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번연
존 번연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인의 일생을 그린 우화집 세계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와 성경의 만인 이용을 설명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우화집이었다.
베드퍼드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1628년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었다. 겨우 읽기·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나쁜 습관을 버렸지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을 읽고서 회심하였다. 그리고 베드포드에서 평신도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낮에는 냄비와 팬을 수선하고, 밤과 주말에는 영혼을 구령했다. 그의 능력 있는 설교로 인해 수많은 회심자들이 생겼고, 또 강한 대적자들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찰스 2세가 복위하여 크롬웰이 통치하던 시기에 인정했던 종교의 자유를 취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1660년 존 번연은 허가(license)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167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투옥되었던 기간에는 그의 아내가 만든 구두끈을 팔아 번 돈과 그의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만 가족들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665년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투옥되었다.
존 번연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688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번연이 지은 60여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인데, 감옥에 면회오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으로 크리스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오래 동안 사랑 받아 왔다.
번연이 옥중에 수감되었던 일은 아마도 <천로역정>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천로역정>은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어권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신앙서적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 첫 해만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천로역정>의 원제목은『순례자(Pilgrim)의 여로(Progress)』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천로역정』이라고 이름하여 이 후 모든 번역본들이 이 제목을 취해왔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 - 1688)
영국의 유명한 목사, 설교가 이며 청교도의 종교관을 매우 독특하게 표현한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1678)>의 저자.
그 밖의 저서로는 교리에 관한 논쟁적인 저서들을 비롯해 영적인 자서전 <넘치는 은혜 'Grace Abounding'(1666)>, 우화집 <거룩한 전쟁 'The Holy War',(1682)> 등이 있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변명
먼저,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들면서, 이런 보잘 것 없는 형식의 책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른 형태의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을 완성하고 났더니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이런 형식의 책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복음이 충만한 이 시대에 성인들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글을 쓰다가 갑자기 영광에 이르는 그들의 여행과 행적에 대한 우화를 쓰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스무 가지도 훨씬 넘는 사건들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열거해 보았다. 그러고 나자 내 머리 속에 또다시 스무 가지도 더 되는 사건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은 다시 불꽃이 튀듯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들이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아 무한히 퍼져나가게 되면 거의 탈고단계에 이른 이 책마저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 생각들만을 모아 따로 쓰기로 하고 쓰던 원고를 탈고했다. 그렇게 해서 쓴 것이 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은 사실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썼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단지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내 이웃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쓴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썼을 뿐이다.
한가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휘갈겨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글을 씀으로써 죄를 범하게 하는 사악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펜을 종이에 대자, 나의 생각이 줄줄 글로 표현되었다.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쓰다보니까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이 풀려나와 지금 독자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은 길이와 두께를 가진 책이 될 때까지 써내려간 것이다.
개별적인 사건들을 연결하여 문장을 다듬은 후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이 내 글을 읽고 어떤 평가를 내리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칭찬을 했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다고 없애버리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존, 그 글을 출판하게나."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출판하지 말게나."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걸세."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걸."하고 말하기도 했다.
난처해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마침내 나는 어차피 사람들의 의견이 이렇게 분분한 이상 일단 책을 출판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출판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판을 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누가 가장 올바른 충고를 해주었는가를 알려면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이 책을 출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출판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형제들은 이 책이 출판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책이 나와 읽을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 주시오."
"만약 읽어보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시오. 살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갈비 뜯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들의 기분을 좀 맞춰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할 생각이었다.
"이런 문체로 써서는 안 될까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을 달성하고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요? 왜 그렇게는 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살코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갈비 뜯기를 좋아합니다."
시커먼 먹구름은 비를 뿌리지만 하얀 뭉게구름은 비를 뿌리지 않는다.
그렇다. 시커먼 먹구름이든 하얀 뭉게구름이든 만약에 그들이 비를 뿌려주기만 한다면 땅은 곡식을 생산함으로써 둘 다 칭찬하고, 어느 한 쪽을 흠잡는 대신 그들이 함께 생산한 열매를 소중히 여긴다.
