와 강씨에 대해 험담과 모함을 일삼았다. 소현세자가 청의 지지를 엎고 귀국하면 왕위를 내어 주어야 할 것이라는 모함은 아들 소현세자를 자식이 아니라 정적(政敵)으로 보게 만들었다. 인조 자신이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에 권력에 대한 도전은 참을 수 없는 증오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8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귀국하게 되다. 그러나 그는 인조나 조정의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은 소현세자를 더 이상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고, 1644년 11월 26일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올랐다. 이듬해 2월 18일에는 꿈에도 그리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의 짐 속에는 천주교 관련 물건들과 서양문물에 대한 서적들이 들어 있었다. 아담 샬은 귀국길에 오르는 소현세자에게 자신이 저술한 <성교정도>(聖敎正道)등 종교서적과 천주상, 그리고 천문(天文), 산학(算學)에 대한 서적을 선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궁지로 몰고 갈 단서가 될 줄은 예기치 못했다. 그에 앞에는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에게 있어서 세자는 타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귀한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반청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었고 원수의 나라와 내통한 반역자였다. 부자간의 갈등은 현실화되었고, 드디어는 세자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과 서양 과학서적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청에서의 세자와 부인 강씨의 행적도 도마 위에 올랐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인조가 벼루를 들어 세자의 얼굴을 내리치기까지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몸져눕게 되었는데 발병일은 1645년 4월 23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4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향년 34세. 그가 귀국한지 겨우 70여일이 지났을 때였다. 궁궐에서는 독살설이 나돌았다. 그를 진찰했던 어의(御醫)는 병명을 ‘학질’로 진단했다. 인조의 어의 이형익(李馨益)은 세자의 열을 내리게 한다며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그 결과는 3일 후의 죽음이었다.
그의 시신 상태는 독살설을 뒷받침한다. <인조실록>에는 세자의 시신 상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세자는 발병한지 수일 만에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옴으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얼굴을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멱목이란 소렴 때 시신의 얼굴을 싸는 검은 색 헝겊을 의미하고, 인렬왕후는 소현세자의 어머니이다. 이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혹을 더해주는 것이 사후 처리 과정이다. 세자의 독살 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입관(入棺)을 서둘렀고, 망자가 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밟게 했고, 장례일을 앞당겨 참관 인원도 일부 종실(宗室)로 제한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국문(鞠問)을 당하는 것이 관례인데,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죽었으나 인조는 의관 이형익에 대한 처벌논의 자제를 금지했다. 특히 세자비 강씨마저 죽게 한 일은 이 독살사건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1646년 정월에 강빈 궁 소속 궁녀들이 임금의 수라(御膳)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 때 강빈은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는 이 혐의로 별당에 유치되었고, 1646년 3월 사약을 내려 죽게(賜死)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3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두 아들을 풍토병으로 죽게 했고, 막내 아들만 겨우 연명했다. 인조는 손자들을 죽였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까지 장살(杖殺)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를 모두 처형시켰다. 인조는 자신의 친 아들과 손자, 며느리 와 그 사돈까지 죽인 것이다. 그런 그를 ‘어질 인’(仁)자를 써 인조라고 한 것은 역사 왜곡이다 못해 역사기만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의 불행이었다. 그는 서양문물에 눈을 떴고, 당시의 정세를 읽는 국제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리에 눈을 떴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역할이 주어졌더라면 성리학적 문화구조를 넘어서는 서구지향적 근대화를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가 더 생존했더라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오늘과 다른 새로운 역사를 엮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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