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에서 퍼왔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정부가 국가를 위해 전사한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들을위해 고개 숙일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제가 군대있을때 정훈교육 비디오에서 나온 구호가 문득 생각나네요
'강력한 힘이 있어야 국가의 평화를 지킨다'..
참고로 평택 2함대인가에있는 참수리 357정 을 전쟁기념관으로 옮기기위한 서명운동을 하고있다는군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http://www.kodef.net/)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육필수기 전문
내아들아!누구를위해 목숨을받쳤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 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동만 교수는 서해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 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분들게,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서해교전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 숨진 고 박동혁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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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는 고 박동혁병장을 치료한 의사의 글입니다.
이 글을 읽을때마다 울컥 하게 됩니다 전사하시고 평생불 구가 되신 그때 그분들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월드컵의 날들이기전에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는 보훈의 달 6월입니다
# 첨부 사진은 전사하신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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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 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는 일이 뭘까?’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권모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 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 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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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남겨진 전우와 가족들...그들의 남겨진 한은 누가 풀어준단 말인가? 그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모두 6월29일을 절대 잊지 맙시다. ] 물론 군인의 의무가 나라를 지키다가 죽는다 하여도, 그분들도 군입대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다를바 없는 일반 시민이였습니다 마지막 모습을 보신 분들이라면, 김선일씨 참사가 뭐가 대수라고...까지 생각되실 겁니다. 그당시 해군정보부쪽에서는 국가에게 계속해서 "북한해군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주의 요망한다"라고 말을하자, 국가에선 "햇볓정책이 활발한상황인데다가, 월드컵이 한창인 현 시점에서, 북한하고 관계 깰일있냐?"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그리곤 6월 29일. 북한해군은 결국 NLL을 넘어, 결국 전사자 4명, 부상자 19명, 실종자 1명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분들 이름이나 기억나십니까?? 직격폭격맞은 357호... 정확히 세발의 85mm포와, 총탄, 기관포탄을 뒤집어쓴 배였지만, 357호 승무원들은 고장난 자동형 40mm주포까지, 수동으로 바꾸어 가면서 싸워내었습니다. 20mm발칸포를 쏜 조천형 중사는 불길에 휩싸여서 전사하였고, 다른 발칸포를 쏘던 황도현 중사는 머리에 직격탄을 맞아 전사하셨지만, 그분들의 시체의 손가락에는 끝까지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려 있었습니다. 375호 정장 윤영하 소령님은 이미 죽음을 앞둔 상태셨고, 부정장님은 양쪽 무릎이 없는 상태에서도 전투지휘를 계속하셨습니다. 윤소령님 앞의 권기현 상병은 K2기관단총을 한손으로만 사격하였습니다. 그럴수 밖에요.. 왼손가락 4개가 잘려져 나갔으니까요.. 그렇지만, 권상병님은 오른손만으로 탄창을 바꾸고, 왼손팔뚝위에 총을 올리고 다시 사격하셨습니다. ==윗글은 전사자 동생분이 쓰셨던 글==
“침몰했던 배(해군 고속정 참수리호)를 전쟁기념관에 옮겨 달라고 했는데 2함대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작년엔 정부 고위 관계자가 (추모본부는) 행동하지 말라고 해 너무 서러웠어요. 2002년 장례식 때는 민간인도 못 들어오게 했으니까요. 영웅인데도 영웅 대접을 못 받은 것은 분명 잘못 아닙니까.” 그녀의 목소리 톤은 높아졌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희생이 있는데도 왜 북한에 할 말도 못하고 사과도 못 받고 그럽니까. 군 통수권자가 군인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정치적인 분위기 때문에 할 말은 다 못하지만?.”
==윗글은 전사자 추모본부 대표 김종선씨가 한국을 떠나기전 인터뷰 내용==
나라의충성을 다짐하고 젊디젊은 시간과 국가에 받쳤다 나말고도 다해서 그리고 의무라서..
나 국가에 바라는거 없다 ..그냥 내 몸 편히 사는거 그거에 산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그땐 좆도몰라서 자랑스러웠지만
지금와서 변명아닌 변명이고 나를 옹호하는 핑계지만
나 국가 위해서 총 든적없다
정든 고향 떠나고 정든가족품 떠나고 친구들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 떠나고 ..
군생활 하면서 한번도 국가를 위해 훈련한다는 생각 해본적 없다
정든 사람들 생각하며 군생활 마쳤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거 자랑스럽다 외국가서 누구에게도 기 눌린적 없다
때린적 있어도 맞은적 없다 나를 아는 사람이 창피할것 같아서..
보잘것 없는 나 이분들 생각하며 감사하며 고마워할련다..
타군을 떠나 선후배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위해..우리들을 위해서 전사하신 故윤영하 소령님 故황도현 중사님 故한상국 중사님 故조천형 중사님 故서후원 중사님 故박동혁 병장님 그외..여러 국가유공자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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