또한 시커먼 먹구름과 하얀 뭉게구름이 함께 작용하여 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열매를 보고 어느 구름의 덕택이라고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땅이 굶주릴 때는 그들이 필요하게 되고, 만약 땅이 풍요로울 때는 두 구름 모두 역겨워지고 그들의 은총 또한 무익한 것이 된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지 살펴보십시오. 어떤 도구들을 사용합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어부들은 그들의 온갖 지혜와 올가미, 낚싯줄, 낚시도구, 낚싯바늘, 그물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낚싯바늘이나 낚싯줄, 올가미, 그물이나 그 밖의 도구가 모두 갖춰져 있다 할지라도 물에서 뛰어노는 물고기가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를 더듬어 찾고 손으로 움켜쥐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 사냥꾼들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또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할 수조차 없이 많은 여러가지 도구들, 즉 엽총, 그물, 끈끈이를 바른 나뭇가지, 등불과 방울들을 사냥에 이용합니다. 게다가 살살 기어다니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도 합니다. 그 누가 사냥꾼의 온갖 자세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냥꾼은 자신이 원하는 사냥감들을 모두 다 포획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이쪽 새를 잡기 위해서는 피리를 불거나 휘파람을 불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저쪽에 있던 새는 날아가 버립니다."
"만일 두꺼비의 머리 속에 진주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서양의 전설에 보석은 두꺼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있음), 조개껍데기 속에서 또한 진주를 발견할 수 있다면, 만약 금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묻혀 있다는 보장이 따로 없다면, 그것에 대한 어렴풋한 눈치만 가지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을 그 누가 경멸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보잘것없는 이 책도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그런 화려한 묘사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려하기는 하지만 내용이 없는 미사여구로 가득 찬 책을 능가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좋소. 그러나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해 봤지만, 나는 당신의 이 책이 출판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오."
"왜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뜻을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소."
"무슨 말씀입니까?"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나는 믿습니다. 나처럼 뜻이 분명하지 않은 꾸며낸 이야기를 가지고 진리를 번쩍이게 하는 작품을 만들어서 진리를 빛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글을 읽기를 원합니다. 은유는 정신력이 약한 자들을 타락시키고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신성한 어떤 것을 인간들에게 기록해 전달해 주려는 이에게 직설적이고 확실한 문체가 좋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내 글이 확실성이 모자란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옛날에 씌어진 하나님의 율법이나 복음서도 독특한 상징이나 암시, 은유 등으로 씌어져 있지 않은가? 가장 지고한 지혜를 무조건 공격하려 드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진지하고 맑은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옛 성전의 은유적인 표현들을 비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늘과 고리, 송아지와 양, 어린 암소와 어린 양, 조류와 목초 그리고 어린 양의 피 등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겸손하게 찾아 구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빛과 은총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성급하게 내 글이 확실성이 결핍됐고 거칠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달라. 겉으로 확실하게 보인다고 해서 모두 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한 비유법을 사용한 글이라고 해서 모두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라면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가볍게 받아들이고, 유익한 것은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금고 속에 금이 들어 있듯이 나의 모호하고 비유적인 글 속에는 진리가 들어 있다.
진리를 진술하기 위해 예언자들도 많은 비유법을 사용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고찰해 본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그 진리가 옛날의 옷을 입은 채 여전히 생생하게 들어 있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그 문체나 표현 때문에 모든 현인들을 침묵시키는 바로 그 성경 자체의 구절구절이 온통 모호한
상징이나 우화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책에서 영광의 빛이 샘물처럼 솟아나와 우리들의 가장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혀주지 않는가?
나를 혹평하는 사람에게 지금 자신의 글을 좀 자세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는 내 책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욱 모호한 부분을 자신의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것 중에서도 비교적 나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독자들 앞에 서서 글의 명확성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나의 글이 명확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의 모호한 글귀 하나에 내 글에서 열 개의 글귀를 걸고 내기를 하겠다. 공평한 독자들은 그의 미사여구로 장식된 거짓말보다 비유적인 표현을 쓴 내 글 속에서 훨씬 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리는 그것이 비록 갓난아기의 다 떨어진 포대기에 싸여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판단력을 고취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주며, 이해하는 것을 즐겁게 해주고 자신의 의지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기억력을 채워주며, 우리의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
내가 알기에 디모데는 명확한 말을 사용하고자 했으며, 늙은 부인들이 이야기하는 우화를 그는 듣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진지하고 엄숙한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비유의 사용을 금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비유들 속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캐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황금과 진주 그리고 여러 가지 값진 보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더 하겠다.
오, 목사님! 나의 글이 목사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당신은 내가 우화적 표현말고 다른 문체로 쓰기를 바라십니까?
혹은 좀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기 내가 발견한 우화적 표현이 적절한 세 가지 점을 밝혀 나보다 더 훌륭한 이들에게 그것이 적합한가를 비판받도록 하겠다.
첫째, 나는 내가 사용한 방법이 부당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휘나 사건, 독자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상징이나 은유적인 표현을 적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조잡하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식으로 쓰건간에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당하다는 표현을 내가 사용했던가?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우화적 문체를 쓴 것은 결코 부당한 문체가 아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지극히 훌륭한 당신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우화적 문체로 글을 써서 오늘날 살아 숨쉬는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들의 예는 많이 있다.
둘째, 나는 덕망이 있는 사람들이 대화체의 글을 쓰고 있으며, 그들이 이런 문체의 글을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만약 그런 식의 글로 진리를 기만했다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또한 그들이 진리를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그 문체 또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문체를 사용하여 진리가 여러분이나 나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게 했다면 그것은 그 문체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에게 맨 처음 쟁기로 밭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예수님)보다 그 누가 우리의 생각과 펜을 그의 섭리대로 이끄는 방법을 더 잘 알겠는가?
그리고 그분만이 비천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나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방법, 즉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건을 연상케 하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 또한 그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려 한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찬란한 광채가 가려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런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진리가 대낮처럼 밝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펜을 놓기 전에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강한 자를 끌어내리시고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손과 여러분의 독자들 앞에 이 책을 맡기고자 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대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목표를 추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가 행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은 무엇이며, 동시에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그가 영광의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어떻게 달리고 또 달리는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또한 영원한 왕관을 차지하려고 인생항로를 분주하게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째서 그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그들은 왜 결국 바보처럼 죽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충고를 따르기만 한다면 이 책은 당신을 여행자로 만들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에 제시하는 방향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책은 당신을 거룩한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게으른 사람들을 활동적으로 만들고 눈이 먼 사람들도 또한 즐거운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당신은 어떤 희귀하고 이익이 될만한 것을 찾고 있는가?
우화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찾아볼 생각은 없는가?
당신은 건망증이 심한가?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가?
그러면 나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으라.
그 이야기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꼭 달라붙어서 무력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는 큰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런 대화체로 쓰어져 있다.
언뜻 볼 때 기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은 건전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다.
당신은 당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은가?
어리석지는 않으면서 아주 유쾌한 상태가 되고 싶은가?
당신은 수수께끼를 읽고 그 해답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생각 속에만 파묻혀 있고 싶은가?
당신은 고기를 씹어먹는 것을 좋아하는가?
혹은 구름 속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겠는가?
당신은 잠을 자지 않으면서도 황홀한 꿈속을 거닐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혹은 잠시 동안 웃거나 울어보고 싶지 않은가? 마력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잠시 정신을 읽고 황홀경에 빠졌다가 아무 해를 입지 않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보고 싶은가?
책을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그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자신이 축복받았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지 않은가?
오, 그렇다면 여기로 오시오. 여기로 와서 당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내 책을 읽으라.
이 세상으로부터
다가올 세상으로의
순례자의 행진
그 출발과
위험한 여행과
그리고
안전하게 희망하던 나라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꿈의
비유형식을 빌어
- 존 버니언
"내가 비유를 사용했노라."<호세아 12장 10절>
순례자의 행진 제1부
- 꿈에 비유하여 -
세상이라는 황야를 헤매이다 우연히도 나는 한 동굴에 이르렀다.
그곳에 잠시 누웠던 나는 이내 잠이 들었으며, 꿈을 꾸었다.
내 꿈속에 누더기 옷을 걸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자기 집을 등진 자세로 손에는 한 권의 책을 들고,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떨었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슬프게 울부짖었다.
"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괴로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내나 자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럼에도 그의 괴로움은 증폭이 되어 마침내 더
이상은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오, 여보,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 너희들이
사랑하는 이 아버지는 지금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
무거운 짐 때문에 몹시 괴롭구나. 게다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
타버려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이 오면 나와 당신 그리고 사랑하는 내 자식
너희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어가ㄱ지. 어떤 피난길을
찾아 그곳으로 도피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런데 난
아직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그의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다. 그것은 그가 한 말보다도 어떤 광기가 그의
머리를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날이 어두워져 그들은 그가 잠을 자고
나면 정상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그를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러나 밤도 역시 그에게는
낮과 다름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잠을 자기는커녕
한숨과 눈물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들은 밤새 그가
한 행동을 보게 되었고, 날이 밝자 그는 갈수록
이상한 말만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가 또다시
식구들에게 말을 꺼내려고 하자 그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에게 거칠고 무뚝뚝하게
대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웃어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야단도 쳐보고
나중에는 거의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불쌍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한탄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때로
홀로 들판을 헤매기도 하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면서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3)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늘 그래왔듯이 괴로운 표정으로 책을 읽으며 들판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전에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가 마치 달아나기라도 하려는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때 복음전도사(Evangelist. 이상적인 기독교 목사를 의미함)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것을 보았다.
"어찌하여 당신은 그렇게 울고 있소?"
그가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이 책을 읽고서 제가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사실과 죽은 뒤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심판받을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복음전도사가 말했다.
"어째서 죽기 싫다는 겁니까? 이 세상의 삶이란 사악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요?"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제 등에 얹혀 있는 이 짐이 나를 무덤보다도 더 낮은 곳으로 떨어뜨려 마침내 토페트(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쓰레기 버리는 곳. 지옥을 의미함)에까지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내가 만약 감옥살이를 견뎌낼 힘조차 없다면 나는 결국 심판과 그 심판 후의 사형집행 또한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복음전도사가 말했다.
"당신 생각이 그러하다면 왜 꼼짝않고 멍청히 서 있기만 하오?"
그가 대답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복음전도사는 그에게 양피지 두루마리 한 개를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장차 다가올 천벌을 피하라.'
그는 그 글을 읽고 나서 복음전도사를 주의깊게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 어디로 도망가야 합니까?"
그러자 복음전도사는 손가락으로 드넓은 광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좁은 문(누가복음 13장 24절에 나오는 곧은 문.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영접하는 순간)이 보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복음전도사가 말했다.
"저쪽의 밝은 빛이 보입니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복음전도사가 말했다.
"저 빛을 놓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곧장 올라가시오. 문이 보이면 가서 문을 두드리시오. 그러면 그곳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나는 꿈속에서 그가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자기집 문에서 멀리 달아나기도 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돌아오라고 소리쳐 불렀으나 그 사람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울부짖으며 계속 달리고 있었다.
"생명을,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황야의 한복판을 향해서 내달렸다.
이웃사람들도 그가 달려가는 것을 보기 위해 뛰어나왔다.
계속 뛰어가는 그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비웃고, 어떤 사람들은 위협을 가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돌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폭력을 써서라도 그를 끌어오기로 결심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은 '고집불통(Obstinate)'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온순함(Pliable)'이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4)
그때쯤 그는 그들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과 온순함은 그를 따라잡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뛰어가 곧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여보시오, 이웃사람들.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오셨소?"
그들이 말했다.
"당신을 설득시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게 하려고 왔소."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당신들은 지금 멸망의 도시에 살고 있소.
물론 나도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지요.
나는 알고 있소. 당신들은 곧 그곳에서 죽어 무덤보다 더 낮은 곳,
불과 유황이 활활 타오르는 구렁텅이속에 빠지게 될 것이오.
착한 이웃 사람들이여, 내 말을 믿고 당신들도 나와 함께 갑시다."
"뭐라고?"
고집불통이 말했다.
"우리 친구들과 함께 편안한 생활을 내버리고 떠나자고?"
"그렇소."
크리스찬(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이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버려야 할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지금 향유하기 위해 찾고 있는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과 비교해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나와 함께 가서 그것을 차지한다면
나와 똑같이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그곳은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오. 자! 같이 갑시다. 가서 내 말을 확인해 보시오."
고집불통 : 이 세상 모든 것을 내버리고 떠나려는 당신이 찾는 그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크리스찬 : 나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으며, 시들지도 않는 유산을 찾고 있소.
그것은 천국에 안전하게 보관돼 있는데 약속한 때가 되면 그것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꼭 알고 싶다면 내 책에 기록돼 있으니
읽어보시오.
고집불통 : 흥! 그따위 책은 집어치우시오. 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소, 안 가겠소?
크리스찬 : 안 갑니다. 나는 절대로 안 돌아갑니다. 나는 이미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았으니까요.
고집불통 :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여보시오 온순함! 우리끼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머리
가 돌아버린 사람들은 이치에 맞게 충고해 주는 일곱 사람의 말보다 자기 생각이
더 현명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니까.
그러자 온순함이 말했다.
온순함 : 그렇게 무턱대고 욕만 하지 맙시다. 만약 이 착한 크리스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찾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보다 더 훌륭하지 않겠소?
이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고집불통 : 뭐라구요? 바보가 하나 더 생겼군! 내 말대로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머리가
돈 사람이 당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알게 뭐요! 돌아갑시다. 돌아가. 현명하게 생각하
시오.
크리스찬 : 온순함 씨, 나와 함께 갑시다. 거기에 가면 내가 지금 말씀 드린대로 우리가 차지할
좋은 것들이 많이 있고, 그 밖에도 영광스런 것들이 많이 있답니다. 만약 내 말을 믿
지 못하겠다면 여기 이 책을 읽어보시오. 이 책에 기록돼 있는 진리는 그 진리를 만드
신 그분의 피로 모든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순함 : 그럼, 고집불통 씨, 이제 결단을 내리겠소. 나는 이 착한 분을 따라가서 그와 함께 내
운명을 던지겠소. 그런데 나의 착한 동료여, 당신은 그 원하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크리스찬 : 나는 복음전도사라고 하는 분의 인도를 받았는데, 그는 우리 앞에 있는 좁은 문까
지 달려가라고 내게 일러주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받게 될
것입니다.
온순함 : 그렇다면 착한 이웃이여, 우리 계속해서 길을 갑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함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집불통 : 그럼 난 집으로 돌아가야지. 저따위 환상에 빠진 친구들과 한패가 될 수는 없지.
나는 꿈속에서 고집불통이 돌아가자 크리스찬과 온순함이 이야기를 나누며 평원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크리스찬 : 온순함 씨,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나와 함께 가기로 결심해 주셔서 매우 기쁩니
다. 저 고집불통도 아직 닥쳐보진 않았지만 나처럼 앞으로 닥칠 권세와 공포를 느꼈
더라면 그렇게 경솔하게 우리 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온순함 : 자, 크리스찬 씨. 이제 우리 둘밖에 없으니 우리가 찾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즐
길 수 있으며,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어디인지를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크리스찬 : 그것들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
니다. 당신이 알고 싶다면 내 책에서 그것들에 관련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온순함 : 당신은 그 책에 기록된 것들이 모두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찬 : 예, 절대로. 그것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분이 만드셨으니까요.
온순함 :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어떤 것들이 기록돼 있습니까?
크리스찬 :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질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영원히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온순함 : 옳은 말씀입니다. 그밖에 또 어떤 것들이 있지요?
크리스찬 : 우리가 받아 쓸 영광의 왕관이 있으며, 창공에 떠 있는 태양처럼 우리의 몸을 눈부시게 해
줄 예복이 있습니다.
온순함 : 굉장하군요.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지요?
크리스찬 : 그곳에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의 주인께서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모든
눈물을 닦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순함 :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됩니까?
크리스찬 : 그곳에서는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실 천사들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앞
서 그곳으로 간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해를
끼치는 사람은 없으며 모두 다 사랑스럽고 거룩하게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걸어다닐 것이
며, 영원히 그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황금왕관을 쓴 선
조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금으로 장식된 하프를 뜯는 거룩한 동정녀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곳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친 사랑 때문에 속세에서 육신이 찢기는 능지
처참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사나운 맹수에 잡아먹히고, 바다에 빠뜨려 죽임을 당했던 이
들이 모두 성한 몸으로 영원불멸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온순함 : 말만 들어도 황홀해지는군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정말로 즐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
가 그런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찬 : 그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
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그것을 가지려고 원한다면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그
것을 나눠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온순함 : 알 것 같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히 기쁩니다. 자, 우리 어서 서두릅시다.
중생(요1:13)
존 번연의 마지막 설교 (1688년 7월 런던에서 설교한 것임)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이 말씀은 그 말씀 앞에 나오는 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인도하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1-13).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1)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렸으나 그들 중의 일부는 그를 영접치 않았으며, (2) 그들 중의 일부는 그를 영접하고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배척하는 자들은 그냥 지나치십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순전히 행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영접하지 아니한 자들은 오직 혈통과 육정으로만 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를 영접한 사람들, 즉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I. 중생의 기원. “혈통으로나…으로 된 것이 아님.”
1. 「혈통으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상속자가 상속받는 자로 태어난 것처럼 그와 같이 믿도록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혈통으로 나지 않았다는 말은 세대에 의해서나 육정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혈통으로 태어났다는 말의 뜻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행17:26). 그러나 그가 여기서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말할 때 그는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육신적인 특권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결코 안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말하려고 생각지 말아라. 너희가 천국에 가려면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만 한다”고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2. “육정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흔히 인간 속에 들에 있는 온갖 방식의 방탕에 접근하려는 열렬한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욕망들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욕의 욕망들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육신적인 사람 속에는 타락하려는 의지가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또한 구원받으려는 의지와 천국에 가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대한 특권을 조금도 부여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내세의 일들을 추구하는 자연적인 욕망이 있다 하여 그것이 그가 죽을 때 천국에 갈 것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나는 자유의지론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러한 주장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가장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은 언젠가 구원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마암음이니라”(롬9:16). 원함이나 달림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나”(롬9:31).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한 말은 덕 있는 삶을 따라 사는 길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이 사는 사람은 천부적인 은사를 타고났다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고자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일들 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도 자연적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지 못하며 그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만일 당신 속에 하나님의 병이 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천국 문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욕망이나 소원을 가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원이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지는 못하리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요. 그것이 우리의 뜻에 달려 있다면 나는 여러분 모두를 천국에 가도록 하려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울부짖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만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이제 이 진리를 좀더 살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다 그와 같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는 그들이 그와 같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영원한 구원으로 영접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을 찾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중생의 상태에 들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복음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II. 나는 이와 유사한 한 두 가지 예를 들므로써 여러분들에게 중생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자궁의 캄캄한 굴속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도 거듭나기 전에는 죄의 캄캄한 굴속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신생아라고 불렵니다. 같은 영혼이 육적인 상태에서는 이 길을 좋아하다가 거듭 났을 때는 다른 길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있는 아이가 출생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죄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5:14). 죄의 무덤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출생한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예는 그리스도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십니다”(계l:5).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중생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위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중 생 간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즉 “태어난다는 것”은 이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벗어나 회복된다는 뜻이며, 이 어두운 세상 나라에서 그의 귀한 아들의 나라로 옮기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 어머니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태 어 나는 것도 하나님의 영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III 나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중생으로 인한 몇 가지 결과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웁니다. 만일 아무런 소리도 없다면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라고 즉 기독교인이라고 불리 우는 당신이 만일 소리치는 자가 아니라면 당신 안에는 영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라면 당신은 외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피의 어두운 굴에서 일으켜내자마자 당신은 하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수의 마음을 움직이자마자 그 간수는 “구원받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리이까?” 라고 외쳤습니다. 아! 런던에는 결코 기도를 하지 않는 신앙 고백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다방에만 다니고 장사에만 신경을 쓰고, 외모에만 관심을 가져서야 어찌 기도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랑이라면 당신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아이가 우는 것은 당연하며 아이는 또한 젖가슴을 찾아야만 합니다. 젖이 없다면 아이는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을 신생아를 구별하는 참된 시금석으로 보았습니다. 신생아는 그것을 믿고 자라기 위해 진실한 말씀의 젖을 사모합니다. 당신은 약속의 젖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진 사람은 세상에 있을 때 살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아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66:11). 당신이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당신의 영혼 속에 받아들일 때까지는 결코 만족이 없을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지요! 아마 그에게는 창녀의 노래가 훨씬 더 달콤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거듭난 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젖이 없으면 결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의 젖가슴이 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들은 밤낮으로 그 젖을 빨며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그 젖을 빼앗아간다면 그 참담함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육신적인 하늘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3.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어머니의 자궁만큼 그를 따뜻하게 해주며 안락하게 해주는 다른 것이 없다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도와줄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출생 시에 그를 위한 강보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을 계속 살게 하는 약속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닌 것들로 스스로들 따뜻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겔1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내가 네게 금실을 수놓은 옷을 입혔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을 계속 살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가졌을 때 그 아이를 위해 얼마나 고운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여러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놀라운 금실로 된 옷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자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아주 귀엽게 보이도록 그들에게 옷을 입혀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겔16:11-12 에서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13절에서 “네가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장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은혜로 장식한 것입니다. 신생아는 이것이 없으면 살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금빛 의가 없다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4.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양육됩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위안이 될 것을 주는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릎에서 놀 것이며(사66:12)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할 것입니다(사66:l1). 또한 13절에서 그는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 속에는 거듭난 자만이 알 수 있는 유사성이 들어 있습니다.
5. 대체로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닮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유사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갈4장).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은 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와 닮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돔의 자식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특정에 의해 악마의 자식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자식들은 악마의 일을 할 것입니다. 모든 불의한 일들은 다 악마의 일입니다. 당신 이 세상에 속한 자이면 당신은 세상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당신이 하늘에 속한 자이면 당신은 하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6. 자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자기 자신과 닮은 경지까지 그를 교육시 키려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의 가풍을 배웠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교회의 관습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양육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삶을 규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집의 방식을 배웁니다.
7. 어린이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신발을 원하면 그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이를 부탁하며 빵을 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와 같이 해야합니다. 당신은 영적인 양식을 원합니까? 하나님에게 그것을 부탁하십시요. 당신은 은혜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에게 구하십시오. 사탄의 유흑을 물리칠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에게 나아가 간구하십시요. 악마가 당신을 유혹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께 아뢰십시오. 가서 당신의 모든 불평들을 하나님에게 쏟아 놓으십시오. 이것은 지녀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면 그들은 아버지깨 가서 그것을 아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유혹을 만날 때 그들의 하나님께 달려가 이를 아룁니다.
이 주제에서 당신이 명심해야할 첫번째 것은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인지 아닌지를 엄밀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위에서 말한 것들에 비추어 당신이 자연의 자녀인지 아니면 은혜의 자녀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 세상의 어두운 굴에서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습니까? 당신은 “나의 아버지”라고 외치는 법을 배웠습니까?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리라(렘3:19).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외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젖으로 충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림이 없이도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점에 유의하고 또한 진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만일 이러한 특정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결코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당신은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하늘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무엇인가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땅은 결코 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들처럼 살고 있지 않다면 아들들이 받을 몫을 결코 당신 것이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왕의 아들이 거지와 노는 것을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왕의 자녀라면 왕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면 아랫 것들이 아니라 위엣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요. 여러분들이 함께 모일 때는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여러분들에게 약속해 주신 것들에 대해 얘기하십시요. 여러분들은 모두 여러분들의 아버지의 뜻을 사랑하고, 또한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만나는 시험들을 기뻐해야만 합니다.
3.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요.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싸움을 건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끼리 싸운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규칙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을 보고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십시요. 다시 말하노니 그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람과 나는 어느 날엔가 천국에 가야만 한다”라고 말하십시오. 서로 섬기시고, 서로를 위해 선을 행하십시요. 만일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생긴다면 이를 바로 잡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끝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식처럼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쫓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교훈을 배우십시요. 거룩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명심하고, 여러분들이 어느 날엔가 여러분들의 아버지를 대면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요.